인터뷰

산사나이 박영석, 안나푸르나 품에 잠들다

이학성 기자 2012. 1. 19. 17:10

 

 

 

산사나이 박영석, 안나푸르나 품에 잠들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이었다.”

 

 산사나이 박영석 대장(48)이 결국 그 자신이 산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안나푸르나의 품 속에 잠들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 3극점 답사, 7대륙 최고봉 등정 등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서도 세계 탐험사에 유례없는 3대 난벽(難壁)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나선 그 대신 태극기에 싸인 유품과 영정 사진만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영석 대장은 정상에 오르기를 중시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보다 과정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지향했다. 단지 정상을 정복하는 게 목표가 아닌, 일부러 험난한 코스를 택해 한계상황 속의 산을 오르는 그 '고난의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었던 박영석 대장의 산악 인생은 걸음걸음이 바로 고산 등반과 미지(未知) 세계 탐험의 '전설'이었다. “산 사나이가 산에서 죽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히말라야 어느 골짜기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을지….” '산에 가야 산악인'이라는 그의 지론대로 그는 산으로, 히말라야 설산으로 갔다.

 

- 30일, 해발 4800m 베이스캠프에서 위령제 열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산 사나이 박 대장과 신동민ㆍ강기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가 30일 해발 4800m 베이스캠프에서 열렸다. 대한산악연맹은 "이인정 연맹회장과 탐험대 가족 등 8명이 30일 오전 카트만두에서 헬리콥터 2대를 타고 사고 현장 주변을 돌아본 뒤 베이스캠프에서 위령제를 지냈다"고 전했다.

위령제는 평소 등반가들의 관행에 따라 라마 승려가 주관하는 '라마불교 식'으로 진행됐으며, 우리 정서에 맞게 참석자들이 술을 따르고 절을 지내는 제사 형식도 추가됐다.

위령제에는 박 대장의 동생과 장남, 신동민 대원의 부인, 강기석 대원의 동생 등 가족과 박 대장과 친분이 깊은 허영만 화백 등이 참여했고 박 대장의 기존 탐험대원 2명, 사고대책반의 김재봉 산악연맹 전무이사, 김재수 대장 등 2차 수색대원 등도 함께 자리했다. 이로써 박 대장을 찾아 처음 베이스캠프를 나섰던 19일 이후 12일 동안 지속됐던 수색작업이 막을 내리게 됐다.

 

- 3일 최초 ‘산안인 장(葬)’ 으로 드린 눈물의 합동 영결식

 대한산악연맹은 30일 오후 이인정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음달 1일부터 분향소를 마련하는 등 장례 절차를 준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장례는 故 박영석 대장(48), 신동민(37), 강기석(33) 대원이 한국 산악계에 미친 영향과 국민적 애도의 정서를 반영해 국내 산악 관련 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산악인 장(葬)'으로 치러진다. '산악인 장'은 산악인으로서 치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장례이며 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학병원 의생명연구원 지하 강당에서 3일 오전 10시에 엄수된 박영석 대장 합동 영결식에는 설산에 묻히기엔 너무나 아까운 나이의 젊은이 들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박대장의 지인들은 영정 사진 앞에 서서 슬픔에 잠겨 말을 잇지 못했다. 박 대장과 산악회 모임에서 알게 됐다는 김성녀(가명·65)씨는 "박 대장은 살아 생전에 노래도 좋아하고 주변 사람에게 잘 베풀었다"며 "예전에 도봉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무화과를 참 좋아하셨다"고 말하며 박대장을 회상했다. 영결식이 열린 지하 강당은 조문객들로 가득 찼다. 앞쪽에는 가족과 친지들, 뒤쪽에는 산악회 회원들과 일반 조문객들로 발 디딜틈 없었다.

