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언론인(言論人)정운종,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 '내가걸어온길-자전 에세이'

이학성 기자 2010. 10. 18. 14:05

                                                                               시 사 문 제 연 구 소

                                                                                         http://cafe.daum.net/newsplaza

 

 

                                   言論人 정운종(鄭雲宗),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  


 호는 우송(又松)이며 1938년 11월 13일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출생. 제천고와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 법률학과를 졸업(1957~1062)하고 언론계로 진출, 30년간 신아일보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KBS 사회교육방송 전문위원, 국방일보 객원논설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회의 운영위원회 간사(차관급)등을 지냈으며 국가 사회발전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힘쓴 공로로 대통령표창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슬하에는 장남 의택 차남 우택, 장녀 순택 차녀 희택을 두고 있다 


현재 통일, 안보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와 각종 시사 정보에 관하여 연구하고 각종 사업을 전개 하고 있는 단체를 조직, 운용하고자 시사문제연구소를 개설하여 운영 하고 있으며  ‘논설위원 30년’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학성 기자

 

약력>  

- 신아일보 논설위원(65년~80년) 

- 경향신문 논설위원(80년~93년) 

- 민주평통 자문위원 동 삼임위원(83년~현재) 

- 민주평통 체육청소년, 이념제도, 교육홍보, 정책심의분과 간사 

- 민주평통 운영위원 겸 운영위원회 간사 

- 세명대 경영행정대학원 초빙강사 

- 국방일보 객원논설위원 

- KBS(한국방송)사회교육국 시사초점 고정연사 

-경향신문 사우회 이사 겸 편집주간


현재>

- 통일교육전문위원

- 대한언론인회 논설위원, 이사 겸 행사집행위원장

- 시사문제연구소소장

- 사단법인 한국청소년보호연맹 상근이사

 

저서>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논설위원 30년

-새로운 결단 새로운 출발(공저)

-이제나라를 생각할 때다(총괄집필 - 공저)


<주요 편찬실적>

-감사원 50년사 감수(1998)

-격동 광복 50년(1995)

-제5공화국 총서 (전 7권 기획 통일.안보 분야전담)

-제천고 50년사(재경 총동문회 사무국장으로 주관)

 

 

 

                                                               정운종 대한언론인회 상임이사 휴먼 스토리

                                                                                       내가걸어온길-자전 에세이


 내가 태어난곳은 忠淸北道 堤川市 錦城面 月林里 521번지 조그만 초가집이다.

음력으로 1938년 3월 13일 酉시, 양력으로는 1938년 4월 13일이었지만 호적상으로는 1938년 11월 13일이니 출생신고가 한참 뒤에야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뒤에 어머님께 들은 얘기지만 위로 아들 둘을 낳으셨으나 모두 핏덩이때 잃고 실의에 빠지신 나머지 제천읍내 하소리 소재 한 仙官님께 밤낮으로 치성을 올려 어렵게 얻으신 아들이라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까 해서 출생신고를 늦추신 모양이다(그때만 해도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때라 우리 집만이 아니라 거의 많은 분들이 자식의 출생신고를 제날자에 정확히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호적등본을 떼어보면(지금은 제적등본에 올라 있지만) 위로 두형이 나란히 사망신고가 돼 있어 부모님의 상심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버지 迎日 鄭씨 敎자 源자, 어머니 韓山 李씨 復자 順자님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고향땅 월림리에서 보내며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가정형편이 무척이나 어려워서 부모님은 끼니를 걸르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은 굶기지 않으려고 애쓰시던 모습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가난은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온 동네가 빈촌으로, 속칭 보리고개때는 굶기를 밥 먹듯 했으니 그 시절을 회고하면 정말 가난이 유죄라는 말이 실감난다. 문명의 이기인 전기도 겨우 60년대 새마을 운동 덕분에 들어 왔고 라디오 한대를 온 동네 사람들이 청취하던 시골 벽촌이 오늘날 TV는 물론이고 자가용을 갖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準都市化 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쨌든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에 찌든 전형적인 빈촌에서 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 하시며 고생하시는 부모님 얼굴을 대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자나 깨나 가난에 시달리며 어렵게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늘 총명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닌 초등학교 시절, 6년 개근상에 전교 수석 졸업으로 충청북도 道知事賞(당시 李明求 지사)을 받는 영광을 안은 것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같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보니 중학 진학도 못할까봐 안절부절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해 여름방학인가 교복을 입은 柳稷相 선배가 그토록 부러웠던 생각이 아직도 내 머리에 각인돼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내 걱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얼마 전 집옆 대추나무 아래에서 꿈을 가지라고 나를 격려했던 추억을 자기도 기억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렴푸시나마 그때의 내 모습을 그려 보며 동심에 잠긴 적이 있다.

자랑 같아서 쑥스럽지만 동네 한문서당에서 千字文과 童蒙先習을 글자 한자 틀리지 않게 줄줄 외우고 책을 다 배웠다고 글방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칼국수(반찬 없는 밥보다는 손님 접대엔 칼국수가 제격이었다)를 대접하던 기억이며 종손 元泰씨로부터 通鑑을 배우고 족항이신 元澤(初名 仁澤)씨의 중매로 오늘의 반려자를 맞게 해준 은혜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다.

중. 고등학교는 제천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리(약 13키로)를, 그것도 높은 고갯길(벗고 넘는다고 벗고개라 불렀다)을 넘나들며 통학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꿈만 같다. 시계조차 없어서 초저녁 별빛을 새벽 먼동이튼 것으로 잘못 아시고 아침밥을 지으시기를 거듭하셨던 어머님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어찌 있었겠는가.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철 우산도 없이 30리길을 달려야 했던 통학길, 발을 옮겨 딛지 못할 정도로 폭설이 내린 험준한 고갯길을 혼자 넘으며 영어 단어 한자라도 더 외우겠다고 깨알처럼 적힌 종이쪽지를 꺼내 읽다 바람에 날려버리기 일쑤였던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름철 호롱불에 온통 하루살이가 날라 붙고 겨울이면  위풍이 심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하다 잠이 들거나 어렵게 구한 촛불을 켜놓고 자다 책을 불태울 번해 크게 야단을 맞은 기억도 되살아난다.

도시락만은 쌀을 섞어 싸주시고, 소풍 때면 으레 고구마와 밤, 달걀을 삶아 싸주시던 어린 시절, 공부만 한다면 심부름도 안 시키셨고 전답을 팔아 대학 입학금을 내주시며 자식의 성공을 기원하신 부모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대학공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가 대학엘 가리라고는 당시의 가정 형편으로는 언감생심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는 죽을 먹더라도 가르치는 것이 첫째라고 전답을 몽땅 팔아서라도 대학엘 보내겠다는 아버님의 교육열은 다른 동네 청년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했다. 4남매 중나만 제대로 공부를 해 미안한 생각이 들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공부 운이 없어서일까 일찍이 학업을 중단하고만 동생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男尊女卑사상이 지나쳐 여동생 雲姬가 제대로 학력을 쌓지 못한 것도 오빠인 나로서 有口無言임을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보리쌀 서말을 가지고 처갓집 건넌방에 살림을 차리시고 알뜰하게 저축해 논한마지기를 사신 일을 두고두고 대견해 하시던 아버님의 근면하심과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시며 4남매를 키우시고 시집 장가를 보내는 날 비록 가난은 할망정 손님접대가 극진하셨던 것은 부모님의 성품이 남다르심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나의 결혼 때는 빚을 내서라도 큰상을 차려야 한다 시며 시장에 가셔서 상차릴 음식을 직접 사시다가 과일이며 떡을 한자가 넘게 고이도록 지시하고 밤새도록 지켜보셨다. "사람의 집에는 손님이 많이 들어야 한다" 며 사랑방에 손님을 자주 초대해 밤새도록 談論 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아버님의 성품은 유달리 불같아서 남의 잘못을 절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는, 요즘 시젯말로 대쪽 같다는 평판을 들으실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나의 잘못도 용서 하지 않으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번은 동네 친구들과 자치기를 하고 놀다 싸운 일이 있는데 공부 안하고 싸움질이나 한다고 어찌나 호되게 걱정을 하시는지 겁이나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배회한 적이 생각난다. 자상하실 때는 또 얼마나 자상하신 성품인지 약주가 거나하신 날이면 자식들을 훈계하고 칭찬하시는 일도 많으셨다.

종이 한 장 노끈하나 버리지 않으시고 차곡차곡 모아 두셨다가 뒤에 요긴하게 쓰시고 헌 천이나 가죽조각으로 담배쌈지나 라이타 주머니를 손수 지어 간직하시던 절약정신과 재활용의 알뜰하심도 모두가 본받을 산 교훈임에 틀림이 없다.

부모님의 좌우명으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敬祖 사상이 투철 하셨던 점이다.

어른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시고 막내이신 아버님이 큰댁 봉제사를 불평 한마디 없이 떠맡으시고 1년에 아홉 번의 제사를 정성껏 경건하게 모셨던 것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계신다.

재산 한 푼 없는 종갓집, 돌아가신 당숙께 양자를 가셔서 열일을 제치시고 정성들여 제사를 모시면서 항상 근본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아버님, 설날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당일 집안 사당 참배를 마치셔야 잠자리에 드셨던 것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나 있다.

때로는 밤늦게 까지 사당 참배를 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꼭 나를 앞세우고 다니시기를 좋아 하신 것은 그만큼 경조 사상을 깨우쳐 주시려는 의도가 강하셨던 때문이라 생각한다.

