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덕사 선원, 회주 혜인스님

이학성 기자 2012. 1. 19. 16:38

 

 

                                                                       광덕사 선원- 회주 혜인스님

          일타스님 진신사리와 부처님 진신사리 등 보궁전에 봉안

 

  소백산과 월악산의 중간쯤에 형성된 바위산으로 중부권 최고의 명산으로 불리는 도락산은 단양팔경 중 4경이 인접해 있어 주변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도락산은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이 '도(道)를 깨닫고 그 도를 즐길 최고의 명산'이라하여 도락산(道樂山)이라는 명칭을 붙여진 산이다. 또한 고려의 공민왕이 중국의 명나라 주원장에게 대항하여 중국을 공략하고 고구려의 옛 국토를 수복하려는 큰 뜻을 품고 국력을 기울여 최대의 산성인 독락(獨樂)산성을 축조한 곳이다.

지금도 산성의 석벽과 석축은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사찰 경내지 전면에는 웅장한 산성의 옛 모습이 온 산을 우렁차게 감싸며 줄기줄기 도량을 감싸고 뻗쳐 있다.

산성 안에는 십승지(十乘地)가 있으며, 위로는 신선봉이 자리하고 있다.

도락산 정상 가운데 있는 독락산성의 중앙자리와 신선봉 바로 아래 사찰의 법당이 위치하고 있다. 옛날 중국에서 도를 닦던 많은 스님들이 동쪽에서 뻗쳐오는 웅장한 빛을 보고 그 빛을 찾아 동쪽으로 온 바, 도락산의 지금 법당 자리에서 끝이 없는 광명이 뻗쳐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크게 감복한 스님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기를 발원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방대한 참선도량 갖춰-보궁전

 충북 단양 도락산에 위치한 광덕사에서 지난 9월3일 보궁전 현판식과 11월 7일 보궁전 삼존불 및 탱화 점안 회향식이 봉행하였다. 광덕사에서 2km 지점에 위치한 보궁전은 도락산의 산세와 단양군이 한눈에 보이는 빼어난 경관이 있어 진신사리 참배 및 성지순례지로도 각광받을 전망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영축총림, 해인총림, 조계총림 등 총림들이 있다. 그러나 동남아의 여러 나라 스님들, 그리고 유럽과 남미, 북미 등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불교를 배우고 연구하고, 참선을 하고 싶어도 저들을 모두 수용할 만한 시설과 외국인들을 위한 수행도량이 없다.

이를 위해 도락산 광덕사선원에서는 불사계획을 수립하여 국제총림 설립의 대원력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장차 국제총림에는 동. 서양의 외국인 스님 등 전 세계의 비구승들이 와서 참선하고 수도할 수 있는 선도량을 건립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승납과 수도내용에 따라 여러 곳으로 나뉘어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하고 방대한 참선도량이 갖춰지게 된다.

참선할 수 있는 선방과 잠자고 생활할 수 있는 숙소, 그리고 식사하고 휴식할 수 있는 별도의 도량을 골고루 갖춘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도량이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세계에 망라되어 있는 불교의 장서들을 가능한 대로 입수하여 불교의 세계적인 책자와 자료들을 비치하는 도서관 또는 장경각을 설립할 예정으로 있다.

보궁전 삼존불 및 탱화 점안 회향식이 봉행되어 취재진이 광덕사 회주 혜인 스님을 만났다.

 

 

해인사 장경각서 하루 5천배, 200일 만에 백만 배 성취

 그냥 올리는 절이 아니오, 기도도 아니다. 지난 세월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업에 대한 참회였다. 코피가 쏟아지고 무릎에 고름이 고이기도 했다. 하루 5000배를 시작한지 한 달 정도 될 무렵 방석 밑에서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는 듯 했다. 포기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성철스님이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어 지옥 안간다’는 그 말씀에 마음을 잡고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순간순간이 괴로웠지만 고통이 절정에 이르자 이내 사라졌다. 절을 하든 안하든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차원의 환희가 밀려 왔고 100만 배를 하고 나서 이제야 진정한 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듯 했다. 혜인스님의 100만 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제는 혜인스님보다는 도락산 너무 좋아서 산 이름을 따 도락산 스님으로 호를 쓰고 있다.

