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남 김해 신어산 ‘영구암(靈龜岩)’ 선공 주지스님

이학성 기자 2011. 8. 31. 13:56

 

 

                     수천년 ’생명력‘과 ’발복‘ㆍ중생구제의 명승 ’吉地’

 

                           신어가 살던 샘물 발원지... 참선ㆍ공부위한 남방제일선원 꼽히기도

                           水性 강한 대마도ㆍ낙동강ㆍ다대포서 신어산 바라보면 거북이 형상

 

 

 

 경상남도 김해시에는 고대철기문화를 꽃피운 금관가야의 중심도시였던 신어산(神魚山 해발 634m)이 있다. 무엇보다 신어산이란 이름이 특이하다. 신령한 고기가 사는 산이라는 뜻도 그렇다. 김해시 북동쪽의 인제대학을 건너편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금강산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휘감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웅장함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울창한 적송들과 다양한 나무들이 조화를 이룬 입구에는 햇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경을 나타낸다. 기암괴석과 가파른 바위지대를 넘으면 정상부근에 거북이의 지형지세를 가진 신어산 영구암(靈龜岩 (055)337-0300)이 자리하고 있다. 2천 년 전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버니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창건한 영구암은 멀리 대마도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영구암을 고향처(故鄕處)로 삼아 온 선공 주지스님은 “법당 아래에는 우물 속 신어(神魚)가 살았다는 전설이 숨 쉬는 곳으로서 신령한 물로 마음을 정화하고 세속을 씻어낼 자연을 닮은 사찰입니다.”고 말한다.

 

 

 

물 머금은 거북이 ‘지령(地靈)’ 형상... 생명력 충만

 김해시 삼방동 신어산 자락에 위치한  영구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末寺)이다. 신어산은 급경사가 있는 기암괴석들이 즐비해 우리나라 산의 전형적인 곡선미의 진수를 보여준다. 옛 가야국 5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신어산 정상아래 530m 중턱부근에 위치한 영구암의 창건 배경에는 가야국 전래의 불법(佛法)과 많은 사찰들이 있었던 불교 중흥의 중심 지역이었다.

그 중 신어산이 발원지이자 신령스러운 물고기가 살았다는 샘물이 있던 곳이 바로 영구암이다. 옛 가야시대에 허황옥(許黃玉, 1949년 전 가락국 김수로왕과 결혼, 16세에 왕비가 됨) 공주가 인연국토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파사’ 석탑을 배에 싣고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에 동행한 오빠 보옥선사(장유스님)가 가락 7암을 지어 불법을 전파하였다.

영구암 선공 주지 스님은 “신어산 영구암은 7암중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그 불법이 전해져 온 이래 신라시대의 많은 고승과 조선조의 많은 선사들이 영구암에서 수행정진을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사성과 불교문화 유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영구암에는 현재까지도 가야시대의 석탑 기단부와 고려시대에 조성한 석탑일부가 남아 있으며, 신라 흥덕왕조에 축조한 석벽이 아직도 건재해 살아있는 가야불교의 산역사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영구암에서는 멀리 대마도와 낙동강 하구,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이곳 신어산을 바라보면 마치 산에서 거북이가 기어 나오는 듯 한 형상을 띠고 있다. 왕성한 생명의 기운과 ‘영력(靈力)’ 강한 거북이의 ‘구세(龜勢)’ 형상을 놓고 수많은 후각들의 참선수행과 공부를 위해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한 때는 ‘남방제일선원’으로 손꼽히기도 했던 영지(靈地)다.

 

 

일출은 ‘석굴암’ㆍ노을은 ‘영구암’... 부귀 명당처

 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사세(寺勢)가 다소 기울었으나, 법등(法燈) 만큼은 연연히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많은 탱화가 남겨 졌는데, 현재 영구암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七星幀)은 100년 전인 1911년에 조성되어 1950년 무렵에 중창이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묵방선사와 영운선사, 대휘선사, 송산스님, 법정스님, 화엄스님 등 유명한 선사들이 가야불교의 부흥을 발원하며 주석을 하던 곳으로서, 거북이 머리 부분인 구두(龜頭) 탑사 앞 아래에 있는 비석비문에 새겨진 ‘우령 금강산(右領金剛山)’을 보면, 영남(嶺南) 우측에 있는 금강산으로 불리웠다. 또 영남(嶺南) 좌측은 무척산 즉, ‘좌령 금강산(左領金剛山)’이라 칭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신어산의 빼어난 산수경관과 비경에 대한 명문글귀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행처이자 인연처로서 불자에 ‘즉심즉불’ 강조

 50여 년 전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석재를 활용해 중건한 영구암의 선공 주지 스님은 일찍이 18세 때에 삭발하고 수계(受戒 Buddhist initiation ritual)를 받았다. 19세에는 영구암에서 4년간 봉임(奉任)한 바 있다.