멀리 도비골 선대 묘소를 월림으로 이장해 모시는 일이 평생 소원이셨든 아버님께서 雲光 형님과 생전에 이일을 매듭지으신 것도 경조사상이 남다르셨던 진면목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머님 회갑 때는 정씨집안에 시집와 고생이 많았다고

큰상을 손수 차리시며 자식의 얼굴을 빛내주려 하셨고 정작 당신의 회갑날은 간소하게 넘어 가자고 제천 어느 음식점에서 조촐하게 손님을 접대하실 때 더욱 나를 감읍케 하셨으니 어찌 그 깊은 뜻을 잊고 살겠는가. 

어른들을 보면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신 가르치심, 자고 나서 다시 뵈어도 어른들께는 절이 인사라고 언제나 절을 하게 하셨던 위계질서랄까 동양적 예절 문화에 대한 신념도 대단하셨다.

아버님보다 연세가 한살 위이셨던 조카 雲寬(나의 사촌 형님)이 집에 오실 때마다 깍듯이 절을 올리고 이를 앉아서 받으셨던 근엄함은 그래서 더욱 내 뇌리에 刻印돼 있다.     

객지에 나가면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한다고 어려운 살림형편에 고추며 마늘이며 달걀, 때로는 참깨와 찹쌀(값이 제법 나갔다)을 팔아 손에 쥐어 주시던 자상함은 군입대후 휴가를 나왔다 귀대할 때도 여전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골에선 농산물을 팔아야만 필요한 돈을 마련 할 수 있었기에 장날만 되면 학교 가는 길에 거의 어김없이 고추나 마늘, 달걀 몇 꾸러미 정도는 손에 항상 들려있기 마련이었다.

절약정신은 어머님도 아버님 못지않으셨다. 아침저녁 밥을 지으실 때 쌀 한 숟가락씩을 따로 모아 저축하시던 일이라든지 장을 보시러 읍내에 가셨다가 돈 몇 십 원이 아까워 점심도 굶고 30리길을 걸어오시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안스러워 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봄이면 약초와 산나물을 뜯어다 파시거나 누에를 쳐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으며 꼭두새벽 일어나셔서 들일을 도우시던 그 억척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우리 4남매는 없었을 것이다.

하도 시장해 빈 밥솥을 다시 열어보시곤 하셨다는 굶주림 속에서도 자식들만은 제때에 끼니를 걸르지 않고 찾아주신것은 어머님의 극진한 자식 사랑 덕분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툭하면 목에 종기(발찌)가 나 고생하시던 어머님, 심한 감기와 몸살에도 좀체로 몸져 누으시는것을 보지 못한 것은 그저 강단으로 사신다는 말로 지나쳐버릴 수 없는 강인한 인내심과 생활욕을 나에게 일깨워 주신 것으로 생각만 해도 존경스럽다.

90 고령에도 남의 집 일을 마다 않으시고 담배조리에다 여전히 봄에는 산나물을 캐시는 등 근력 또한 좋으시니 이 얼마나 홍복인가. 어쩌다 큰아들 집에 오셨다가도 갑갑해 사흘을 못 참으시고 내려가시는 것을 뵈올 때마다 서울이란 아직 노인네들이 살기 불편한 곳임을 실감하곤 한다. 막내이면서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아우가 보통 고마운 일이 아니지만 서울이 싫으시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불평 한마디 없이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계수씨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어머님께서 평생을 두고 애간장을 태우신 것은 교통사고로 몸을 다친 둘째동생 雲玩의 일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큰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엠브랜스에 태워 이화대학 부속병원에 입원시킨 뒤 보험회사와 싸운 일이 엊그제 같지만 완쾌도 안된체 퇴원해 지금까지 집안에만 있는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도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아이들 3남매를 키우며 고생 고생해 집도 장만하고 큰아들 장가보내 손자까지 보았으니 이 모두가 많이 참고 열심히 살아준 계수씨의 착한 마음씨 덕분임을 우리 온가족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팔자소관이라지만 아내가 자기 동서를 중매했다고 늘 미안해하며 사는 것을 보면서 어느 가정이고 그 가정의 화평은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착하게 자라준 조카 영택이 득남했다는 소식은 분명 계수씨의 극진한 내조와 영택의 효성에 감복한 하늘의 선물일 것 같아 더욱 고맙고 대견스럽기 짝이 없다..

어머님은 친정 집안일로도 신경을 많이 쓰셨다. 큰 외삼촌댁도 가난하기는 마찬 가지였고 외숙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친정 조카 여러 남매를 친자식처럼 돌보느라 동분서주하시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니 그 숱한 사연을 어찌 다 회고하겠는가. 

외사촌 여러 형제들이 어려서 겪은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한참 사실 나이의 막내 外叔 마저 만취상태에서 객사를 하시니 어머님 가슴은 보나 마나 시커먼 숯검뎅이일게다. 옛날생각에 목이 메어 말씀을 못하시는 것을 뵈올 때마다 파란 만장이었던 어머님 생애가 가슴을 애이게 하니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올 뿐이다. .

어린 시절을 회고 하면서 6.25 한국전쟁을 겪은 수난을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우리시대의 아픔이다. 1950년 6월북한 공산군의 불법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아군이 낙동강 까지 후퇴했을 때 우리 마을은 공산치하에 있었다. 미쳐 피난을 갈 틈도 없이(피난은커녕 온 동네가 피난처로 친척들이 우리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여름을 나고 면사무소 인민위원회의 지시대로 초등학교 어린나이에도 인민 군가를 배워야 하는 敵치하에서 멋도 모르고 쫓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농사지은 낱알을 세고 애써지은 농산물을 몽땅 바치라는 통에 어안이 벙벙해 하시던 마을 어른들이 부역이다 뭐다 해서 시달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여기 저기 버려진 발싸개며 수류탄, 이름 모를 탄피들이 논밭에 뒹굴고 있을 때 적지 않은 학생들이 피해를 본 것은 모두가 무지의 소치였으니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초등학교 동창 한명은 그때 수류탄을 분해하다 변을 당해 팔 한쪽을 잃기 까지 했다.

'1. 4 후퇴'때는 정말로 피난을 가야 산다고 아버지께서 온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떠나시는 바람에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보행이 불편한 어린동생(운완)을 업고 터벅터벅 청풍을 거쳐 충주 살미면 까지 다 달았을 때는 이미 지쳐 있었다. 고무신도 아니고 집신을 신고 거기다 동생을 업고 마냥 걷다보니 지칠 대로 지칠 수밖에 더 있는가. 폭설이 내린 뒤 얼어붙은 신작로 빙판길이 녹아 질퍽인 데다가 떨어진 집신 뒤축에 묻은 진흙이 솜바지가랭이에 묻어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던 피난길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끼니를 대신한다고 찹쌀을 볶아서 간 미시가루에 엿을 뭉쳐 한 보따리 머리에 이신 체 낳은 지 몇 달 안 된 여동생 운희를 업으신 어머님과 이부자리며 비상식량을 실은 소를 앞에서 몰고 가시는 아버님을 따라 처량하게 피난길에 올랐다가 아버지께서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집에서 편히나 앉았다 죽자"시며 가던 길을 되돌려 샛길로 오다 고생을 죽도록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아와보니 오히려 우리 동네가 피난처인양 제천읍내 사람들이 우리 집에 기거하고 있었고 별 탈 없이 휴전을 맞았으니 천만 다행이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반에서 돼지도 기르고 몇 푼돈도 모았으나 모두가 허사로 돌아간 것은 전쟁 통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동창들이 두고두고 서운함을 느끼는 대목이다.

국토의 3분의 2이상이 적치 하로 빠져들면서 마을 청년들을 義勇軍이라는 미명하에 마구 끌고 갔고 몇몇은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니 필경 개주검을 당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작은 외삼촌께서는 소위 의용군으로 끌려 가셨다가 몰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오셔서 목숨을 까까스로 부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敵치하엔 그렇다 치고 아버님께서 6.25 전쟁 당시(그러니까 휴전 직전으로 기억된다) 保國隊(국군을 돕는 후비인력)로 차출되셔서 멀리 영등포 도림동 어느 부대에 근무하신 적이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나이에 서울로 혼자 면회를 가 뵈온적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때 불쑥 찾아간 나를 반기시며 자장면을 시켜 주셔서 생전처음 중국음식을 먹어보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토록 자상하셨던 아버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중풍으로 자리에 누우셨다가 회복되시는가 했더니 끝내 서울 청구 성심병원에서 1988년 음력으로 8월 초닷새,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시니 자식으로 불효막급이다.

출근하며 다녀오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신 것이 아버님의 마지막 용안이었으니 땅을 치고 통곡하며 후회해 보았자 가슴만 메어질 뿐이다.


아! 나의 同伴者여

 나는 1960년 12월 10일 (음력 10월 20일) 아내 李鍾淑과 결혼했다. 집안 어른의 중매로 그 흔한 데이트는커녕 얼굴도 못보고 딸랑 명함판 사진 한 장씩만을 교환하고 결혼을 결심하기 까지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 선택한 배우자라는 확신에 변함이 없다.

하루는 근로장학회 한 친구가 전해준 편지를 뜯어보니 정혼을 했으니 그리 알라는 선친의 편지였다. 시골까지 전화가 들어가지 않았던 때라 거의 편지로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막상 일방적인 결혼통보를 접하고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 며칠 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시골에서 손님이 오셨으니 빨리 내려오라는 전갈이 와서 근로장학회로 내려가 보니 노인네 두 분이 나를 기다고 계셨다. 뒤에 안일이지만 나의 妻伯父와 妻堂叔께서 신랑감인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러 오신 것이었다.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점심을 대접한 뒤 학교에서 가까운 창경원으로 모신일이 고작이었는데 돌아가셔서 장인 되실 어른께 칭찬이 놀라우셨다는 후문이다. 점수를 따기 위해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인사성이 밝고 사람 됨됨이 그만하면 됐다 싶으셨는지 후한 점수를 주셔서 일차 시험(?)엔 무난히 합격한 셈이 돼버렸다.

