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한언론인회 정운종 상임이사 대담, 한국기자협회 초대 부회장 송두빈(宋斗彬 ) 회우

이학성 기자 2011. 8. 16. 10:39

 

 

찬란한 불꽃 실버 파이팅--宋斗彬 회우 //<대담 정 운 종 본회 상임이사>

 

      2011년 7월 22일 오후 2시 프레스센터 1층 커피숍에서 만난 宋斗彬 회우, 우선 전립선 암 수술 경과가 궁금했다.

 

 

                                              “아주 건강해 보이시네요.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눈물겹도록 고마운 가족 사랑의 진수

 “예, 한 달 전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 말로 결과가 좋다니 다행이고 실제로 활동하는데 불편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어 기쁩니다. 한마디로 건강은 각자가 지켜야지 이 세상에 책임질 사람 아무도 없어요. 건강을 잃으면 돈이나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도 전립선암을 선고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건강은 건강할 때 챙기고,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기 전에 자주 체크도 해보고 이상이 있을 땐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많은 회우들이 문병해 주시고 위문전화를 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앓아누워 보니 가족처럼 고마운 존재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간병도 눈물겨웠고 자식들이 정성껏 보살펴주어 다시 한 번 가족 사랑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교 2학년 때 6․25 참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慶南 咸陽에서 태어난 나는 서울 경동중학교 5학년(현재 고교 2학년)에 다니던 중 6․25 전쟁이 발발, 그해 9․28 수복 때까지 3개월 동안 적 치하에서 고생하다가 1950년 12월 3일 17살 나이에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에 입대, 10여 일간의 짧은 신병교육을 마치고 곧바로 최전방 육군7사단 3연대 3대대 10중대에 배속 됐어요”.(잠시 회상에 젖으며)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산 것이 기적 같아요. 논두렁에 엎드려 M1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힘껏 방아쇠를 당겼는데 웬일인지 총알이 나가지 않아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른 실탄을 집어넣고 다시 방아쇠를 당겨도 역시 불발이었어요. 알고 보니 소총의 공이치기가 부러져 있었어요. 전날 밤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병기계가 갖다 준 그 M1소총을 멜빵도 없는 채로 받아 통신 와이어 줄로 엮어서 들고 나왔는데 신병인 탓으로 공이치기가 부러졌는지 확인조차 못해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지요.

 

한창 싸우다 보니 아군과 적군이 흰 방한복을 입은 채 참호 속에서 뒤범벅이 됐는데. 날이 밝을 무렵 상대를 식별할 수 없어 모자를 벗겨 까까중머리면 적군이고 스포츠머리면 아군임을 알았어요. 백병전을 벌인 것입니다. 결코 잊혀 지지 않는 전쟁 장면과 참상, 극한 상황은 아직도 내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습니다.

 

 

 이렇게 고된 악전고투와 14일간의 주야간 행군 끝에 春川에서 洪川, 橫城, 原州, 堤川, 丹陽, 慶北 奉化를 거쳐 강원도 寧越군 中東면 碌田리에 도착한 우리 부대는 이미 그 곳까지 내려온 적군을 만나 다시 전투에 들어갔고 험준한 산봉우리를 타고 적진을 공격하려고 대기하던 중 아군 포병부대의 지원사격이 관측 잘못으로 아군 진지에 떨어져 수많은 장병이 몰살당하는 가운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1954년 3월 전역했는데 60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 중에 받은 0159085 군번을 이렇게 살아서 가슴속에 새기고 있으니 하나님이 도왔는지 조상님이 돌봤는지 정말 꿈만 같네요.”

 

“다시는 이 땅에 이처럼 참혹한 전쟁의 생채기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 모두 깊은 성찰과 노력을 해야 할 때” 라며 숙연해 하는 백발이 성성한 6․25 참전 노병 宋斗彬 회우, 지금도 그때 그 처절했던 전투장면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어 보인다.

 

 

 

-언론계에는 언제 발을 들여 놓으셨나요?

