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성상사’ 임석준 회장의 휴먼 히스토리

이학성 기자 2009. 1. 22. 15:50

‘임성상사’ 임석준 회장의 휴먼 히스토리
“번 돈은 잘 쓸 줄 알아야”
기업 이윤 사회 환원 모범
소금밭 막노동에서 주류도매업 성공까지


‘물질의 풍요 속에 욕심에 사로잡혀 탐욕과 오만, 거짓으로 만연된 오늘날 우리 사회.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내 것만 챙기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선을 베풀며 덕을 쌓는 훈훈한 가슴을 가진 사람도 있다. 전남 무안군 삼향면 출신으로 주류도매업체인 임성상사를 운영하면서 노인들과 장애우를 9년째 돕고 있는 임석준(66)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부족함을 모르고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선량한 손길을 뻗치고 있는 그이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목포병설중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총명하고 잘 생긴 남학생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난폭한 학생들 틈에 끼게 되면서 많은 시간을 혼돈 속에 보내게 된다. 목포 문태고를 졸업하고 경기대 법학과 2년을 중퇴한 그는 군대를 다녀온 후, 사회생활을 소금가마를 나르는 잡역부부터 시작했다. 그는 소금가마를 어깨에 메고 비오듯 땀을 흘리며 일했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목포 평화성냥공장 자리에서 썩은 생선으로 사료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냄새가 지독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학도 중도에 그만두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임 회장에게 안정된 직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디아지오코리아 스코틀랜드 행사 방문 기념


육체적인 노동은 가장 확실한 밥벌이에는 틀림없었지만 힘에 부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숨쉬기조차 곤란했던 그곳을 그만둔 후 일거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전거를 한 대 마련해서 고물수집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니면서 링거액 병을 수거해 알루미늄을 빼서 팔았는데, 병을 모으려면 병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사기, 피로 범벅된 솜뭉치가 함께 뒤엉켜있어 어지간한 비위를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처남의 소개로 전북 이리에 위치한 해동약국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국에서 그가 하는 일은 청소를 하거나 문을 여닫는 ‘셔터 맨’에 불과했다. 그는 약 1년에 걸쳐서 약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런 의지를 가상히 여긴 사장은 그에게 약 배달하는 일을 맡겨주었다. 임 회장은 근면 성실하게 거래처를 관리했고, 신뢰감이 쌓여 영업부장으로 승진했다. 탄탄대로로 들어선 것 같은 생각에 그는 더욱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승승장구해 회사의 출고전표를 담당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임 회장이 인생을 평탄하게 걷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믿었던 약국이 부도가 나면서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된 것. 막막했지만, 그간 모은 돈으로 목포에 조금 사두었던 땅에 집 두 채를 지어 팔았다. 그렇게 시작한 집장사가 너무 잘 되었고, 나중에는 한 달에 한옥을 5채까지 짓게 되었다. 어느 해, 그는 서울에서 삶의 전환을 꿈꾸게 되는 일을 목격한다. 서울 명동에서 지인이 경영하는 생맥주집을 방문했는데, 하룻밤에 20만 원의 수익을 내는 것을 본 것이다. 자신은 한 달 내내 집 한 채 지어서 20만 원을 버는데, 하룻밤에 20만 원의 수입이라니 충격이었다.

그 길로 그는 술장사로 진로를 수정한다. 그러나 동행한 처남은 간곡히 만류했다. 물러서지 않는 매형의 결단 앞에서 처남은 정 그렇게 하려면 직접 견습을 받으라고 권유했다. 목포에서 한옥 5채를 한 달에 짓던 사장이 남의 술집 종업원이 된 것이다. 일년을 보낸 그는 다시 큰 결단을 했다. 목포에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무교동에 업소를 낸 것이다. 낮엔 자장면을, 밤엔 술을 팔았다. 그런데 낮엔 손님이 너무 많은 반면 밤에는 손님이 없었다. 게다가 자장면 파는 집에서 술을 팔면 안 된다는 법을 몰라 영업정지를 두 번씩 맞게 되면서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순간에 가진 것을 탕진한 자신의 초라해진 모습에 고향에도 못 가고 몇 날 며칠을 방황했다. 어려울 때마다 자기 성찰로 결단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지막 남은 집 한 채로 다시 부동산을 시작, 그것을 기반으로 1979년 종로 YMCA 옆에 자리를 물색해 ‘사랑과 평화’라는 레스토랑을 차렸다. 다행히 ‘사랑과 평화’는 ‘무랑루즈’와 ‘초원의집’ 등의 술집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을 틈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잘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 성공으로 종로1가에 ‘종로카페’라는 레스토랑을 하나 더 개업했다. 그렇게 사업들이 번창하던 때 거래하던 술 도매상이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한 채 부도가 나자 부채 대신으로 인수받아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는 것이 지금의 임성상사이다. 그는 지금 무안군에 살고 있는 노인들을 9년째 돕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홍은동 노인들과 장애우들은 물론 자신의 모교인 문태고에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무안군 황토 양파 마늘 축제에서(오른쪽)