진혼곡에 이어 묵념이 끝나자 여기저기 애써 참았던 눈물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특히 추모영상에서 "산악인은 산에 가야 산악인이고 탐험가는 탐험을 해야 탐험가"라던 박 대장의 모습과 음성이 나올 때에는 조문객들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추도사에서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던 세 사나이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며 "그들은 지금 우리를 떠나지만 새로운 산과 또 다른 삶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강석호 대한산악구조협회 회장도 "그들은 역경과 일시적 불행에 지치거나 굴하지 않고 도전과 탐험으로 돌아가는 놀라운 복원력, 무한한 헌신과 열정을 보여줬다"고 추도했다. 전병구 한국산악회 회장도 "그대들은 우리의 형제와 아들이었기에 가슴을 두드리며 운다"며 "살덩어리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아픔을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대표 인사가 이어지자 흐느끼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박 대장의 큰 매형인 이계천씨는 "분명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희망은 사라지고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였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자랑스런 대원들의 숭고한 뜻과 도전정신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신동민 대원의 친형 신동조씨는 "오늘처럼만 당시에 날씨가 좋았더라면…"이라고 크게 울부짖었다. 강기석 대원의 친동생 강민석씨는 "우리들은 이 세명의 대원들 덕분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영결식이 끝나는 순간 더 이상 슬퍼말고 그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가슴에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친지, 선후배 등 조문객들의 헌화와 분향이 이어졌다. 이날 영결식장을 찾은 연영숙 한국등산학교 부회장(60)은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겠다"며 "열심히 살며 그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 이름과 달리 험한 산세 속에 끝내…

 안나푸르나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산세는 험하고 하루에도 수차례씩 기상이 바뀐다. 수시로 발생하는 눈사태 때문에 산악인들에겐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악마의 봉우리라고 까지 불린다. 역대 도전자 1437명 중 121명만이 꼭대기에 설 수 있었다. 탐험대 43명과 셰르파 15명 등 58명이 이곳에서 잠들었다.

국내 최초 8000미터급 14좌를 완등한 엄홍길 대장은 네 번의 실패와 동료를 잃고 겨우 이 산의 정상을 밟았다. 1999년엔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자 지현옥은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 공포의 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산악인들의 도전 본능을 자극해왔다.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바 있는 박영석 대장은 이번에는 남벽에 ‘코리안루트’를 개발하려고 도전했다. 그는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발에 성공, 코리안 루트를 뚫었다. 안나푸르나 남벽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로체 남벽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잔혹코스'다. 그의 안나푸르나 남벽 도전은 세계 통틀어 50번째다. 성공은 13차례에 불과했고, 9명이 그 운명을 달리했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그랜드슬램을 이뤘는데 또 도전하느냐”고 말렸다. 그는 “탐험가에게 정년은 없고 내 나이에 맞는 탐험과 등반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렇다. 박영석은 결코 늙지 않았다. 도전과 탐험 앞에서 그의 열정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그런데 부러진 갈비뼈 두 대를 스스로 맞추고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 그는 우리 곁에 돌아오지 않았다. 안나푸르나 남벽은 1%의 도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산행만큼이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구조의 현장

 26일부터 본격적인 수색에 나선 산악연맹이 구성한 '드림팀'은 국내 최고 고산 등반가로 꼽히는 김재수(50) 대장이 구조대를 이끌고 있다.

김 대장은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 등정에 도전한 고미영씨의 등반 파트너로 2009년 7월 낭가파르바트에 함께 올랐다가 고씨의 실족사를 눈물로 지켜봐야 했었다. 그는 지난달 초오유를 올라 세계 최단기간(4년 4개월) 14좌 완등에 성공하며 고씨와 한 약속을 지키기도 했다. 또한 '박영석 패밀리'로 통하는 강성규(45) 대원은 박영석 대장의 등반 습관을 가장 잘 아는 구조 전문가이다. 대한산악구조협회에서 활동하는 베테랑 요원 진재창(46)·구은수(41) 대원도 '1%의 가능성'을 잡으려고 네팔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산악연맹 관계자는 "21일부터 1차 수색 작업을 진행했던 유학재·김형일 대장 역시 국내 최고의 고난도벽 등반가"라며 "20일 각자 원정을 떠날 예정이었던 두 사람은 19일 저녁 소식을 듣자마자 안나푸르나로 행선지를 바꿨다"고 말했다.

김재수 대장이 이끄는 구조팀은 낙석과 눈사태 위험을 안고 베르크슈룬트 지역을 집중 수색했지만 박영석 원정대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끝내 산이 되어 묻힌 박영석 대장의 삶>

 박영석 대장(47)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 말했던 것 처럼, 히말라야 어느 골짜기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14좌 등반,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루트 개척 등 세계 산악계의 큰 별이었던 박 영석 대장이 안나푸르나에 묻혔다. 박 대장의 발자취를 2003년 그가 써 낸 자서전 '끝없는 도전'을 통해 돌아봤다.