 

 

동화통신 공채 2기로 언론계 진출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6․25 전쟁 때 군에 입대,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제대하여 좀 늦게 대학에 들어갔어요. 고려대 사학과 4학년 때 취직이 어려워 내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 해 볼 겸 당시 동화통신사 공채시험(견습 2기)에 응모했다가 합격통지를 받고 1957년 8월 1일 이 회사에 입사 한 것이 평생을 언론계에 몸담게 된 거지요. 동화통신사에서 처음 배치 받은 부서는 조사부였어요. 입사동기생은 네 명이었는데 나와 李基昌(고려대) 李相玉(서울대) 辛相甲(서울대), 나는 여기서 사회부기자를 거쳐 경제부차장, 주일 특파원, 사회부장, 경제부장, 편집부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1973년 4월 폐간 될 때 까지 17년간을 재직했습니다. 그 뒤에도 서울신문과 내외경제신문 코리아헤럴드에서 정년퇴직, 도합 34년을 언론계에서 뛴 셈이지요.”

 

 

- 현직에 계실 때 특종도 많이 하셨고 생각나는 일화도 많으실 텐데요...

 동화통신사에 막 입사해 열심히 일할 때의 일인데, 회사에서 3개월만 되면 견습기자 딱지를 떼어주겠다더니 5개월이 지나도록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없자 송년회 도중 받은 월급봉투를 동료들과 공중에 확 뿌리면서 퇴장 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고 4․19 학생 데모 때 학생들이 경찰이 쏜 실탄에 맞아 피를 쏟고 쓰러지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유혈의 현장을 취재해 데스크에 상황을 연락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일선기자 시절이 지금도 눈에 선하군요. 어디 그 뿐인가요. 뒷날 국방부에 출입할 때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면 빠지지 않고 취재를 다니는 동안 체제 우위성을 놓고 입씨름하던 북한 기자를 10여년 뒤 평양서 열렸던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본회담 때 다시 만났던 기연(奇緣)도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갑니다. 남북조절위 평양취재에는 한국 朴鉉兌, 중앙 趙東午, 경향 崔瑞泳, 동아방송 徐炳鉉, 동화통신에서 나 宋斗彬이 대한민국공동취재단으로 참여 했지요. 이때 남북조절위 남측 대표 李厚洛씨가 북한 박성철에게 ‘6․25는 왜 도발 했는가’라고 따지자 갑자기 허를 찔린 박성철이 ‘그때는 그때고…'라고 엉겁결에 대답하자 당황한 북측 다른 대표가 박성철의 입을 가로막고 나섰는데 우리 취재진은 즉시 ’북이 6․25 남침시인’ 이라고 서울에 송고해 도하 각지가 대서특필했던 사실도 잊지 못할 취재 비화지요.

 

 

 돌이켜 보니 한일 국교정상화를 전후한 3년간 조선 金潤煥(작고), 한국 李元洪, 경향 鄭在虎, 서울 徐基源(작고), 동양 韓鍾愚, 동아 柳赫仁(작고)씨와 함께 한 주일특파원 시절(1965-1967)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최고회의, 경제기획원, 상공, 농수산, 건설, 국방, 내무, 보사, 교통부 등 출입처를 모두 섭렵했지만 朴正熙 대통령 서독 방문 수행 취재 등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의 현장을 누볐던 그 때 그 왕성한 취재 활동은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해 지는 취재현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1964년 12월 朴대통령 서독 방문 수행취재단 중에는 동아 柳赫仁, 조선 李慈憲, 한국 鄭光謨, 서울 鮮宇鍊(작고), 동양 文胎甲, 합동 高在琫, 동화 宋斗彬, 대한 田炳晟(작고) 경향 李祥雨씨가 동행했습니다. 마침 오는 12월 근대화·산업화를 위해 몸부림치던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함보른 현장에 朴正熙 전 대통령 연설기념비가가 세워진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言論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목탁(木鐸)”

 “宋斗彬 회우 그는 항상 발로 쓰는 記者였다. 출입처를 드나들 때마다 회오리바람을 몰고 다녔다. 자주 특종을 해 다른 기자들이 질시(?)할 정도였고 기사를 취재해 기자실에 풀을 하는 명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 그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동료들의 정평이다.