장인 되시는 분이 우리집안을 좋게 보신 것은 우선 迎日鄭씨 松江자손으로 慶州李씨 집안과는 오래도록 친교가 두터웠고 처당고모께서 우리집안으로 출가를 오셔서 우리 집 내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으니 이쪽 정보는 물으나 마나였다.

내가 확신을 가진 것도 이 같은 세교와 연혼, 그리고 慶州李씨 白沙(宣祖朝 명상 李恒福의 호)자손으로, 더욱이 송강선조와 백사선생과의 친분으로 볼 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양반집안 규수를 맞는다는 기쁨이 앞섰던 것이 마음에 끌린 동기라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니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나와 아내 될 이종숙이 이분들의 12대 후손으로서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혼을 결심하게 된 또 하나 중요한 이유였음을 어찌하랴.

부모님의 성화랄까 宗婦를 고르시기에 노심초사 하셨던 당시의 일화는 눈물겹도록 감읍스럽다. 여기저기에서 중매도 많이 들어 왔고 솔직히 얼굴은 못생겼지만 비교적 착실하고 동네에서 흔치 않은 대학생이고 보니 나를 아는 딸 가진 집안은 욕심을 낼 만도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이미 경주이씨 가문의 규수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하시고 고르신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내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던 어린나이 때부터 유심히 나를 관찰하시고 중매를 서주시겠다 던 집안어른 仁澤씨(바로 내처당고모의 시아버님이 되신다)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던 것도 경주 이 씨 집안이 영순위에 오른 배경이라 여겨진다.

어른들 사이에 정식으로 혼담이 오가고 간규(신부감을 보러가는 일)를 위해 부모님이 함께 처가를 다녀오신 일화는 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워 버릴 수가 없다. 두 분이 아예 터놓고 나의 처가를 방문해서(장인어른과 선친과는 여러 차례 만나신 적이 있음) 아버님은 사랑채에서 규수를 보실 기회가 없으셨지만 어머님은 안채에서 주무시면서 장차 당신의 며느님 감을 똑똑히 보시고 돌아오셨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뒤에 안일이지만 부엌에서 밥 짓는 모습에서부터 잠자리에 드는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빼놓지 않으시고 보시고 돌아오신 뒤 곧바로 나에게 편지를 쓰셨고 처가 쪽은 처가 쪽대로 처백부께 간랑(신랑감을 보러가는 일)행차를 맡기셨던 것으로 보아진다.

문제는 나의 고민이었다. 아무리 어른들이 정하신 혼사라지만 신부될 사람의 얼굴도 안보고 장가를 들 수야 없지 않은가 해서 밤잠을 설쳤던 것도 사실이다. 정혼 사실을 편지로 전해 듣고 집에 들렸을 때 신붓감 명함판 사진을 주셔서 보고 또 보고 달덩이 같은 얼굴을 그려 보며 단꿈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나 좀이 쑤셔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혼날자도 잡혔겠다 아내 될 사람을 만나봐야겠다고 60년 그해 여름방학 집에 가는 길에 부모님 허락도 없이 충주 처가에 들렸다.

먼저 처가론 갈수 없고 서울서 뵈온적이 있는 처백부댁으로 가서 안내를 받아 해질 무렵 처가에 들르니 마침 장인께서는 텃밭에서 일을 보시다가 뜻밖의 사윗감을 상면하시게 되니 무척 당황스러운 모습이셨다. 정중하게 절을 올리고 제가 정 아무개로 방학이되 집에 가는 길에 뵈오러 왔노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전에 장인께서 제천으로 사윗감인 나를 보러 오셨다가 내가 부재중이라 만나시지 못하고 가신일도 있고 해서 결혼 전에 장인어른을 뵙고 가는 것이 도리라는 등 일단 방문한 명분을 나름대로 합리화했으나 목적은 아내 될 사람을 상면하는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애당초 신부될 사람을 만날 생각도 말라시니 어안이 벙벙해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어른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묵묵부답 앉아 있는데 장모님 되실 분이 들어오셔서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그 뒷얘기는 물론 신붓감을 만났느냐는 의문을 푸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답은 황당무계, 노(NO)였으니 지금까지 경주이씨 가문에서 소위 딸 미아이(일본말로 면회라는 뜻)시킨 적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큰처남은 군에 가서 집에 없고 나를 접대한 사람은 내 나이 또래의 막내 처외삼촌 金日仲씨였는데 이분의 주선으로 만나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해보았지만 엄중 감시체제(?)를 뚫고 들어가기란 역부족이었다. 생각다 못해 편지 한 장을 전해주면서 회답이나 달라고 하고 기다리던 중 나에게 쥐어준 아내의 짧은 회답,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펴보니 역시 지엄하신 분부를 거역할 수 없으니 용서해달라는 것과 모든 허물 무릎 밑에 접어두시고 뒷날을 기약하자는 사연이었으니 내가 아내 될 사람에게 반한 또 하나의 이유다. 억지로 우겼으면 혹 만나 볼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점잖게 돌아서서 나오는 것이 스타일을 구기지 않는 길임을 깨달은 것은 잘한 태도였는지 모른다. 뒤에 장모님께서 말씀하신 기억이 나지만 어느 신랑감이 기껏 신부를 만나보고 이리 저리 데리고 다니다가 몸만 빼앗고 툇자를 놓는 바람에 신부 집이 온통 초상집이 됐다는 것이며 예부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해서 결혼 전에는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풍속이었는데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지 않느냐 해서 박절하지만 못 보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못 봤지만 문틈으로 나를 본 처갓집 식구들은 많았고 아내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는지 아직 고백한일이 없으니 초례청대면이 첫 상견례였다는 것이 나의 결혼에 얽힌 일화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그 훨씬 전에 한 만리장서다. 결혼이 기정사실로 굳어지면서 나의 마음속에는 아내 될 사람을 맞는 내 마음을 전해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 먼저 무례함을 무릅쓰고 편지를 쓴 것이다. 여공재봉이 어떻고 가풍이 어떠며 내가 간접적으로 들은 아내에 관한 얘기들을 자랑삼아 늘어놓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었다.  답장을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끌린 연정은 꼭 얼굴을 마주대해서가 아니라 수백 번 수천 번을 만난사람 못지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얼마 전까지도 그때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아내가 더욱 믿음직스럽다.

나는 예식장에서의 신혼예식이 아닌 妻家에서 구식결혼식을 올렸다. 음력으로 1960년 10월 20일 (양력 12월 10일) 비교적 따뜻한 날씨였지만 영업용 택시를 대절해 충주까지 가는 길은 꽤나 쌀쌀했다. 백부님을 상객으로 모시고 은사이신 成大 李院錫 선생님과 충주에 도착하니 동네사람들이 신랑을 보겠다고 줄서서 기다린 모습이 눈에 선하고 구식결혼식을 올릴 때 모두들 농담을 하던 젊은이들이 뒤에 나를 달겠다고 벼르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한 가지 미안하게 생각되는 것은 서울서 나의 결혼을 축하해 주겠다고 제천까지 내려온 친구들을 트럭에 태워야 했던 불찰이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웃곤 하지만 金秉鉉군과 洪淳珍군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특별대접(함을 지고 택시를 탔음)을 받았으나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선듯 함을 내준 탓으로 두고두고 친구들 사이에 조롱감이 된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어디 그뿐인가. 처가에서 점심은 대접했지만 서울로 올라가는 차편은커녕 여비조차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몇 몇 친구들은 군에서 휴가를 얻어가며 내 결혼식에 참석해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때의 막역한 우정으로 지금까지 친형제처럼 다정한 부부동반 모임을 갖는 친구가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록 관중 포숙의 우정에는 못 미칠지 모르나 대학 동창들이 우리처럼 허물없이 만나는 친구도 그리 흔치는 않을 듯싶어 자랑스럽고 이런 우정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쨌든 결혼한 지 40년이 지난 오늘 생각해보니 아내의 억척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어찌 있겠는가 싶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결혼하자마자 신랑이란 사람은 서울서 직장도 없이 대학원공부를 한다고 떨어져있고 뒤이어 나의 군 입대로 3년간을 독수공방으로 지낸 아내의 인내심은 요즘 사람들에게선 정말 기대하기 힘든 마음씨다. 매사에 깔끔하고 빈틈이 없으며 알뜰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생활력은 전형적 한국여인상 그대로라는 것이 평생을 옆에서 지켜본 나의 확신이다.

마누라와 자식자랑은 3불출이라지만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아내를 객관적으로 평한다면 '억척부인 충청도 또순이', 아니 그보다 더한 賢母良妻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릴 적부터 경주이씨 집안의 엄한가풍이 몸에 밴 숙녀로서 나이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문밖출입을 몰랐던 그가 심산유곡 시골마을로 시집와서 겪은 고통은 외로움과 싸우는 일이었다.