 

 

 

<광덕사 회주 혜인스님 인터뷰>

Q : 행사에 대한 성격, 특징, 규모와 진신사리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A : 오늘 행사는 탱화와 불상 점안식을 치른 것입니다. 진신사리 점안식은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하여 진신사리 봉안은 12월 25일에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것을 보궁(寶貢)이라고 합니다. 이는 제주도 약천사를 짓는데 100억원이상 경비가 소요 되었습니다. 이곳 역시 진신사리를 모시는 보공을 위해 100억원이상이 들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보공 공사를 하면서 사람이 하고 싶은 일, 맡은 일을 다 하고 죽는 사람이 없듯이 저역시 나이가 일흔 살이 됐으니 이젠 모든 것을 후세 사람들한테 남겨 주고 조용한 곳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하고 마음의 정돈을 위해 사방 돌아다니다가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생을 마감하자는 마음에서 이곳에 절을 짓게 됐습니다.

 

 

Q : 일타스님 진신사리와 부처님 진신사리

A : 팔을 불태우는 걸 연비(煙臂)라고 합니다. 연기 煙(연), 팔 臂(비) 라고 하여 팔을 태우는 것을 연비라고 하고 손가락을 태워도 연비라고 합니다. 저의 스승인 일타 큰 스님께서 연비공양으로 손가락4개를 불태우시고 남은 손가락 하나로 무한한 노력과 연마를 통해 글을 쓰셨는데 큰스님의 글씨자체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손가락이 멀쩡한 제가 쓴 글씨보다 훨씬 예술적 경지에 다다른 글씨체임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일타 큰스님께서 태워버린 손에 사리가 남았습니다. 큰스님의 진신사리와 스님께서 평소 귀중하게 여기셨던 물려받은 귀중한사리와 유품을 어떻게 모실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스리랑카에서 그 소식을 듣고 왕궁에 모셨던 사리를 대통령 동생분이 스리랑카 승려교육기관의 대학장 스님과 공양하는 분들까지 전부 총동원해서 스리랑카 왕궁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3과를 저희 보궁전에 안치 할 수 있도록 전통식의식을 치른 후 직접 가지고 오셨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몇 백과가 있습니다. 그 중 일부인 3과를 저희에게 주신거죠. 아무나 아무데서나 모시는 것이 아닌 왕궁에서 모시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전통을 예외로 보궁전을 짖고 안치하게 된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일부러 제가 그 분을 초청한 것도 아닌데 나를 찾아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같이 보궁전에 안치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원래 스리랑카의 종정스님이 오도록 돼 있는데 사정에 의해 못 오시고 대신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부처님사리를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정월달에 스리랑카에서 큰 행사가 끝나는 시점에 저를 초청하였고 저 역시 준비하고 답례차 가기로 했습니다.

 

 

Q : 보궁전은

A : 사리를 자랑하는 것이라기보다도 사리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상징성입니다. 아무나 사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사리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님(일타 스님)이 살아생전에 손바닥에서 나온 것을 직접 저에게 확인시켜 주셨고 스님께서 자신의 사리를 가르쳐주시면서 제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스님의 사리를 아무 곳에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이번 보공 전을 만들어 보존하기 위해 제가 그동안 캐비넷 속에 넣어 둔 것이 못내 죄송한 마음일 뿐입니다.

또한, 큰스님께서 대대로 내려오던 사리를 저에게 내어 놓으시며 소중한 것이니 네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정식으로 잘 모셔라. 그래서 잘 보여주질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사리를 항상 캐비넷에 넣어 두었던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왔습니다. 이제는 케비넷에서 나와 보궁전 봉안식을 하면서 일타 큰 스님의 말씀대로 정식으로 잘 모시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안 합니다.

12월 25일에 진신사리 봉안식 때 일타큰스님 연비공양하시고 난 뒤에 손에서 나온 진신사리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사리하고 이번에 스리랑카 왕궁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와 함께 봉안식을 거행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안을 다하고 나면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찾아와 친견하면서 기도하고 반성하는 장소로서 자기 마음에 평정을 찾고 마음에 안정이 안 되는 사람이나 방황하는 사람 등, 마음이나 몸으로 힘든 사람들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잘못 살아온대 대한 반성하는 사고, 이런 사람들은 와서 조용히 사리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수양을 하면서 회개하고 부처님을 모시는 일에 정진할 수 있는 이런 시간을 갖도록 할 것입니다.

