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철의 사나이' 박태준 , 산업화의 큰 별이 지다

이학성 기자 2012. 1. 19. 17:23

 

                                                    '철의 사나이' 박태준 , 산업화의 큰 별이 지다

                                                                              ‘철의 사나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기억하며..

 

 지난 12월 13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인은 급성 폐손상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월 13일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박태준 회장 장례식은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17일 발인했다. 정부는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인사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 훈장인 청조근정훈장을 새로 수여했다. 사회장은 국가와 사회에 공적을 남긴 저명인사가 사망했을 경우 사회 각계 대표가 자발적으로 모여 장의위원회를 구성해 사회 명의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사회장은 국가장과 같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장례절차와 방법, 장지 등을 결정 및 거행한다. 정부에서는 장례비용 중 일부를 보조하거나 고인의 업적을 감안, 훈장을 추서하기도 한다. 포스코 측은 서울 포스코센터와 포항 및 광양 제철소, 일본 사무소 등 총 7곳에 박태준 회장 분향소를 마련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폐부종 증세가 악화돼 한달 전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 11월 9일 입원을 한 박태준 회장은 지난 11월 11일 흉막-전폐절제술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12월 5일 급성 폐손상이 발생,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계속해왔다. 박태준 회장은 지난 2001년 당시 흉막섬유종으로 인해 미국에서 폐에 생긴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폐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등 후유증을 겪어왔다. 당시 박태준 회장의 폐에서는 모래성분이 발견돼 젊은 시절 영일만 벌판에 포스코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먼지를 장기간 흡입한 게 폐질환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지난 1964년 현 대구텍의 전신인 대한중석 사장 재임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바꾼 후 68년 4월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제철 사장직 재임 10년만에 연 55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현재 포스코는 연간 철강 생산규모 3,500만t으로,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 중 하나(세계 6위)로 성장했고 자동차,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정계에도 입문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정계에 입문해 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88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후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의원을 맡기도 했다. 1991년까지 포스코에 몸을 담았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에는 총리를 역임했으며 2008년 6월에는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박태준 명예회장 유족 측 대변인인 김명전 삼정 KPMG 부회장은 13일 빈소에서 박태준 회장 유언 등을 전했다. 김명전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이 별세 전 "포스코가 국가 경제 동력으로 성장해 만족스럽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밝혔다. 박태준 회장은 이어 "포스코가 더 크게 성장에 세계 최고가 되길 바란다"며 포스코 임직원들에게 애국심을 갖고 일해줄 것을 당부했으며 포스코 창업 1세대 중 어려운 이들이 많은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태준 회장은 유족 중 장옥자 여사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했으며 가족에게는 "화목하게 잘 살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김명전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 개인 명의로 된 재산 및 유산은 하나도 없었다"고 확인했다. 김명전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은 평소에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 자식들의 도움으로 생활비를 받아 살았고 현재 살고 있는 집도 큰딸 소유의 집"이라고 했다.

 

-정·재계 인사, 시민… 조문행렬 끊이지 않아

빈소 30분 머문 MB “나라 위해 큰 일, 많이 기억할 것”

 1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흰 국화로 둘러싸인 영정사진 속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회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맨 채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철의 사나이’로 불리며 한창 제철소 현장을 누비던 1980년대 말 찍은 사진이다.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빈소를 찾은 사람들의 긴 줄이 늘어섰다. 정·재계 인사부터 일반 시민까지 조문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여기에서 마주쳤다. 이 대통령은 14일 오후 4시37분 빈소로 들어섰다. 이 대통령은 이후 30여 분간 빈소에 머물며 유족들에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셨다. 많은 사람이 기억할 거다”고 위로했다. 73년 고로에서 쇳물을 쏟아내기 시작할 무렵 고인과 만났던 때를 기억했다. 태국 출장 중 급거 귀국해 빈소를 지키던 정준양 포스코 회장에겐 특별히 “철 잘 만드는 게 회장님 잘 모시는 길”이라고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조의록에 ‘박태준 회장님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모두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란 글을 남겼다.