새댁시절 먼지구럭이었던 온 집안을 유리알처럼 깨끗이 청소한 일이라든지 뒤안 배수로를 정비하고 장독대를 중심으로 화단을 예쁘게 가꾸어 동네 사람들을 경탄케 했던 일은 아내의 성격을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밥상과 화장대는 물론이고 책상 걸상 어느 곳이고 먼지를 허용하지 않는 청결지상주의, 무엇하나 삐뚤어진 것을 두고 못 보는 성격은 정말 족탈불급이다. 집안 어디에고 흐트러진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모두가 그녀의 깔끔한 성격이 가져다준 아름다움으로 자식들이 본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시집살이는 신랑도 없는 독수공방은 그렇다 치고 몸이 아파도 앓아누울 수 없었던 고통, 특히 젖유종을 앓으며 30리길을 걸어 직접 약을 사다 먹어야했던 일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젖유종 사실을 군에 가 있는 남편인 나에게 편지로 알렸다고 부모님께 야단을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오죽 고생스러웠을까, 옆에 남편이라도 있어 주었다면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을 텐데 생각하면 결혼을 한 뒤 군대를 간 것을 원망해야 할지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평생에 한번뿐인 신혼여행도 우리는 못 갔다. 결혼 후 바로 졸업시험을 치러야 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바로 신혼여행을 못 갔던가 후회스럽다. 1961년 2월 나의 졸업식 때 아내가 서울로 찾아준 것은 신혼여행기분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처럼 호텔이나 모텔 등 숙박시설이 많지 않았고 있어도 이런 곳을 이용하기란 솔직히 주머니사정이 허락지 않아 기껏해야 친척집 신세를 져야 했는데 마침 필동 사촌누님의 아들들을 돌보고 있었던 중이라서 그곳에서 일단 숙식을 해결하면서 아내와 명보극장서 상영하는 '성춘향전'을 관람하고 창경원 덕수궁등 고궁을 돌아보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며칠 묵지도 못하고 그냥 시골로 내려가야 했던 아내가 속으로 얼마나 야속해 했을까 못지않아도 알만하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에 입학하고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차에 입영영장이 나왔으니 그때의 내심정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무던히도 참아준 아내에게 보답하는 길은 빨리 취직을 하는 일, 제대 후 대학원 복학은 엄두조차 못 내고  직장구하기에 혈안이 된 나를 반기는 곳은 어느 한곳도 없었다.

어영부영 허송세월만하다 아내가 보고 싶어 고향에 내려와 농사일을 돕던 어느 날 장기붕교수님의 전화를 받으니 빨리 올라오라는 것이 아닌가. 다름이 아니라 장 교수님의 초등학교 아들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주위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면 수입도 괜찮을 것 아니냐하는 주문이었는데 불감청고소원이라던가 귀가 번쩍 띄어 편지를 받는 즉시로 서울로 올라와 다음날부터 다시 가정교사로 직업 아닌 직업을 갖게 되니 이것이 내가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첫 번째 구한 일자리다. 학생도 제법 모이고 그럭저럭 이일에 적응이 돼갈무렵인 어느 날 나는 두 눈을 의심할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장기붕선생님과 이원석선생님이 내가 묵고 있었던 장 교수님 서재에다 부엌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대려다 살림을 차릴 수 있도록 하려는 눈물겹도록 고마우신 배려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반신반의 하면서 제천 집으로 편지를 띄우니 며칠 뒤 아이들 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온 아내를 청량리역에서 맞게 된다. 서재를 비우고 부엌까지 직접 꾸며주신 장 교수님은 이래서 평생 잊지 못할 은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아무리 제자사랑이 극진하다 한들 이토록 고마운 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쩌면 나의 행운이자 아내의 고생을 안쓰럽게 여긴 하늘의 은총이 뒤따랐는지 모를 일이다.

그날 저녁 휘경동 시장에 가서 냄비며 당장 필요한 가재도구를 사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직장도 구해야한다는 절박감으로 여기저기 알아보던 차에 한전 공보실장으로 계시던 육촌 매형님인 최기덕(崔起德)씨의 주선으로 新亞日報 조사부 견습기자가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장기붕교수님 서재 단칸방에서 어디로든 이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닥친 것이다. 수원에 사시는 장 교수님 형님이 운영하는 학교가 부채로 위기에 봉착해 빚을 갚는데 필요한 돈을 장만하기위해 집을 팔아야 하겠으니 그리 알라는 것이 아닌가. 형님을 돕겠다고 사는 집을 선 듯 팔겠다고 내놓은 장 교수님의 우애에 감복 하면서도 갈 곳 없는 나의 처지는 처량하기만 했으니 속수무책 처분만 바라고 있던 어느 날 장 교수께서 망우리에 헌 초가집을 하나 계약해 놓았는데 그리로 같이 이사를 가서 살자는 것이 아닌가.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으나 빚 때문에 집을 팔고 심난해 하실 장 교수님을 생각하니 그곳 까지 따라가 심려를 끼친다는 것은 도저히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방을 장만할 때까지 제천가 있으라고 부탁하고 청량리역에서 아내와 두 남매를 3등열차에 태워 보내니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길이 돌아서지 않았다. 그후 가까스로 서대문구 영천 당숙모님댁 판잣집 사글세방을 빌려 다시 살림을 차리기까지 그 우여곡절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지 생각할수록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중히 간직하던 결혼반지를 파는 등 사글세방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 내가 신문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으나 밤에는 가정교사로 낮에는 신아일보 조사부 기자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기쁨이란 비록 박봉이었지만 즐겁기 그지없었다.

집을 장만하기까지의 자세한 얘기는 뒤에 쓰기로 하고 여기서는 아내 이종숙이 얼마나 부지런했으며 알뜰 주부였는가를 돌이켜 보고자한다.

앞에서도 썼지만 이종숙 그는 충청북도 충주시 용관동 446번지 벌미마을의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 휘 이규형(李圭亨)의 2남 4녀 중 둘째딸로 1939년 음력 정월 4일(양 2월 22일) 태어나 스물두 살에 내게 시집왔다.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은 전형적인 중매결혼으로 서로 사진만 교환하고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 전부다.

공부는 크게 못했지만 한문공부를 많이 해서 대학생 못지않은 학력(學力)의 소유자로 미모 또한 크게 빠지지 않아 호감이 가는 타입이다.

위로 큰 언니와 오빠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 그 아래로 여동생 둘이 있으니 비교적 다복한집에서 귀염을 받고 자란 셈이다. 어머니 光山金씨 姙仲님은 이조 말엽 동부승지를 지내신 金龜洙의 장손녀로 태어나시어 귀하게 자라다 경주이씨 가문으로 출가해 생전에 하신 말씀대로 손톱 발톱이 다 닳도록 가산을 일구어 놓으신 효부로 유명하다. 이웃마을 노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내가 처가를 방문할 때마다 확인하는 바였고 사위 사랑도 남다르셨다.

장가를 들고 아내와 함께 처음 처가에 갔을 때 당신 조부님이 입으시던 금관 조복을 나에게 직접 입혀 주시며 부디 성공해 잘살라고 어깨를 두드리시던 인자한 모습을 다시는 대할 수 없으니 오호 통재로다. 생전에 좀더 잘 모실걸, 여러 남매가 화목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신 장모님 생각이 날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낀다.

내가 보기엔 다른 딸들보다도 내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것 같았고 딸 종숙이는 어디에 내놔도 잘살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사신 것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자랄 때도 유별나게 귀염 받는 일을 많이 한 것 같고 마음씨 또한 착해서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40년을 살면서 부부싸움을 안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싸운 이유도 아내입장에서는 언제나 분명했다. 술이 과하다든지, 씀씀이가 문제라든지 하는 따위의 이유는 그렇다 치고 언제나 규모의 가정경제를 들고 나올 때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5대조 할아버님 시제기금을 모을 때 아내와 다툰 일이다. 동생 雲規가 30만원을 내기로 돼있었는데 내 딴에는 동생이 빨리 돈을 먼저 부쳐온 것을 자랑삼아 말하고 싶어서 平統으로부터 통장에 입금된 30만원을 동생이 부쳐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냥 믿고 넘어갔으면 얼마 뒤 동생도 돈을 부쳐 왔을 테고 그러면 아무 탈 없이 넘어 갔을 터인데 일이 꼬이느라고 30만원 보낸 은행의 고유번호까지 변조한 것이 탄로가 나 내 딴엔 자존심도 있고 해서 밤새도록 아니라고 우긴 것이 아내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이다. 동생을 도와주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마누라 몰래 통장까지 변조해가며 거짓말 하는 것이 분하다는 것이다. 그때 이실직고, 바른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했으면 좋았을 것을 빡빡 우기다 스타일만 구기고 체면이 말이 아닌 거짓말쟁이가 된 것은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영문을 모르는 동생 운규만 전화를 받고 당황해 했으니 모두 나의 불찰이며 아내의 진심을 너무 모른 잘못으로 이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아내에게 양해를 구한다. 직접 돈을 보태 준 것도 아니고 잠시 속은 것이 분하겠지만 악의로 그런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사실 오늘의 우리부부가 아들딸 4남매를 낳아 그런대로 시집장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이종숙의 알뜰한 살림이 수훈 일등이었음을 모른다면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처음 장교수님 댁에서 살림을 시작할 때부터 알아본 일이지만 아내의 절약정신은 보통사람과 달랐다. 시장에 나가 김장 쓰레기를 주어다 삶아 끓인 구수한 된장국은 진수성찬 부럽지 않은 영양가를 나에게 제공해 주었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한 푼이라도 벌어 가용에 보태겠다고 밤을 낮삼아 봉투를 부치며 뜨개질을 하고 신문 한 장이라도 그냥 버리는 일 없이 모아 두었다가 폐품으로 팔며 아이들을 키운 그 억척스러움이 내 집 장만에도 큰 힘이 되었음을 내가 왜 모를 리 있겠는가.

60-70년대 구공탄 아궁이시절, 하루하루 연탄을 사때며 한 달 월급 3천원의 박봉에도 저축을 했고 아이들 4남매를 둔 어머니로서 대영산업인가 하는 보세공장에서 밤늦도록 실을 감으며 일한 것도 잊지 못할 고생담이고 형무소 뒤 창고 집에서 심한감기로 피를 토하면서도 봉투를 붙이고 뜨개질을 하던 여인이 오늘의 내사랑하는 아내 이종숙임을 말하려니 정말 목이 메인다.