 

-어린시절부터 타고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은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담벼락이건 지붕이건 가리지 않고 높은 곳이면 어디든 오르곤 했다"고 회고한다. 어린 시절 우상은 여행수필가 김찬삼, 산악인 고상돈, 최초로 남극점을 밟은 극지탐험가 아문센(노르웨이) 등이었다고. "탐험가가 되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문을 열어놓고 잠들곤 했다는 아문센의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더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겨울에 팬티만 입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잤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가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오산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동국대 산악부의 '마나슬루 등정' 환영 카퍼레이드를 우연히 본 그날부터 박 대장은 동국대 입학이 아닌, 동국대 산악부 가입을 목표로 학업에 열을 올렸고 재수 끝에 동국대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물론 그 길로 산악부에 가입했고 산악인 박영석의 삶이 시작됐다.

 

- 수없이 죽음의 순간을 목격했지만, 그래도 산사이로 죽는 것이 나의 운명

 스물여섯이었던 1989년 히말라야 랑시샤리 2봉(해발 6,427m)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박 대장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것은 1991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첫 도전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선발대로 암벽을 오르며 루트를 개척하다 100여m 아래로 추락한 것. 가까스로 박 대장을 연결한 로프를 놓치지 않은 동료의 도움으로 추락사를 면했지만 이 사고로 박 대장은 광대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다행히 해발 6.500m의 캠프2에 머물고 있던 미국 원정대의 팀 닥터가 마취약 조차 없이 응급 수술을 집도하며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사고 트라우마는 적지 않았다.

"추락 사고를 당해 수술까지 받은 내가 그해 겨울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뒤 박 대장은 다시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악천후로 인해 정상을 눈앞에 두고 다시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1993년 봄, 마침내 세 번째 도전에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더욱이 아시아 최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라는 이정표도 세웠다. 그러나 하산길에 동료를 잃었고 박 대장은 오랫동안 깊은 실의에 빠졌다. 이후로도 박대장은 산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겹겹의 슬픔을 끌어안고서도 그의 등반은 계속되었다.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이후 촉망받는 산악인으로 떠오른 박 대장은 8년2개월만에 히말라야 8,000m급 14개 좌를 모두 올라 세계 최단기간 14좌 등정 기록을 세우며 세계 최고의 산악인 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4년 남극 탐사에 나서 무보급 도보로 44일 만에 남극점에 도달했고 2005년에는 정반대의 북극점에 섰다. 이로써 박 대장은 세계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세계 3극점을 모두 등반하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세계 최초로 달성하며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 “영석아, 이제 그만 됐다” 멈출 수 없는 산악인의 삶

 베링해협 도보횡단, 태양전기차(車)로 남극횡단 등을 시도에는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패도 잦았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에서는 그가 사랑한 후배 산악인들이 숨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마흔 중반을 넘어서면서 체력이 떨어졌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매달렸다. 그 무엇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박영석의 가까이에서 그의 기록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진정 아꼈던 선배들은 그를 볼 때 마다 "영석아, 이제 그만 됐다"며 눈물을 뿌렸다.

그는 멈출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만하라는 말은 마치 내 삶을, 내 인생을 멈추란 얘기로 들려요. 뭔가 이루면 꽉 찬 느낌이 있어야 만족하는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 이룰 때마다 허탈한 것 같았어요. 결국 명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는 끝없는 등반을 통해 더 큰 욕망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순수함이 있었다. 그는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던 길을 만들려고 했다. 세계등반사에 남는 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길을 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 길을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가 걸어가는 일은 그가 스스로에게 평가내렸던 ‘명예’라는 말과 너무나 반대되게도 허공에 새긴 혼자만의 길일지 모른다.

"히말라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몇 가닥뿐입니다. 신(神)이 허락해주는 시간에만 우리는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죠. 전율이 돋습니다. 제가 TV에 잘 안 나가고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서 강연이라고 떠드는 걸 싫어하는 것은 신에 대한 겸손입니다. 숱한 원정에서 후배들을 죽이고, 신이 살려줘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걸로 팔아먹겠습니까."

그의 도전은 이어졌고 히말라야에 '코리아루트'를 개척해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박 대장은 결국 2009년 5월20일, 5번째 도전 만에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루트'라는 이름의 신루트를 개척해냈다. 그리고 지난 9월 안나푸르나 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돌아오지 않았다.