 

 

Q : 일타 큰 스님의 일화

A : 스님하고 같이 있으면 글이나 말씀보다도 마음씀씀이에 대해서라든지 대인관계 대해 과연 큰스님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스님의 모습은 내가 본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갖게 되었습니다.

예로, 적광이라는 해인사스님이 있는데 일타스님의 제자 이면서도 일타스님을 가지고 놀아요. 어린 제자가 큰스님한테 농담 반, 진담 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씨름도 하고 레슬링도 하기도 합니다. 나이 드신 스님이 젊은 제자한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면 큰 스님을 약을 올리는데도 스님은 버르장머리 없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지 않아요.

큰스님이 마당을 쓸다가 빗자루가 넘어가면서 다리를 다친거예요. 스님이 아프다고 하니 그 제자가 옆에서 ‘아이구 꼬시라’ ‘아이구 꼬시라’ ‘스님, 어디서 깨 볶는 모양이죠, 이렇게 꼬실 수가 있나요?’ 이러거든요. 스승하고 제자사이가 그렇게 이어질 수가 없는 거거든요.

스님께서 ‘이놈 어디 보자’하면 ‘보면 어떻게 하실건데요’하고 달려들어요. 스님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부엌에 가서 풀을 가져오너라 발라야 되겠다’고 시켰더니 돌아가면 될 것인데 굳이 작은 문으로 가다가 머리를 다친거예요. 그때 큰 스님께서 ‘아이고 꼬시다’ ‘아이고 꼬시다 어디서 깨 볶는가 보다’고 제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십니다.

 

 

Q : 스승님의 가르침

A : 제가 하산 하면서 절을 떠날 때 스님이 따라 나오시길래 ‘스님 들어가세요’라고 하면 ‘괜찮아, 나 바쁘지 않거든, 하며 그 먼 산자락을 돌아 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해 주십니다. 같이 산을 내려오면서 구불구불 기나긴 걸음을 걸으시면서 저에 해 주시던 말씀이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세상에 그 어떤 자애로운 어머니가 그렇게 하겠는가, 이 세상 어떤 자애로운 아버지가 저렇게 하겠는가, 피도 살도 섞이지 아니한 남남끼리 우리는 만났는데 저렇게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구나. 나로 하여금 너무나도 느끼게 해주는구나. 아직까지 남 비방하는 것을 본적이 없고 짜증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돌이켜 회상하면 스님은 저 자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신 것 입니다.

 

 

Q : 혜인스님의 설법, <오늘을 사는 불자들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

A : 요즘에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기업하는 사람들이나 정치계나 연예계나 모든 분들이 보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고 이혼율이 너무 많아. 그래서 이거는 뭔가 모르게 물질만능시대에서 물질보다는 아무리 돈이 없어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극복하고 살 수 있는 이런 정신적인 믿음이 너무나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배고파도 만족할 줄 알고 돈이 없어도 만족할 줄 알고 기쁨을 누릴 줄 알고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법인데 여기에 그만함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사는 이런 것이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크게 나눠서 두 가진데 하나는 신심을 단련하여 지혜에 눈을 떠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비와 덕이 넉넉해야 됩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지혜에 눈을 뜨지 못해가지고 캄캄해가지고 자기만 알고 남을 이해 못하는 답답하고 캄캄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이거는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넉넉하면 나눠줄 줄 알아야 되는데 자비의 덕이 너무 모자라요.

‘나만 출세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그만이다’ 이런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불교가 현재까지는 수행위주로 산다고 하면서도 불교가 너무나 침체 속에서 제자리를 걷고 있다고 봅니다. 의사가 됐으면 아픈 사람이 찾아와서 침놔달라고 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아픈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 돌아다니면서 헌신적이고 실질적으로 보살행을 하는 그런 시대가 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혜인스님은,,>

 14세의 나이에 출가 하여 법랍55년의 세월을 보낸 혜인스님은 일타 큰 스님의 제자로 40년을 보냈다. 1943년 제주도 남제주군 화순리에 출생하여 1956년 출가해 일타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2년 해인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제방선원에서 안거 수선했다.1981년 제주도약천사 대작불사 원력을 세운 후 1988년 대가람 낙성식을 가진데 이어 지금의 광덕사 대불사를 진행 중에 있다. 현재 조계종 계단위원이며 약천사와 광덕사의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