어디 그뿐인가. 영천으로 이사와 무허가 건물을 사서 개축할 때는 노가다 못지않게 일했으며 수돗물이 안 나와 밤새도록 줄서서 받아 물통에 지고 고지를 올라야했던 아내의 고생도 그리 먼 옛날 얘기가 아니다.

갈현동으로 이사 와서는 언제 배웠는지 몬테소리 이론으로 아가 방을 차리고 매월 쏠쏠하게 수입을 올리던 억척스러움은 훈장을 줘도 부족할 것이다.

혼자 아가 방을 차리기 위해 싱크대며 주방도구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귀가 하다 어느 초보운전자의 승용차에 받쳐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일은 정말 하늘이 돌본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날 나는 전화를 받고 귀를 의심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으로 택시에 앉아 기도했다. 병원 직원이 나에게 전화를 걸때 환자의 상태를 알려줘 어느 정도 안도 하긴 했으나 10년 감수를 한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줄어들자 지하실을 세놓고 1층 거실을 아가 방으로 꾸며 남의 집 간난 아기의 오줌똥을 마다않고 가려가면서 한 달 내내 외출한번 못하고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기 그 몇몇 해였던가. 이렇듯 고생고생 하며 자식 키워 장가보내고 나서 호강은 고사하고 마음이나 편할 가 했지만 느닷없이 시어머니에게 딸을 맡기고 공부를 더하겠다는 큰며느리를 대할때 과연 그 속마음이 어떠했을까,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갈현동으로 이사할 때도 그랬지만 알뜰하게 저축했던 돈으로 그 당시 1억 원 가까운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월급으론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화정 신안아파트로 이사 올 때도 아내의 진가가 돋보였으니 여기 어찌다 필설로 아내의 고마움을 표시하겠는가. 하늘같이 떠받들어도 시원치 않을 아내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런 아내에게 나는 많은 실망을 안겨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술에 취해 귀가하다 자빠져 흙무더기가 된 옷을 불평 한마디 없이 깨끗이 빨아준 일도 많았고 때로는 통금에 걸려 외박하고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준 일이라든지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술주정을 마구 해대던 張모군의 한밤중 전화로 마음을 상하게 한일은 내가 친구를 잘못 두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엔 이미 먼 옛날 얘기가 돼버렸으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높은 이자를 받아 준답시고 돈 1,300만원(1978년 때니까 지금 돈으로 치면 꽤 많은 액수다)을 받아 챙긴 천하의 사기꾼에게 당한 경우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분통터지는 대사건이다. 약속어음은커녕 차용증 한장 받아놓지 않고 믿거라하고 준 돈을 고스란히 떼이고 만나의 어리석음은 그때 이후로 친구와의 돈거래는 있지도 않았지만 철저히 경계해 왔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돈 1,300만원은 아내가 제대로 입거나 먹지도 않고 알뜰히 저축한 돈도 포함돼 있지만 단 몇 푼의 이자를 노리고 맡긴 남의 계돈이 많았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결국 그 후 우리는 월급 타서 고스란히 남의 빛갚기에 바빴고 엉뚱하게도 갚은 돈을 안 받았다고 생떼를 쓴 이웃 경식이 엄마로부터 송사까지 당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으니 생각할수록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배임 횡령 혐의로 고소를 당해 난생 처음 검찰청을 드나들 때  친구 金秉鉉군의 소개로 담당 수사관을 만나 눈물로 아내의 결백을 소명하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돈을 받고 계산서 영수증을 써주고도 자기가 받을 돈만 챙기려 고소를 한 것은 민법상 명백한 相計의 원리를 몰라도 한참 모른 무지의 소치였지만 일단 피소를 당하면 그것대로 소명을 해야 되기 때문에 무척이나 번거로웠다. 사필귀정, 무혐의 불기소 처분으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송사였다.

조상에 대한 향념도 남다른 아내, 응암동으로 집을 옮기자마자 일 년에 아홉 번이나 되는 제사를 마다 않고 모셔온 일이라든지 아버님과 선대 산소를 찾아 사당을 매연하고 돌아온 일은 경주 이 씨 가문의 딸이라 서기보다 영일정씨 가문의 며느리로 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 한 이유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옛날 독수공방 시집살이가 지겨웠을 텐데도 지금까지 제삿날이면 모든 정성을 다해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모셔온것은 흔치 않은 종부중의 한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4남매 시집 장가 보낼 때도 나는 건성이었으나 참으로 빈틈없이 행사를 매끈하게 치를수 있도록 혼수장만에서부터 살림집 마련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처리해 온 집안을 감복시켰다.

정신없이 사느라고 생일날도 챙기지 못했고 어쩌다 생일날 오래나 살라고 칼국수 한 묶음을 사들고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화제가 되곤 한다.

여간 아파서는 몸저 눕는 일도 없다. 팔다리가 쑤시고 관절로 고생스러워도 주사를 맞으며 참고 버티니 초인간적인 능력의 소유자인가. 목에 침이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부어버린 편도선도 아내에게는 오불관언이기 일수다. 화정 아파트 주변 남의 땅에 배추와 무우를 심어 돈 얼마 안들이고 김장을 담글 수 있었다든지 사돈댁이 주선해준 땅에 상추, 쑥갓, 콩을 심어 함께 농사짓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내의 억척스러움 덕분이다.

웬만한 여자 같으면 손 하나 까딱 않을 나이, 환갑이 지나서 까지 엄동설한에도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 해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아내의 60평생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희생과 봉사로 일관된 생애였으니 어떠한 수식어로도 아내의 값진 인고와 내조를 보상할 수 없을 것 같다. 한평생 가족 사랑으로 살아준 아내의 노고에 머리가 숙여진다. 그저 사는 동안 건강하기만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내 집 장만의 哀歡

 서울에 와서 처음 내 집이라고 장만한 것은 무허가 주택이었다. 다 쓸어저가는 무허가 건물이었지만 아내와 나에게는 고대광실 못지않은 삶의 보금자리였다. 그때 우리 온 가족의 기쁨을 여기 어떻게 필설로 다 표현 하겠는가.

서울에서의 첫 살림은 앞에서 쓴 대로 동대문구 휘경동 張基鵬교수(성균관대)댁 서재였다. 장 교수님과 李院錫교수(성균관대. 한양대 교수)님이 직접 부엌을 꾸며 살림을 차릴 수 있도록 해주신 눈물겹도록 고마운 恩惠를 잊지 못하는 우리 두내외로서는 당시 장기붕교수님댁 서재에서의 살림을 시작으로 자나 깨나 집장만이 숙원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밤낮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번 몇 푼 안 되는 돈을 알뜰히 저축한 아내의 집념은 끝내 서대문구 현저동(지금은 종로구 무악동) 단칸 사글세방으로 옮길 수 있는 재력(?)을 과시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때의 내 기분이 어떠했을까는 생각만 해도 감격적이다.

그러나 난생처음 사글세방이라고 얻은 당숙모님댁 단칸방은 우리 두내외와 두 남매가 기거하기엔 너무나 좁았다. 큰딸 순택이 "나는 항상 책상 밑에서 자요" 라고 말했다는 그 당시의 상황은 부부생활의 불편함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

고지대라 수도사정도 나빴고 밤중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물을 겨우 기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당시 모든 고지대 서울주민들의 애환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가파른 언덕을 물 지개를 지고 오르내린 아내의 고생은 이래서 말이 아니었고 직장이라고 구한 신아일보 월급 3천원으로 됫박 쌀을 사고 십구공탄을 한장 한장 사 때면서 반찬값 절약을 위해 시장에 나가 배추 씨레기를 주어다 장국을 끓이곤 했던 아내의 알뜰 살림 역시 내집 장만의 꿈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루는 아내가 괭이와 삽을 들고 들어오기에 물었더니 문화촌 남의 땅에다 판잣집이라도 임시로 지어 보려고 터를 닦다 왔다는 것이 아닌가. 둘째 처외삼촌이 문화촌에 사시는데 빈터도(물론 시유지) 있고 잘하면 몇 평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지만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이만 느껴진다. 자고 나면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고 먼저 시유지를 찾이 하는 사람이 임자였던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던 시절, 선거 때만 되면 더욱 극성이었던 판잣집의 명멸은 그때의 정치 상황과 사회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내가 일구던 집터는 연약한 여자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역사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의 강력한 반대를 뿌리칠 수 없어 흐지부지 되고 만 기억이 새롭다.

그러든 어느 날 육촌 누님이 사놓은 현저동 변전소 자리 창고를 지킬 겸 그곳으로 이사와 살수 없느냐는 부탁을 받게 된다. 부탁이라기보다 거의 일방적인 통고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두내외로서는 사글세방에서 방세 없는 넓디넓은 거처로 옮길 수 있다는 기쁨에 즉각 짐을 싸서 이사를 했다. 이사를 가고 보니 창고 한구석 나무판자로 꾸민 방 두 칸, 연탄아궁이도 없는 냉방에 아이들을 재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여름철이어서 당장은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으나 겨울날 일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해 겨울 온 식구가 감기로 고생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는 물도 못 마실 정도로 편도선이 부은 적도 있다.

신아일보 張基鳳 사장께서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나 구들장이 있으니 갔다 쓰라고 해 회사차를 빌려 실어다 당장 급한 안방을 온돌방으로 고쳐 연탄을 땔 수 있도록 개조하려했으나 여의치 못해 포기한일도 기억에 새롭다

이곳에서의 살림은 한마디로 집 없는 서름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뼈저리게 느낀 시련의 연속이었다. 밤낮으로 봉투를 접으며 뜨개질을 하고 틈만 있으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동분서주하던 아내의 모습은 집을 장만하고야 말겠다는 집념 그것이었다.   