 

 장례 사흘째인 15일에도 고인의 뜻을 기리는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날 오전 9시30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정 회장은 “국가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시고 많은 업적을 이루셨던 분이 이렇게 영면하시게 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이날 오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최 회장은 “박 회장님은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이었고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이라며 “아무쪼록 고인의 뜻을 기려 튼튼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도록 후배들이 따르고자 한다”고 말했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14일에 이어 이날 오전 일찍 다시 빈소를 찾아 상주 역할을 하며 고인을 떠나보낸 안타까움을 달래는 모습이었다. 정 회장은 “고인의 뜻을 잘 받들어 (포스코를)더 크게 키우겠다”고 말했다.

 

-애국심. 도전정신. 청렴함 으로 표현되는 박태준 회장의 삶을 회고하며

84세로 영면에 든 박 명예회장의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민주당 대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 박태준 명예회장 연보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박봉관(父)과 김소순(母)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44년(17세) 일본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 결심.

▲1946년(19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마치고 중퇴.

▲1948년(21세) 귀국 후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남조선경비사관 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6기로, 제2중대장으로 탄도학을 강의하던 박정희 당시 대위와 첫 대면.

▲1953년(26세) 육군중령으로 5사단 참모. 5사단의 지리산 잔비토벌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작전 수립 뒤 11월 육군대학 입교.

▲1954년(27세) 육군대학 수석 졸업, 장옥자와 결혼.

▲1957년(30세) 박정희 장군(1군단 참모장)과 재회.

▲1961년(34세) 육군본부 경력관리기구 위원으로 근무 중 5.16 발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1963년(36세) 미국 유학 준비, 육군소장으로 예편.

▲1964년(37세) 박정희의 강력한 요청으로 미국 유학 포기,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령.

▲1965년(38세) 대한중석 흑자체제로 전환. 일본 최고 제철소 가와사키제철소 견학, 종합제철 프로젝트에 관심.

▲1967년(40세)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장에 임명, 박정희의 ‘제철공장 완수’ 특명.

▲1968년(41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 확정(영문 약자표기 ‘POSCO’), 초대 사장 취임.

▲1969년(42세) 차관 도입 무산, 대일청구권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 추진.

▲1970년(43세) 포항1기 건설착공, 열연공장, 중후판공장 착공.

▲1971년(44세) 제선공장, 제강공장 등 주요 공장 착공.

▲1972년(45세) 영일만의 첫 공장으로 증후판공장 준공, 첫 제품 출하.

▲1973년(46세) 제1고로 첫 출선 성공, 일관 종합제철공장 완공(연산 조강 103만t 체제), 포항2기 건설 종합착공.

▲1981년(54세) 포철 초대 회장 취임, 제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민정당) 비례대표 당선.

▲1985년(58세)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착수.

▲1990년(63세) 민정당 대표 취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 출범, 최고위원 취임.

▲1992년(65세) 광양 4기 설비 종합준공. 포철회장 사퇴 및 명예회장 추대. 민자당 탈당.

▲1993년(66세) 해외 유랑, 포철 세무조사로 본인, 가족, 친인척, 측근들에 대한 전방위 비자금 조사.

▲1997년(70세) 5월 초 귀국, 포항 북구 보궐선거 당선, 김대중-김종필(DJP) 연대, 자민련 총재 취임.

▲2000년(73세) 자민련 총재 사퇴, 국무총리 취임과 사임, 포철 민영화 완료.

▲2001년(74세) 폐 밑 물혹 제거수술, 포철 명예회장 재위촉.

▲2005년(78세) 포스코청암재단 확장 설립.

▲2008년(81세)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현).

▲2011년 12월 13일 타계.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군인, 경제인, 정치인으로 이어진 삶의 변곡점

 박태준 명예회장의 좌우명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였다. 그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이 되어서 대단히 만족스럽다.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길 바란다. ‘애국심’을 가지고 일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갈 정도로 조국을 향한 마음이 충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두 번의 대통령의 부름으로 군인에서 경제인으로, 다시 정치인으로 이어진 삶의 변곡점 찍어 살아나간 인물이기도 하다.