 

동료 기자들이 말하는 宋斗彬 회우는 항상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보스 형 기자로 통한다. 슬픈 일이거나 기쁜 일이이거나 항상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그런 그의 천성은 소속된 회사 직원들의 애경사에 빠짐없이 열성적으로 참가하기로 소문나 있다. 이 같은 人間美와 親和力은 그가 항상 강조해 말했던 ‘協同과 和睦’의 생활철학으로 자주 표출되곤 했다. 내외경제신문사 편집국장 시절 그의 편집국 운영방식도 철저히 ‘和睦과 人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직은 협동과 화목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고 신문기자는 다소 여건 변화가 있기는 하나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木鐸이 되겠다는 각오로 뛰어야 합니다.” 宋斗彬 회우가 말하는 言論觀이다. 그래서 그는 평소 후배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는 기자가 되라고 당부하곤 했다. 기자는 모든 것을 광범위 하게 알아야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게 그의 持論이다 그 역시 ‘자신이 공부하는 기자임을 스스로 실천해 왔고 신문기자가 안됐다면 敎授직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學究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宋斗彬 회우를 아는 동료들은 그를 가리켜 언론계에서 보기 드문 ‘집념의 사나이’ 라고 평한다. ‘활달하면서도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그러나 강인한 집념과 치밀함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鐵의 사나이. 자상하면서도 온화한 外柔內剛형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한번 시작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매듭을 짓고야마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 ‘기사를 빠뜨리거나 품위를 저버린 기자에겐 불호령을 내리는 어쩌면 무서울 정도로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가 바로 宋斗彬 회우였다고 한다.

 

 

 1973년 일간 내외경제창간에 참여한 그는 취재부장과 편집국장에 올랐지만 항상 일선기자 못지않은 흥분과 정열로 일했다. 편집국장 취임 후 매일 밤 10시가 넘도록 야근기자들과 설렁탕을 들며 새 기사를 갈아 끼우는 등 강인한 저력을 과시한 일을 기억하는 동료들은 많다.

 

이런 宋 회우의 집념과 투철한 自由言論觀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1958년 고려대 史學科를 나온 그는 1976년 성곡재단의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學) 신문연구소에 1년간 유학 하고 곧이어 중앙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받는 등 학구열이 남달랐다. 내로라 하는 교수들에게나 돌아가던 고려대 사학회 회장직도 4년씩이나 역동적으로 맡아 보았다. .

 

宋斗彬 회우는 봉사 정신도 남달랐다. 1981년부터 19년 동안 高大校友會報의 편집위원으로 봉사해 온 공로로 지난해 9월 1일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열린 ‘고대교우회보 창간 40주년 기념식’ 에서 功勞牌를 받은 것이 그 단적인 예다.

 

 

韓國記者協會 창립 산파역, 자유언론수호 앞장

 宋斗彬 회우는 지난날 韓國記者協會를 창립할 때 초대 부회장을 맡은 사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내가 초대 부회장을 맡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1964년 8월 17일 오후로 기억됩니다마는 신문회관 3층 강당에서 韓國記者協會가 발족됐어요. 서울시내에 있는 19개 신문·통신·방송사 기자 200여 명과 洪鍾仁(작고) 등 언론계 선배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영수 임시 위원장의 사회로 창립총회를 가졌고 준비위원회의 치밀한 계획대로 대회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 회장에 李剛鉉(작고․동아일보 지방부차장), 부회장에 宋斗彬(동화통신 경제부차장) 劉承範(작고․ 합동통신 정치부차장) 趙東午(한국일보 사회부차장) 崔槿永(작고, 대한일보 편집부차장)을, 감사에 徐基源(작고․서울경제 취재부차장) 朴瑾淑(MBC 정치부차장) 등을 만장일치로 뽑았지요.