때로 뒷산에 올라 우리 두내외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저 넓은 서울 저 많은 집들 중에 어찌하여 내 집은 없는가" 하는 넋두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육촌 누님이 창고 옆에 있던 집을 비우고 우리를 그곳으로 이사하도록 하니 그때 비로소 집다운 집에서 사는 행운을 맞게 됐고 이집에서 병아리까지 키우며 산일은 더욱 낭만적이다. 둘째딸 희택을 이집에서 낳고 몇 해 동안 집 걱정은 안하고 살았으나 언젠가는 비워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떠나지 않았다. 동생 雲玩이 직장을 구한다고 와 있고 鍾勳 처남 또한 누나집이라고 와서 기식을 하니 아내의 속마음이 어떠했을까, 술이 과해 툭하면 말썽을 피우던 동생으로 인한 마음고생은 생각할수록 미안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의 경우 집 없는 서러움은 자주 이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고통으로 나타나기 일쑤다.  집 가진 사람이 더 좋은 집으로, 또는 평수를 늘려가기 위해 이사를 가는 것은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지만 집 없는 사람이 사글세, 전셋집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번거로움이란 보통 고달프고 괴로운 일이 아니다.

집을 비어주어야 할 즈음 역시 싸고 넓은 공간을 찾다가 현저동(지금의 무악동) '인왕회관' 이 비교적 우리 형편에 맞아 그곳에 전세를 들어 살게 되니 그때가 1970년대 초로 기억된다. 인왕회관이란 마을 회관의 이름으로 회관 안을 살림집으로 꾸며 전세를 놓은 것인데 마침 내가 그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넓은 방이 하나 있고 20평 남짓한 회관안이 모두 거실이나 다름없어서 그런대로 살만했다. 처음엔 회관 바로 앞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지만 뒤에 수도를 놓아 불편도 덜 수 있었다.

종형이신 雲光형님이 이웃에 사셔서 외롭지 않았고 종형님의 처남 되는 이상표씨도 이웃에 살고 있음을 알고 기뻐한 기억이 새롭다.

지금까지 이 인왕회관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이곳에서 막내 우택을 낳았기 때문이다. 4남매중 위로 두 남매는 제천에서 낳았고 아래로 두 남매는 서울 사글세방, 전세방에서 얻는 동안 아내가 병원신세를 한 번도 지지 않았다면 모두들 놀랄 것이다. 산모가 직접 태를 가르고 내가 끓여준 미역국으로 2-3일 후면 훌훌 털고 나왔으니 요즘 산모들 정말 호강한다는 생각이 든다. 해산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큰딸 順澤을 빼고는 義澤, 喜澤,  澤 모두 내가 보는 앞에서 해산을 했고 그때마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뒷일을 돕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산후에 제대로 몸조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인왕회관도 오래 있을 거처는 못되었다. 마을회관으로 쓸 테니 비워달라는 것이 아닌가. 여기저기 방을 얻으러 다니던 아내가 하루는 슬피 울기에 물으니 모두들 아이들 넷이라고 방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집 없는 서러움도 서러움이지만 아이들이 많으면 전세방 얻기도 힘들었던 서울인심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집을 사러가자는 것이 아닌가. 인왕회관 건너 빤히 보이는 판잣집을 사자는 아내의 말에 반신반의 하면서 따라가 보니 한일자로 지은 무허가 건물로 방이 두칸이지만 개축을 하면 훌륭한 내 집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박봉에 무슨 돈이 있느냐 했더니 돈은 걱정 말라는 것이다. 집값 64만 원 중 잔금은 은행융자를 얻어 갚으니 우선 내 집이라는 기쁨에 잠을 설친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 달 월급 4천원에서 7천원으로 봉급은 올랐으나 은행 이자에다 빌린 남의 돈 이자를 제하고 나면 생활비는 턱도 없었으니 그때 어떻게 살림을 꾸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 한 일이다. 어쨌든 무허가 판잣집을 어렵게 장만함으로써 서울 와서 살림을 시작한지 불과 5-6년 만에 처음 내 집 마련의 꿈을 성취한 셈이다.

문제는 이집을 개축하는 일이었다. 무허가 건물이라 새로 허가내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민한 끝에 동회에 구두신고만하고 집을 뜯어 고치기 시작했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철거반원이 나와 때려 부순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가까스로 자진철거를 약속하고 어영부영 넘어가다 나중에 무허가 건축물대장 번호를 받고 재개발을 기다린 것은 하늘이 도운 듯 느껴진다.

그 후 1974년 재개발이 시작되고 집이 헐리면서 거처를 옮기려고 집을 보러 다니던 중 응암동 집을 정식으로 계약해 드디어 제대로 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니 이 모두가 아내의 억척이 거둔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시골 논 여섯 마지기도 이 집을 장만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으니 백골난망이다.

처음 집장만이 어려웠지 그다음부터는 저축에 저축을 거듭한 아내의 알뜰 살림 덕분으로, 갈현동에서 지금의 신안 아파트로 이사와 편하게 살기까지의 과정은 운도 함께 따라준 것이라 생각돼 다행스럽다.

아내가 가장 기뻐했던 때는 갈현동 새집으로 이사 온 때로 기억된다.

건축업자가 살려고 지은 집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집을 계약하고 나는 과연 잔금까지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어디서 융통했는지 지하 전세 보증금을 제한 나머지 금액을 모두 지불하고 입주한 그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갈현동 거주 15년, 사는 동안 애환도 많았다. 好事多魔라던가. 집을 살 때 세밀하게 관찰하고 계약하지 못한 불찰로 장마 때만 되면 지하수가 역류하는 바람에 온 식구가 밤잠을 못자는 비상사태(?)의 연속이었으니 집을 비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지하에 세사는 이에게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한번은 지하수가 역류해 온통 물난리를 겪는 소동이 벌어 졌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쌓아 놓은 연탄 수백 장이 온통 물속에 잠기기 일쑤였고 조금만 비가와도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없었지만 워낙 신경을 쓰고 산지라 그때 이후론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하 하수구는 그렇다 치고 한번은 직장으로 전화가 오기를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 아닌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 앞에 이르니 소방차가 온통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알고 보니 지하 보일러실에서 불이 나자 이웃집 신고로 들이 닥친 소방차였다. 화재 원인은 간단했다. 집을 비우면서 방안 보일러 자동스위치를 영(零)에 놓고 나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날 날씨가 워낙 추워 보일러가 자동으로 작동하면서 잘못 세어나온 보일러 기름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일찍 진화를 해 보일러실에 쌓아놓은 살림 몇 가지만 소실됐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연탄 몇 백 장(지하 셋집용)이 온통 물에 잠겨 이것을 처분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고 그 고통 또한 말이 아니었으니 생각하기 조차 싫은 추억이다.     

어쨌든 갈현동 집은 아이들 4남매를 모두 이집에서 시집 장가보낸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지만 정말 애환도 많았던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신안아파트로 이사 올 때는 무엇보다도 아내의 현명한 판단이 주효했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싶어도 단독주택이 팔리지 않아 눌러 살고 있던 차에 어느 날 갑자기 집을 팔았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놀란 것은 집살 사람이 집을 둘러보고는 즉각 계약하자고 해 그대로 결정했다지 않는가. 아파트 생활이 편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이사와 살고 보니 아내의 판단이 적중했다는 생각과 내집 마련을 위해 고생한 지난날이 엊그제 같아 감회가 새롭다.


子息들과의 對話

 아들 둘, 딸 둘,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늘 부러워하는 자식 농사다.

가족계획을 한 것이 그 정도니 생기는 대로 다 낳았다면 나도 어머님처럼 열 명의 자녀는 낳았을지 모른다. 서울에서의 단칸방 살림에서 아이들 넷은 좀 무리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별 탈 없이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기 짝이 없다.

첫째딸 順澤은 내가 스물다섯 살 때인 1962년 음력으로 1월 16일 제천에서 출생했다. 내가 군에 가기 하루전날 고향집에서 혼자 해산하느라 무던히도 고생한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지만 낳자마자 뜨거운 방바닥에 볼기를 데어 울기만 했던 아이가 시집가 남매를 낳은 중년 부인이 다돼가니 세월이 流水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엄마를 따라 서울로 온 그때의 나이가 네 살, 엄마를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유치원은커녕 단칸 사글세 방 책상 밑에서 다리도 제대로 못 뻗고 자야만했던 큰딸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부모 잘못만난 서러움밖에 기억할 것이 없어 보인다.

돌 사진하나 없는 것이 그렇고 휴가 나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고작인 것은 아내의 시집살이와 함께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금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숙명여중에 추첨 입학해 성적은 중상위권을 맴돌았으나 엄마를 닮아 억척이었다고나 할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으로 그만큼 사는 것 같다. 고등학교는 실업계고등학교를 나오면 대학입학 때 가산점을 받는다는 제도를 믿고 상업학교를 보낸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진로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여상은 실력이 좀 모자란 것 같아 응시를 포기하고 멀리 버스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해성여상을 보내야했던 부모마음은 지금도 안쓰러울 뿐이다. 결석 한번 안하고 열심히 다녔고 졸업 때는 성적이 좋아 조흥은행에 무시험 추천으로 입사하는 행운도 얻었으니 대학을 진학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당장은 어찌나 대견스러웠던지 자랑스럽기만 했다.