박 명예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남을 갖게 된다. 박 명예회장은 1948년 6기로 남조선경비사관학교(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의 중대장이자 선생님으로 박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박 명예회장을 의장비서실장으로 발령했고 두 사람은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영예’로 평가되는 공적의 자리에는 박 명예회장의 영예도 함께 빛났지만, 박 전 대통령의 ‘음영’으로 평가되는 과오의 자리에서는 박 명예회장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박 명예회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이듬해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변신한 박 명예회장에게 박 전 대통령은 종합제철소 건설 임무를 부여했다. 당시 자본, 기술, 경험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포항 영일만에 제철소 건립을 꿈꿨고 3년여의 공사 끝에 마침내 포항제철 증후판공장에서 첫 제품이 출하됐다.

박 명예회장이 인사청탁, 리베이트 요구 등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에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청와대 실세인 박종규 경호실장의 압박을 참다 못한 박 명예회장은 당시 정치권의 압력 배제,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전달했고 박 대통령은 그 메모에 친필 사인을 해서 돌려줬다. 이후 “박태준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소위 ‘종이마패’로까지 불리운 이 메모는 박 명예회장에게 보내는 박 전 대통령의 신뢰와 지원의 상징으로 전해져 왔다.

 

 경제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박 명예회장을 정치권으로 부른 것은 육사 후배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한 박 명예회장은 이듬해 제11대 국회위원(민정당 전국구)으로 정치계에 입문한다. 박 명예회장의 정치 인생은 경제인으로 있을 때처럼 순탄치만은 않았다. 3선 경력을 쌓고 1990년 집권여당의 민정당 대표까지 올랐지만 며칠 만에 이뤄진 ‘3당 합당’ 이후 박 명예회장의 정치인생은 시련을 맞이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 대선공약화’를 요구하다 김영삼 대선후보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대선 직전 민자당을 탈당했고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에는 포항제철 명예회장직 박탈,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 기소 후 일본 망명 등 굴곡진 정치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21세기 첫 총리’로 발탁됐지만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져 결국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박 명예회장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에 등 돌렸다.

시가총액 세계1위, 생산량 세계4위

 

-도전정신과 완벽주의가 키워낸 ‘철강왕’

 군인?경제인?정치인이라는 다양한 이력을 지닌 박태준 명예회장이지만 세상은 그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철강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8년 초기 자본금 140억원으로 세운 포항제철주식회사를 철강회사 중 시가총액 세계 1위, 생산량 세계 4위로 키운 것은 전적으로 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완벽주의였다.

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제철소 설립 때부터 드러났다. 당시 아무것도 없었던 그가 의지할 것은 차관뿐이었다. 하지만 예정됐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자금 제공이 ‘후진국인 한국이 제철사업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세계은행(IBRD)의 부정적 전망으로 무산되자 박 명예회장이 내놓은 방안은 파격적이었다. 이는 농어업분야에만 사용하기로 돼 있었던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일본의 정?재계 유력인사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고 마침내 1970년 연산 103만톤 조강 규모의 일관제철소 1기 설비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착공 당시 박 명예회장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명예회장의 완벽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1977년 8월 발전송풍설비 폭파 사건이다.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박 명예회장은 10cm 가량 콘크리트가 덜 쳐진 불량 개소를 발견하고 이미 80% 공정이 진행된 발전송풍설비를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튿날 건설현장에 있는 모든 임직원, 간부, 외국인 기술감독자들을 모아놓고 다이너마이트로 설비를 폭파했다. 그때까지 투입한 인력, 자재, 공기 등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았지만 ‘포항제철의 사전에 불량시공은 없다’는 값진 무형의 자산을 얻게 됐다.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게 한 뒤 바닷속에서 13.6km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하는 등 박 명예회장의 완벽주의는 이후로도 이어졌다.