그 이후로 다시 영구암이 인연자리가 되어 돌아온 선공 주지스님은 “ 대경스님이 법당을 지으신 이곳은 곧 저의 고향처(故鄕處)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와는 첫 정을 나눈 곳이기도 하지만, 왠지 나를 못 떠나게 하는 곳이지요. 가고 싶다고 가고, 오고 싶다고 오는 곳이 아닌 영구암은 아무나 올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또한 지세가 강한 신어산 기운은 본래부터 강인한 저의 성격과도 맞아요. 한마디로 저는 이곳을 ‘고행처(苦行處)’라 부르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인연처(因緣處)이기도 합니다.”고 강조한다.

주지스님은 불자들에게 무엇보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이 곧 부처“라는 본질을 두고 ”우리의 생각은 마음, 즉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의 윤회를 그립니다. 끝이 없는 생각의 윤회를 끊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기 위한 행위가 ‘즉심즉불’입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만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라 설파한다.

그는 또 “자아에 대한 근본 실상을 찾아야 합니다. 만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변화 속에서 중심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 곧, 일분일초가 곧 인생이지요. 따라서 영구암 불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비우는 한켠에는 영구암이 편안한 정신적 쉼터요, 자연의 휴식을 마음에 담아가는 사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라고 말한다.

 

 

가깝고도 먼 속가와 동고동락 ‘마음수련’ 활용

 영구암의 앞마당 부분은 거북의 머리형상이다. 뒤편은 거북이 등판에 해당되는데, 특히 7개 암자 중에 ‘심장’의 뜨겁고 강한 기운을 발산하는 지세를 모아, 중생구제와 발복(發福)의 근원지로서의 역량을 다하고 있는 사찰이다.

주지 스님은 “거북은 물과 함께하는 수생동물(水生動物)로 수(水) 기운이 매우 강합니다. 영구암 앞 에는 낙동강 하구 등 물이 많아요. 이를 바라보는 거북의 머리부분이 영구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령금강산은 부(富)를 상징하는 재력을, 좌령금강산은 귀(貴)인 권세, 명예를 뜻합니다. 영구암은 한눈에 김해도심을 내려다 볼 정도로 가까운 지척에 있지만, 반면에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요.”라 말하는 주지스님은 가끔씩 시내에 나가 물건구입을 하기도 하고, 길거리의 차량사고를 목격하기도 한다. 도시의 각종 소음 등 속가의 일상에 잠시 몸을 맡기다 보면, 세상적 욕심과 어느새 더러워진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다시 영구암을 향해 발길을 숲길로 돌려서 바위산을 오를 때면 흐르는 비지땀과 함께 마음을 비우는 시간으로 삼는다. 이전부터 신어산 초입부터 영구암까지 걸어 다녔다고 말하는 선공 주지스님은 “이제 나이가 있어선지 관절이 와 있지만 오히려 더 마음을 닦는 과정으로 여깁니다. 속가(俗家)인 바깥 외부세계는 아무래도 유혹들이 많죠. 그러나 이런 속가가 도리어 저에게는 ‘마음의 테스트’ 장소로서 결코 멀리할 수 없는 수련의 장으로 봅니다. 신라시대 때에는 수많은 고승들이 속가에서 동고동락의 삶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보는 바대로 보이지요. 또 나에게 속지마라고 말합니다. 미운사람을 미워하며 가까이에 가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맙니다.”라고 전하며 ‘도시와 사찰‘은 너무 멀어서도 또 너무 가까우면 해가 된다고 강조한다.

 

 

문화재급 ‘영구암’ 연중 24시간 만인에 개방

 영구암에는 옛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형문화재급의 문화유산이 많다.

선공 주지 스님은 “영구암에 모셔진 1세기가 넘는 칠성탱(七星幀)은 지난 2007년 10월 7일 문화재자료 제504호로 지정 되었으며, 600년 이상 된 김해 영구암 삼층석탑 또한 대표적인 문화재입니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하는 이 석탑은 석탑부재로는 기단부 아랫돌과 덮개돌인 기단 갑석, 그리고 1・2・3층 옥개석 및 1매로 조각된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습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부 사학자들은 영구암 삼층석탑이 크기가 작은데다 지대석과 기단부의 면석 및 탑신석 등이 결실되었지만, 남은 석탑부재들이 도드락다듬으로 치석해 운모와 장석이 자연스런 마모율로 보아 당시의 것이며 세부적인 조각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전형석탑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으로 판명한 바 있습니다.”고 선공 주지 스님은 전한다.

수천 년의 깊은 불교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영구암은 늘 만인을 향해 열려 있는 사찰이다. 신도들과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1년 24시간 동안 이어진다. 선공 주지 스님은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개방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하절기 휴가철에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모든 중생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영구암으로 거듭나도록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고 마무리하는 그의 말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가야(伽倻)의 웅혼(雄魂)’을 느낀다.

 

                                                                                                                                                                                             취재/ 이학성 기자

 

 

 

 

                                                                                                 대웅전 실내 모습

 

                                                                                                            삼성각

 

                                                                                       영구암에서 바라본 김해시내

 

                                                                                       대웅전에선 선공 주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