의젓한 행원이 되어 출근하며 대학등록금 걱정을 덜어준 큰딸 순택에 대한 내 마음은 항상 고맙고 미안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코흘리개 어린동생을 업고 숙제를 하며 엄마 심부름도 곧잘 했다. 4남매의 맏이라서 그런지 참을성도 남다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갈현동으로 이사를 와서 두형제가 같이 쓰도록 방을 배려했을 때 그렇게도 좋아하던 모습을 보며 기뻐했던 부모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남에게 셋방을 내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각각 방하 나씩을 줄수 있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했으니 어쩌겠는가. 응암동에서 海成女商을 다니느라고 고생도 많았겠지만 불평한마디 없이 따라준 큰딸 순택, 취직을 하고 첫 월급을 타서 내복을 사다 줄때 우리 두 내외는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조흥은행에 들어가서는 지금의 큰사위 金京寧군과 연애를 하고 있었음을 까맣게 몰랐으니 천생연분은 따로 있는가보다. 군에 간애인 면회를 못 가게 말린 일은 부모 마음에 아직은 이르다는 판단 때문이었지만 사위는 그때의 섭섭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눈치다. 정혼한 사이도 아닌 처지에 덮어놓고 전방까지 면회를 가게 할 부모는 흔치 않을 것이다.

큰딸 결혼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아내와 함께 사위될 사람의 집을 몰래 보러 가서 실망하고 돌아온 일은 부끄럽기도 하고 차라리 안 가본 것만 같지 못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심 못지않은 번화가로 바뀌었지만 그때의 사당동은 전형적인 달동네로 유명했다. 그러니 부모마음이 어떠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다.

그 후 사윗감을 자세히 보겠다고 조흥은행 근처로 갔다가 민방위 시간에 걸려 지하도로 대피하고 있던 중 바로 코앞에서 사윗감을 보고 왔다는 아내가 '사람하나는 야무지게 생겼다''고 안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당당히 집으로 찾아와 청혼을 했다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나도 그 정도면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딸의 의견을 존중해서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양가부모가 정식으로 만나고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동분서주하며 혼수를 장만하던 아내와 시집을 간다고 좋아하던 큰딸 순택, 결혼식장은  하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궁전 예식장 4층 특실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는데 우리 집 하객이 하도 많이 와서 신궁전 예식장 주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비아냥거린 친구도 있었다.

큰딸 순택은 어쩌면 제 엄마를 꼭 빼닮은 억척스런 주부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이후 억척스럽게 살림을 일구고 사는 모습이 그렇고 여러 남매를 둔 彦陽 金氏 집안 맏며느리로 들어가 그런대로 자기 임무를 대가 없이 수행하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현모양처 스타일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집안의 화합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마음씨도 칭찬해 줄만하다.

동생들 문제를 세심하게 챙기고 카운슬러를 자청하면서 가정 평화를 생각하는 그 마음씨가 변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맏사위 경령은 彦陽金씨 가문의 장남으로 근면 성실하기 이를 데 없다. 집을 장만하느라 고생고생 했던 모습이 눈에 밟히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던가 지금은 일산 단독주택단지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산다. 장남으로 태어나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씨 또한 고와서 듣기로는 형제들 간의 우애가 남다르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成姬 成勳 남매를 둔 아버지로서의 자상함도 지금보기엔 후한 점수를 주어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은행원으로 몸에 벤 친절미라든지 매사에 빈틈없는 성격은 청구성심병원 선친 빈소에서의 손님접대때 내 맏사위 노릇을 톡톡히 해냄으로써 더욱 돋보였다. 조흥은행에서 신한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뒤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을 나온 성실성과 근면성을 보며 정말 장래가 촉망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둘째딸 喜澤은 어떤가. 한마디로 시집가 열심히 살고 있는 두 남매의 어머니로 볼 때마다 명랑해 보여 기분이 좋다. 어릴 때부터 재롱이 많아 내 기억으로는 가장 귀염둥이로 자란 아이로 생각된다. 갓 돌 지난 아이 답지 않게 노래를 한두 번만 불러줘도 발음은 정확치 않았지만 곡은 분명하게 읊을 정도로 머리가 총명했다. 

현저동 창고 뒤 썰렁한 집에서 태어나 툭하면 마루에서 굴러 떨어지곤 했지만 좀처럼 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참을성도 있었고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 명랑한 성격 탓으로 귀염을 독차지했는지 모른다. 공부도 반에서 10등 이내는 들었고 초등학교 때는 매년 우등상장을 받아와 우리 두 내외를 기쁘게 했던 그가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유달리 눈물을 많이 흘린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마음이 여려서일까,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운운의 졸업식 노래에 눈물을 마구 흘렸던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이 주마등 같이 떠올라 손수건을 꺼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진명여중에 추첨으로 배정돼 졸업 후에는 갈현동 선일여고에 입학, 3년을 열심히 다니고 외국어대학교 불어 불문학과를 나와 첫 직장 제일투자금융에 입사하기까지 정말 탈 없이 자라준 것이 고마울 뿐이다.

金秀明군을 둘째사위로 맞게 된 사연도 회고하면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물론 희택으로부터 언질은 받은 상황이었지만(배우자로 선택할 것을 결심한 상태를 말함) 언제 한번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회가 왔다. 서등출판사 李在宣 사장 사모님과는 금융 거래상 안면이 있었던 김 군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이재선 사장 사모님과 짜고 김 군을 불러내되 신랑감을 찾는 좋은 분이 있으니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고 서등에 온 김 군을 만난시간은 바로 저녁시간이 가까운 때였다. 수인사정도를 나누고 바로 利馬빌딩 지하 화식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사람 됨됨을 나름대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자리를 솔선 해 마련해주신 친구 이재선 사모님 덕분임을 항상 고맙게 여기며 사실상 중매쟁이 노릇을 톡톡히 해주신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그 후 집에 정식으로 김 군을 초대해서 아내도 상면을 했고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모든 일을 딸과 상의해 추진하는 아내의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사돈댁이 마산이었던 관계로 마산으로 가서 양가의 상견례를 가졌고 뒷일은 사위 김 군이 알아서 처리해주니 태극당을 예식장으로 잡는 일에서부터 신혼여행을 마칠 때까지 모든 행사가 일사천리로 마무리된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도 보통은 아닌 듯싶다. 친구가 상무로 있는 제일투자금융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다기에 특별히 부탁을 해 시험을 본 희택을 직접 테스트한 사람이 김 군이었고 어쩌면 처음 입사할 때부터 점을 찍은 것은 아닌지 사람의 연분이란 이런 것인가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짓곤 한다. 김해김씨 집안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혼자 고학을 하며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제일투자금융에 공채로 입사하기까지 고생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생각이 반듯하고 매사에 실수가 없는 모범사원으로 사내에서 인기가 있었던 청년이 내 딸에게 마음이 쏠린 자체가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만남이 아닐까. 노총각이긴 해도 마음에 드는 청년이다. 역시 자수성가한 청년답게 기회를 잘 포착하면서 배운 대로 자기책임을 다하고 있어 마음 든든하다. 어느새 경민, 현진 남매를 낳아 의젓한 엄마가 된 희택, 둘째 딸로서의 그가 김씨 가문의 맏며느리로 제할 도리를 끝가지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큰 아들 義澤은 어릴 때 유난히 약했다. 나를 닮아서인지 약하디 약한 왜소한 체구에다 성격은 차분하달까 그리 보채는 성격이 아닌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제천집 골방에서 외출 나온 나를 반기기나 하듯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태어난 의택이 엄마 등에 업혀 서울로 온 것은 1965년 초봄이었다. 위로 누나인 순택과 장교수님댁 서재에서 살림을 차린 부모를 따라 서울에와 구경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자란 아이였다.

초등학교는 그때 새로 개교한 독립문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동회에 부탁해 어렵게 입교시킨 기억이 난다. 주민등록 주소를 옮겨가며 이 학교에 배정받기를 원했던 것은 신설학교라서 공부를 좀 잘가르칠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성격을 좀 활달하게 키웠으면 해서 웅변연습도 시켜 상도 받는 경험을 쌓게 한 일이라든지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몸이 약하다고 4남매중 보약이란 보약은 제일 많이 먹고 자란 탓인지 지금은 제법 몸매가 나 보기에 좋다.

중학교는 중동중학을 나왔으나 갈현동으로 이사 와서는 숭실고등학교에 배정돼 3년을 마쳤다. 성적은 반에서 상위권, 학력고사 성적은 268점이었던가, 당시의 수준으로는 고려대학교 자연계는 갈수 있는 성적이었다. 주말마다 새벽같이 목욕을 하고 문수사에 올라 기도드린 아내의 정성도 허사, 낙방의 고배를 마시니 불가피하게 재수를 하게 된다. 광운대학교 전자공학과엔 무시험 입학이 허용됐지만 마다하고 종로학원에서 1년간 재수, 다음해 264점으로 서강대학교 화학과에 입학, 수난의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내가 의택의 대학생활을 수난의 연속이었다고 보는 것은 2학년 때부터 우리 두 내외를 가슴 조리게 한 학생데모 때문이다. 84학번을 가진 대학생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겠지만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거센 파고 앞에 많은 학생들이 고뇌에찬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은 내 아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야 마음을 놓고 잠자리에 들었으며 하루도 긴장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초조해 했던 기억이 새롭지만 문제는 재학 중 군 입대를 희망한 나와 졸업 후 입대하겠다는 의택과의 갈등이 심화 되면서 비롯됐다. 극심한 학생데모의 대열에서 잠시 떨어져 있게 하자는 나의 충정과 군 입대를 하면 동료 학생들과 계획한 모든 민주화 투쟁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의택의 시국관 사이에서 증폭된 갈등은 내가 충북병무청에 일방적으로 자원입대 신청을 내면서 절정에 달했다.