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완벽주의는 해외에서 더 큰 인정을 받았다. 1978년 당시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던 등소평이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회장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

끝까지 검소한 길을 걸었던 박 명예회장의 청렴함.

 박태준 명예회장을 가장 빛내는 것은 그의 완전무결한 청렴함이었다. 경영능력을 견줄만한 이들은 많지만 박 명예회장만큼 검소한 길을 걸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게 재계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1988년 6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포스코의 주가는 시초가와 비교해 10배 이상 올랐다. 올해 3분기까지 매출 50조2,000억원, 영업이익 4조4,000억원을 기록한 포스코는 ‘가치투자의 달인’ 워렌 버핏도 “미국 이외의 지역세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기업은 3~4개 정도인데 포스코가 그 중 하나”라고 하며 4.5%의 지분을 갖고 있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닌 회사다. 그러나 박 명예회장은 설립 이후 포스코 주식을 단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다.

 

 박 명예회장 유족 측 대변인을 맡은 김명전 삼정KPMG 부회장은 지난 13일 서울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박 회장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어 “박 명예회장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재산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며 “최근까지 큰딸의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도 자제들의 도움으로 마련해왔다”고 밝혔다.

박 명예회장의 청렴을 보여주는 가장 큰 일화는 일본 미쓰비시 그룹과의 인연으로 탄생한 거양해운의 탄생 비화다. 거양해운은 미쓰비시 그룹이 1990년대 초 과거 20년 동안 포스코가 제철설비를 가장 많이 팔아준 데 대한 답례 차원에서 박 명예회장에게 준 선물이었다. 미쓰비시 은행이 돈을 출자해 화물선을 건조하고 화물 알선도 책임지겠으니 그 수익금을 전액 박 명예회장이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 명예회장은 개인적으로 받을 수 없다며 지배주주를 포항공대 재단으로 해 거양해운을 설립, 수익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들어가도록 했다. 박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철의 이미지를 갖고 계신 분이지만 따뜻하게 세상을 포용했던 사람”이라며 꺼낸 사연도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박 서울시장은 “아름다운 재단을 운영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알고 지냈는데 당시 박 명예회장이 아현동 자택을 매각하고 그 돈을 기부했다”며 “10억원 가량의 금액을 청년의 미래를 위해 써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빈소를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스티브 잡스가 IT산업에 기여한 것보다 우리사회에 더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한국 경제의 토대를 닦은 기업인상에 순연한 불굴의 정신, 애국심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남긴 우리 시대의 거목이다.

 

- 박태준 명예회장의 어록

 박태준 명예회장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지만 그만큼 한마디 말을 꺼낼 때마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어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경영자로 유명하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좌우명)

▲철은 산업의 쌀이다. 싸고 좋은 품질의 철을 충분히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제철보국이다.

▲사람은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는 많은 시간을 사람 문제에 골몰한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피 값이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 건설에 나서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10년은 걸린다. 몇 날 밤이고 진지하게 10년 후의 청사진을 그려 보라.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청사진이 나와야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큰 인연이다. 나에게 일관제철소를 만드는 일이 주어졌을 때, 나는 회피할 수 없는 사명감을 느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 박 명예회장을 기억하며, 첫 황금빛 쇳물 쏟아져 나올 때 우린 만세 불렀고 그는 울먹였다