눈사태를 만나고 크레바스 속에 빠지기도 하는 등 수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박 대장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죽음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리도 나 역시 많은 사고를 겪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오가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 중략… 세상에는 여러가지 모습의 죽음들이 있다. 병마와 싸우다 고통 속에서 죽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내가 등반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내 삶은 산에서 그 마지막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 죽음들에 비하면 대자연의 품, 산에서 맞는 죽음이란 얼마나 행복한가. 산 사나이로서 산에서 죽는 것,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내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학성 기자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늘 이걸 달고 살아요."

  이인정(66)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우황청심환부터 털어넣었다.

"내가 영석이를 똑바로 못 쳐다봤어요. 또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해서. 이 녀석이 에베레스트봉 남서벽을 등정(2009년 5월 20일)한 직후 축하해주러 갔잖아요.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마중나왔더라고. 택시를 타고 함께 숙소로 가는데 울음부터 나와요."

 

Q. 그때는 등반에 성공했을 땐데, 왜 울었다는 겁니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 녀석을 보니까 막 울음부터 나왔어요. '영석아, 너 이제 그만해야지'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 안 남았어요' 대답해요. 이번에 사고가 난 안나푸르나 남서벽 등반 전에도 네팔에서 만났다고. 술 한 병을 주고 돌아왔는데. 그 뒤 얼마 안 돼 베이스캠프에서 라마제(祭)를 지내고 전화가 왔어요. 목소리가 안 좋더라고. '괜찮으냐' 물으니, '피곤해서 사흘간 쉬고서 시작하겠습니다' 했어요. 그게 끝이지…."

 

Q. 산악인에게 위험하니 산에 그만 가라고 말릴 수 있을까요?

 "부모도 자식도 못 말렸어요. TV에서 보니 영석이는 정상(頂上)에 서면 아들 이름을 부르더라고. 그렇게 아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생각했으면 그만 갔어야지. 이런 말 하면 내가 욕먹을지 모르나…. 아마 사고가 없이 올라갔다 오면 또 다른 산을 준비할 게 아니오."

Q. 오희준(2007년), 이현조(2007년), 고미영(2009년) 등 최근 몇 년간 유능한 산악인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후배들이 원정을 떠났다가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전화를 걸어오면, 그게 천상의 목소리야.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여성산악인 고미영 사진을 가리키며) 참 안 좋은 게, 아까 말한 네팔에서 박영석 에베레스트 등정 환영행사 때 고미영이도 왔다고. 그리고 두 달도 안 돼 고미영이가 사고났잖아. 내 참…, 고미영 사고 때 디테일한 것은 모르시죠?" (고미영은 오은선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9년 7월 11일 자신의 11번째 도전이었던 낭가파르밧봉을 등정한 뒤 하산하다가 실족해 추락했다.)

 

Q. 그렇게 도전이 계속된다면, 산악인의 운명이란 실종과 죽음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크겠지요.

 "내가 등산학교 교장을 할 때 '등반은 집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늘 말했어요. 2006년 '중동고 10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내가 단장으로 갔어요. 정상공격조로 올려보낸 한 대원이 마지막 캠프에서 탈진한 한 여성산악인을 발견했어요. '어떻게 할까요?' 무전연락이 왔어요. '당연히 데리고 내려와야지.' 그렇게 해서 동사(凍死) 직전에 살려왔어요. 손가락 몇 개는 잘랐지만. 이 여성산악인 때문에 후배는 정상을 못 밟은 셈이지요. 그는 이 원정을 위해 2년간 훈련했어요. 그때는 화가 나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을 살렸다는 것에 굉장히 행복하게 생각해요.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죽는 것도 어렵고 사는 것도 어려워요."

많은 이들은 박대장이 너무 그리워 그가 적어놓은 ‘산 정신’을 들춰보며, 그를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 2003년, 김영사에서 나온 <끝없는 도전>은 2011년 박영석 대표를 기억하는 이들이 한 구절, 한 구절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 그가 이룬 업적보다도 그가 써대려 간 그대로 살다간 삶이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박영석! 당신을 기억합니다. -박영석의 어록

 “사실 실패가 두려운게 아니라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

“세상의 주인이 어디있습니까? 세상의 주인은 도전하는 자가 주인입니다.”

“꿈을 이루려면 꿈을 꿔야죠? 기본적으로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면서 꿈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꿈을 꿔야 할 것 아니에요. 꿈이 없는데 어떻게 꿈이 이루어 집니까?”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나는 포기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