 

 

 당시 記協의 창립은 言論倫理委員會法 철폐투쟁과 맞물려 있어 여러모로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재정형편도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다른 언론단체나 정부 또는 어떤 회원사로부터의 지원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필요한 경비를 각 기자단의 찬조금과 준비위원들의 주머니를 털어 썼어요. 이로 인한 회장단의 고충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재정 형편에서도 창립 준비위원회가 기초하고 추가한 言論人資質向上, 言論自由守護, 權益擁護, 國際交流强化 등 4개 항의 실천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은 나름대로 보람을 느낍니다. ”

 

 

외경제 강제 종간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분통터져

 이렇게 언론자유를 위해 투사적인 기개를 앞세웠던 宋斗彬 회우에게 자신이 창간에 참여한 신문사가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조치로 문을 닫아야 하는 운명이 됐으니-- 宋 회우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1980년 11월 12일 보안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간 당시 金泰東 사장(작고)은 ‘11월 25일까지 내외경제를 종간시키고 이에 대해 어떤 법적 대응도 하지 않겠다’는 포기각서를 강요받았고, 미처 도장조차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각서에 지장을 찍어야 했다. 당시 사원 대부분은 종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갑작스레 알려진 소식에 분노를 쏟아내며 사실상 업무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11월 18일자 신문에 ‘내외경제가 종간하고 코리아헤럴드와 통합 된다’는 社告를 내며 終刊을 공식적으로 알렸고, 24일 나는 마지막 호 신문 강판을 알리는 벨을 울리며 내외경제의 막을 내렸다. 당시 ‘종간모임’을 하면서 편집국장인 내가 먼저 술잔을 내던지며 비통해했고 모든 기자가 술로 그날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편집국은 빈 술병 100여개가 나뒹굴었고 편집국 책상의 모든 유리가 깨져있었다” 내외경제 강제 종간 과정을 이처럼 현장에서 생생히 겪었던 宋斗彬 회우는 “당시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입은 재산상, 정신적 피해는 실로 막대하다”며 “정부는 피해 구제조치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는 소신에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宋斗彬 회우는 특히 한라대학교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내외경제 신문을 떠나 한동안 한라그룹 전무이사를 거쳐 한라환경산업(주) 대표이사. 한라그룹 부사장 상임고문을 역임하면서 그룹 홍보와 원주에 세운 한라대학교의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헤럴드미디어 사우회장으로 동분서주

 宋 회우가 지난 2001년 헤럴드미디어 사우회 정기총회에서 사우회 회장으로 추대된 이래 10여년을 한결같이 사우회를 이끌고 있는 비결도 그의 탁월한 친화력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2010년 12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 ‘헤럴드미디어 사우회 송년의 밤’. ”희망 속에 맞이했던 경인년도 어느덧 송구영신의 대자연 법칙에 따라 많은 아쉬움과 회한만 남긴 채 영겁의 세월 뒤안길로 덧없이 사라져갑니다. 올해는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 60주년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처럼 10여 년간의 좌파정권도 성난 민심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고 만 자못 뜻 깊은 해이기도 합니다.” 宋斗彬 사우회 회장의 감회 어린 인사말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宋회우는 부인 張信子 여사(숙명여대 교수로 정년퇴임)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신앙심이 독실한 외아들 京原씨는 현재 뉴욕 주 빙햄튼 시 한인 침례교회 담임 목사로, 딸 潤柾씨는 사위 金俊豪씨와 결혼해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 거주하고 있다. 술 담배와는 거리가 멀고 자주 가볍게 등산을 하며 健康을 챙기고 있는 宋斗彬 회우, 우리시대 영원한 言論人 宋斗彬 선배의 健勝과 家庭에 늘 祝福과 榮光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편집/ 이학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