故 박태준 회장과 함께 감격의 순간 지켜본 사람들

박종태 포항제철소 초대 소장 - 쇳물 나오는 진흙구멍 못뚫어 쇠파이프 두동강, 심장 멎어

이대공 포스코재단 이사장 - 화낼 때 눈빛이 워낙 강렬해 '안광을 제대로 맞으면 정력 약해진다' 말 돌아

이광일 당시 고로 운전계장 - '모래로 세수, 땀으로 샤워'… 5년 노력끝 '첫 아이' 받아

 박종태씨(왼쪽), 이대공씨. 1973년 6월 9일 새벽 5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박종태(82) 포항제철소 초대 소장 등 임직원들은 45m 높이의 작업대에 올라섰다. 용광로 군데군데 뚫린 손가락 굵기의 송풍구 사이로 벌건 쇳물이 끓고 있었다. 용광로 출선구(쇳물이 나오는 구멍)를 임시로 막아둔 진흙만 쇠파이프로 뚫으면 쇳물이 쏟아져 나와야 했다. 하지만 "뚝"하는 소리와 함께 쇠파이프가 두 동강이 났다. 박태준의 표정은 굳어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 벽 두께 2m가 되는 구멍을 산소불로 직접 뚫는 사투가 시작됐다. 2시간 30분이 지났을까. "펑"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섬광이 치솟았다. 용암같은 황금빛 쇳물이 흘러나왔다. "나왔다. 만세!" 박태준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14일 박 회장 빈소인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이대공(70) 포스코교육재단이사장(당시 포항제철 홍보계장)은 28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 이사장은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나오던 그 때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눈물을 처음 봤다. 이 이사장은 "파이프가 부러지는 순간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쇳물이 나오고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회장의 얼굴에는 눈물이 반짝거렸다"면서 "멀리서도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사진사가 있었으나 모두 첫 쇳물에 감격하는 바람에 쏟아져나오는 쇳물을 향해서만 계속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이 이사장은 "사진사가 뒤늦게서야 작업대에 있는 사람 모습을 찍어, 첫 쇳물 당시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은 단 한 장뿐"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그후 20년간 홍보실장·비서실장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박 회장을 보필했다. 그는 "박태준의 눈물을 두 번 더 봤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1980년 박 회장의 큰딸 진아씨가 결혼하기 전에 보낸 긴 편지를 받았을 때이며, 세 번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고 기억했다. 이 이사장은 "제철보국에만 매달렸던 박 회장은 '아버지와 기억할만한 추억이 없다'는 딸의 편지에 많이 놀랐고 마음 아파했다"고 말했다. 당시 박 회장 옆에서 함께 만세를 불렀던 박종태(82) 포항제철소 초대 소장도 '박태준의 눈물'을 봤다. "난산(難産) 끝에 쇳물이 나오자, 박 회장님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어요." 13일 빈소를 찾은 그는 "박 회장은 맨땅에서 5년 만에 기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바람이 불면 아지랑이 피듯 잔모래가 올라왔고 태풍이 불면 굵은 모래까지 올라왔어요. 늘 현장을 지킨 박 회장이 당시 마신 모래가 몇 박스는 될 것입니다." 박씨는 "다들 모래로 세수하고 땀으로 샤워를 했다"고 말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박태준 회장과 박종태 포항제철 초대 소장(점선 안) 등 직원들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뽑는 데 성공하자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당시 고로 운전계장이었던 이광일(71)씨도 "첫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 아직도 또렷하다"고 말했다. 포항제철 사람들은 첫 쇳물을 첫 아이라고 불렀다. 그는 용광로에 처음으로 불을 지필 때 점화 버튼을 누른 직원이다. 이씨는 "박 회장은 지휘봉으로 직원들을 꾹꾹 찌르면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때도 많았고, 외국인 직원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남다른 열정과 의지로 역사를 바꿨다"고 말했다.

이대공 이사장은 박 회장의 유명한 안광(眼光)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눈이 부리부리했던 박 회장은 화를 낼 때면 눈빛이 워낙 강렬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안광을 제대로 맞으면 정력이 약해진다"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당시 포항제철 홍보과장이었던 이 이사장은 1975년 사보(社報) '쇳물'에 10대 어글리 뉴스 중 하나로 '직원 부인들도 목욕을 깨끗이 하라'고 했던 박 회장의 목욕론 시달을 꼽았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가정생활까지 간섭한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보고도 덧붙였다.