그의 삶의 지향점이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자선으로 향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모든 사업이 잘 되어가던 어느 날, 몸이 너무나 노곤했다. 둘째딸과 함께 병원에 가서 며칠만 쉬고 오려니 하고 출발했는데, 병원으로 가던 승용차 안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깨어나니 4일이 지났고, 온 몸은 침대에 꽁꽁 묶인 채였다. 하대정맥증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혈이 4cm나 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 나이 50. 수술 성공률 30%였다. 목 밑에서부터 배꼽까지 절개를 해야하는 대수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간의 삶과 아내와 아이들이 눈물 속에 지나갔다. 지나온 순간들이 하나 하나 뇌리를 관통하면서 그의 불굴의 기질에 투사돼 또 하나의 새로운 힘이 되었을까. 그는 죽기를 각오한 채 수술할 것을 결정했고, 눈을 뜨니 산소통에다 7개의 약병들이 매달린 채 몸은 기계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희망을 거스르는 두 가지 죄의 형태가 있다면, 오만과 절망’이라고 했다. 그 어느 때든지 절망할 줄 모르는 그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극복하고 6개월만에 회복됐다. 퇴원 후, 홍은동 산길을 오르내리며 재활하는 데 만 3년을 보냈다.

늘 강인함으로 다시 서는 사람인 그는 주인이 없는 동안 흐트러진 사업체들을 아직 퉁퉁 부은 얼굴로 정비하고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고향에까지 죽었다고 소문난 그가 살아 지금은 전국에서도 가장 노인이 많은 무안군 1만8천여 명 노인들에게 하나라도 따뜻한 것이 끼쳐지도록 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고 있다.

“수술실 문이 닫히던 순간 기뻤던 일, 슬펐던 일, 힘들었던 일,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자식들, 아직 할 일이 많은 내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데, 기왕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뭔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죽어야 하는데…그런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찼습니다. 만약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시 살게된다면, 지금까지 돈을 벌기에만 급급했으니 이제 그 돈을 좋은 데 쓰고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2003년 한국을 빛낸 사람 153인 중 1인으로 선정돼 청와대에서 기념촬영(뒷줄 오른쪽 맨끝에서 2번째가 임석준 회장)


그는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무안군 노인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 당시 무안군 이재현 군수의 적극적인 권유로 노인회 김성수 회장과 ‘임성상사’가 자매결연을 맺은 것이다. 이후 출생지 석교마을에 6천여 만 원으로 마을회관을 지어 전자제품 등 집기를 모두 넣었으며, 무안읍 노성원의 지붕을 개량해주고, 무안 노인복지회관과 향교 등에 긴요한 물품을 보내 경로효친의 전범(典範)을 보였다. 그는 강산이 변하는 1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수억 원을 들여 고향의 각종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필요한 물품을 보냈으며, 300여 개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 TV와 에어컨, 냉장고와 노래방 기기, 온·냉수기, 선풍기 등 3천여 개 의 다양한 제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파출소 방범대에는 업무용 차를 사주기도 했다. 또한 고향 주민들의 관광과 산업시찰을 주선하는 등 주민 봉사에도 괄목할 만한 공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겸허한 자세로 몸을 낮추는 그는 경로효친 활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해 평생 동안 지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70살이 넘으면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고향 무안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무안군에 멋지고 시설 좋은 실버타운을 하나 짓고 저도 그곳에 가서 남은 여생을 살고 싶습니다. 특히 경치가 좋은 곳을 물색해 실버타운을 건립해 아픈 노인들은 병원에 입원시키고 혼자 사는 노인은 훌륭한 시설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돈을 벌었으면 일정 부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평소의 생각대로 앞으로 무안 군민과 노인들을 위해 모든 정성과 재산을 바칠 것이라는 임 회장의 뜻이 담긴 말이다.

그는 최근에는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떠올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더 많이 지급하려 하고 있다. 그 역시 등록금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비록 장학금은 아니었지만 사방에서 도와주는 손길이 있었기에 그나마 졸업을 할 수 있었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몇 명의 학생을 선발,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서 올바른 사회의 역군으로 설 때까지 장학금을 지급할 생각이다.

대한노인회 무안군지회(회장 김수범)에서는 임 회장의 고귀한 정신을 군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후세에까지 기리고자 송덕비를 건립했다. 이에 대해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한 것뿐인데, 뜻하지 않게 분에 넘친 대우를 받고 보니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고 겸손해했다. 그는 재경무안군향우회에서 부회장을 8년째 맡고 있다. 그동안 향우회관건립준비위원장으로, 4천200만 원이라는 기금을 조성하였으나 아직 향우회관 건립은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불가능은 없듯이 이 일 역시 여러 회원들이 동참한다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향우회관이 건립된다면 향우회원들의 만남의 공간은 물론, 고향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1987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48회 수료식날 대표로 수료증을 받는 모습


임 회장은 젊은 날에 중단한 학업이 아쉬워 분주한 시간들 속에서도 고려대 경영대학원 AMP최고경영자과정과 국제대학원, 중앙대 산업대학원 경영자과정을 수료한 학구열로도 유명하다. 특히,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윤리 실천과 사회봉사가 높이 평가돼 ‘2003년 한국을 빛낸 153인’에 선정된 것은 그에게 주어진 값진 ‘훈장’ 중 하나다. 임 회장은 12월 중 자서전을 발간한다. 자신의 인생역정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용기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무안군 노인회 후원회장을 맡아 끊임없이 어른들을 극진히 모시고 고향을 지극히 사랑하는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는 늘 따뜻함과 활기가 있다.


                                                                                               사회부 / 이학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