 

 "사보를 본 박 회장이 저를 불러 안광을 쏘았어요. 이제 잘렸구나 했는데, 홍보과장이 내 경영 철학을 모르면 되느냐며 앞으로 모든 간부회의에 참석하라고 하더군요." 박 회장의 목욕론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듯이 품질도 완벽하게 하라는 뜻이었다.

 

-박태준 회장님, 먼 길 편히 가시옵소서 (작가 조정래)

민족경제 공사장서 폐 망쳐 … 그는 산재 노동자였다

“사람의 몸에서 왜 이런 규사(硅沙)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10년 전,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님의 폐 아래 물혹 수술을 한 미국 의사들의 의문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또 규사가 나왔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한 달 전, 옛날 그 부위를 다시 수술한 우리나라 의사들이 한 말입니다. 흔하게 쓰이지 않는 말 ‘규사’는 잘디잔 모래알이라는 뜻입니다. 왜 박태준 명예회장님의 폐에서는 그리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잔 모래알들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 수수께끼 풀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 있는 포항 영일만은 거센 바닷바람 휘몰아치는 모래 벌판이었습니다.

 

 또한 광양제철이 세워진 광양만도 세찬 바닷바람 타는 허허벌판 모래밭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모래 먼지 자욱하게 일어나는 속에서 박태준 명예회장님은 25년 동안 공사를 직접 지휘하며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세우신 것입니다. 사장이면서도 뒤로 물러나 있지 않고 공사 현장에 직접 나선 25년 세월 동안 자잘한 모래알들은 거침없이 그분의 폐로 침투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오늘의 포스코가 없었다면 이 나라의 가전산업·자동차산업·조선산업이 이렇게 융성할 도리가 없었고,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조국의 오늘의 경제 번영을 이룩해내기 위해서 앞이 안 보이도록 진한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피하지 않았고, 모래알들이 몸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분은 결국 그 모래가 일으킨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탄광의 막장에서 오래 일한 광부들은 모두 진폐증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분은 민족경제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쉼 없이 곡괭이질을 하시다가 폐를 망쳐 돌아가신 산재(産災) 노동자였습니다. 그것도 퇴직금도, 산재보상도 전혀 받지 못한 외로운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의 포스코가 그분의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또는 그분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인 줄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20여 년 전 광양제철을 준공시킨 다음 몇 개월 후에 어이없는 정치보복을 당해 포스코를 떠나 망명길에 오를 때 그분은 퇴직금을 전혀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예회장으로 복귀하신 다음에도 주식을 한 주도 갖지 않았고, 당연히 받는 것처럼 되어 있는 스톡옵션이라는 것도 전혀 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상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정직과 청렴은 포스코를 세워 조국의 경제를 일으킨 업적에 못지않은 참된 인간의 길을 보여준 우리의 영원한 사표입니다. 더구나 집 판 돈 14억원 중에서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시고 집 없는 신세로 돌아가신 사실 앞에서는 전율마저 느낍니다. “우리의 레닌 동지가 이루고자 했던 이상향이 여기 있다!” 1990년 포스코 공장을 견학한 모스크바대학 총장이 한 말입니다. 포항과 광양 공장을 빼닮은 중국 장가항의 포스코 전원 공장은 중국 모든 철강 회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입니다. 그분은 전 사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자식들에게 대학까지 장학금을 지원한 최초이자 마지막 기업인이었습니다. 그 어느 대통령이 이분보다 큰 업적을 세웠습니까. 그분은 대통령보다 더 대통령다운 조국의 일꾼, 민족의 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100년 지나도 얻지 못할 크나큰 별을 잃었습니다. 고인이 떠나신 빈자리가 겨울 하늘처럼 넓고 적막합니다. 고생스러우셨지만 값지게 사신 이여, 우리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바치옵나니, 먼 길 편안히 가시옵소서. <작가·동국대 석좌교수>

◆조정래와 박태준=대하소설 『아리랑』 과 『태백산맥』 의 작가인 조정래(사진)씨는 1990년대 초 『한강』 집필 때 취재차 박태준 전 총리와 인연을 맺었으며 2007년 어린이용 박태준 전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