1986년 그러니까 3학년 1학기 기말시험이 끝날 무렵 입영영장을 받은 의택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군 입대를 기피하고 집을 나가는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혹시나 증평 예비사단으로 바로 오지 않을까 해서 하루 종일 그곳에서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그때의 내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꼼짝없이 기피자로 몰려 수배당하는 범법자를 만들 뻔했던 내가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찌하겠는가. 그 후 병무청 병무담당자에게 통사정을 해 그 일이 원만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준 것이 미안했던지 그로부터 얼마 뒤 장문의 편지는 받았으나 행방은 묘연했고 우리 두 내외가 백방으로 수소문해 가며 찾아 다녔던 일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딸 희택으로 부터 오빠를 마장동 터미널 부근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아 의택을 귀가 시킨 극적인 순간 역시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그날이 바로 建大사건이 터지던 전날이었고 의택 역시 그 현장에 임무를 띄고 있었음이 확인돼 온갖 수단을 동원해 붙들어 둔 결과 참혹한 꼴을 면하지 않았나 싶어 지금도 다행함을 느낀다. 한창때 젊은 혈기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데모현장에서 분신자살을 마다 않은 학생들이 있었기에 민주화의 서광이 비칠 수 있었음을 모르지 않는 우리들, 그 시대 대학생 자식을 둔 많은 부모들이 겪어야했던 애환, 그 한 중심에 우리 두 내외가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꿈만 같다.

1986년 학생데모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의택이 집을 뛰쳐나가 나에게 한 편지를 내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버님전 상서(1)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고 오직 성실과 책임의식으로 살아오셨던 아버지 안녕하신지요. 저 때문에 많은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조그만 방에서 하루의 반을 책을 보면서 지나온 생활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 걱정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저 때문에 걱정하고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생각하면 심히 괴롭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와 깊은 대화 한번 못하고 소신이 없는 놈처럼, 삶에 자신이 없는 놈처럼 보여서 아버지와의 신뢰를 갖지 못했음이 저의 불찰임을 통감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버지와의 신뢰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신뢰란 제가 정말로 떳떳하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획득되리라 생각합니다. 불의한 것보다는 바른 것을 추구하고 나태함보다는 성실함을 추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속에서 정의와 민주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것이고 이속에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랑스러움이 나타나리라 느껴집니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과정으로서 자기를 비우고 他者를 위해 헌신하고 사랑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환경과 상황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시대와 역사의 주체자로서 창조적이고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환경과 상황을 변형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변형시킴이 고난이 아니라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러한 삶을 살아오셨기에 아버지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 누가 뭐라 고해도 나의 아버지는 전 생애를 진실과 성실로 주변의 조건을 새롭게 창출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근검과 절약의 정신이 아버지의 삶을 규정하기에 자랑스럽습니다.

저 또한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제 자신을 채찍질 하겠습니다. 참다운 기쁨을 갖기 위해 고난을 극복해내는 삶을 살겠습니다.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최종적으로는 승리한다는 진리가 옳음을 알면서도 현실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에 많은 사람이 진리를 포기합니다. 이들은 승리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부단한 몸짓이 전제되어야만 승리는 획득되어짐을 모르거나 승리를 향한 고난에 실천적 참여를 하길 거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승리는 이를 막고 있는 제반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부정과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진실과 정의로 싸워 나가야 함에 대한 정당성이 나타납니다.

아버지, 허위에 가득한 위선자들에 대해 진실로 맞서는 삶이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삶이라 느낍니다. 역사의 바른 방향에 서서 역사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끊임없는 과정만이 현재의 모순을 타파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는 현재의 소련과 북한의 허위가 극복되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모두가 기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해 노력함이 저의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저에 대해 너무 걱정 마시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용성 이는 공부 열심히 하도록 신경 써 주십시오. 제가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부탁드림을 용서 하세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86. 10. 10  정의택  올림


아버님전 상서(2)

 "아침에 일어나면 따사로운 햇빛이 나의 온몸을 감싸고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합니다. 길가의 돌 하나하나와 거리의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만인을 위해 살아갈 때에 진정 기쁘고 충만한 행복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조그마한 일 하나도 하지 못했던, 그리고 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안타까움만 듭니다.

어머니의 병세는 어떠한지, 차도는 있는지 걱정됩니다. 저로 인하여 얻으신 병이기에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아버지 저는 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쁨은 불행을 통해서 빛나고 정의는  불의를 극복했을 때 가치가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빛은 어둠가운데 있을 때 의미가 있음을 느껴봅니다.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편안하고 안일하고자 하는 마음은 끝없이 정의와 진리로 극복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고, 부정한 현실에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방법은 많은 사람에 의해 호도되고 오용되고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가난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기쁘고 즐거운 모습은 아니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부유하고 환대받는 사람이 되게 하기위해 우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되어야함이 진리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진정 느낄 수 없음을 아는 학생의 고뇌일 것 같아요.

아버지. 지난주에는 용성이의 생일이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축하의 마음을 느껴 봤습니다. 그리고 용성이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살길 바랍니다. 껍데기뿐인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대학가서 취직하고 부유하게 사는 삶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도움을 주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위한 진리와 참됨을 배우길 바랍니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칼을 가지고 진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게 해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86. 10. 26.  정의택 올림


 나는 이 편지를 받고 다소는 안도했으나 걱정은 태산 같았다. 끼니는 제때에 찾아먹는지, 감기는 들지 않았는지, 즈그만 방이라했는데 혹 잘못되지나 않을까. 자나 깨나 근심걱정으로 잠못이루는 아내를 보며 우리시대 우리가 당해야 하는 고통이 이런 것이었던가 싶어 한숨을 짓기도 했다. 결국 희택의 기지로 귀가한 의택, 생각다 못해 데모학생들의 선도 교화를 전담하고 있었던 동갑내기 동생 벌되는 친척에게 상의를 했더니 군에 갈 동안만이라도 데리고 있어주겠다지 않는가. 물론 의택의 동의를 얻어 결정했음을 분명히 밝혀두니 오해 없기 바란다.

때는 1986년 11월, 그곳에서 나에게 한 의택의 편지가 더욱 감동적이어서 여기 옮겨 적으니 내가 미쳐 자식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어리석음이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아버님전 상서(3)

 날마다 저 때문에 온가족과 친지 분들께서 근심과 불안 속에서 시름하고 계시다니 저 자신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많은 아저씨들께서 새로운 사실들을 깨우쳐 주시고 보살펴 주셔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으나 저 때문에 상처 받으셨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한시도 편하지 않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만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갚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가 하고자 했던 일만을 고집하고 온 집안을 고통과 파멸로 이끌었으니 어찌 저의 죄가 사해질수 있겠습니까.

별로 아는 것도 없고 책 몇 권 읽고 사물의 일면만 파악하고 부질없이 날뛰었던 것도 후회되며, 설사 옳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감정과 흥분으로 일관하여 행했던 과거가 몹시 후회스럽습니다. 특히 제가 해야 할 도리와 의무를 망각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으려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또한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도 인간과 인간사이의 정은 끊을 수 없으며 특히 부모님과 자식 간의 정은 더욱 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매를 들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는 것도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증거이며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서 하시는 행동임을 느낍니다. 며칠사이 부모님께서 제게 보여 주셨던 모습은 바로 자식사랑에 기초하셨음을 깊이 통감합니다. 함께 울기도하고 이야기도 하고 했지만 저 자신은 부모님의 뜻과 정을 너무도 모르고 철없이 굴었음을 회고해 볼 때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부모님께 용서만 빌 뿐입니다. 다시 집에 돌아가면 먼저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 성실하게 생활함은 물론이거니와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소홀했던 학과 공부와 함께 세상을 넓게 보고 아버지와 대화도 자주하면서 저의 삶을 재정립하고 싶습니다.

무모한 행동을 하면 삶을 그르침을 깊이 느꼈기에 항상 깊이 사고하고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자세를 기르겠습니다. 인생을 길게 내다보며 삶의 여유를 가지면서 먼저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차차 영역을 넓혀가야 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와 이상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기위해 노력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환경에 의해 좌우 받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환경을 인간의 삶에 유용하게 변화시키고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사람의 삶은 무미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장미빛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극복하는 가운데 희망찬 미래가 다가옴을 느끼고 여기서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 미래는 물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의 학생운동의 근본이 바로 총체적인 인간의 인간됨을 지향하고 있지만, 이를 이루려는 방법은 매우 문제가 많음을 느낍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폭력을 쓰고 싶어 하겠습니까. 학문의 전당이요 사회의 상아탑이 되어야할 현재의 대학이 대화와 타협은 차단된 채 극단으로만 달리는 것도 물론 학생들 자체의 문제가 매우 큽니다만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고 진지한 대화의 창구로 이끌지 못했던 기성세대의 잘못도 역시 있다고 봅니다.

제가 대학 3년 동안 느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현재 학생들의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주시지 못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가지고 있는 지식만을 학생에게 전달해주는 기능만 했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시는 분은 매우 적었습니다. 각 학문의 전문성이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현재 대학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에 대한 언급이 너무도 없었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주시지 않고 회피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학생이라 함은 아무 편견 없이 학문을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면서 금기시되는 사항만 강조되기에 학생 자체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편협 된 생각만 쌓였던 것 같습니다.

이념과 체제를 떠나서 올바르게 연구할 수 있는 조건과 기성세대와 대화할 수 있는 공간,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대부분은 북한 괴뢰에 대해 동조하지 않습니다. 또한 현재의 공산국가의 문제성 또한 연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은연중에 친북괴 발언이나 체제전복의 문귀가 나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하가나 체제문제로 학생들의 의견이 무조건 묵살되기에 반항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극단으로 치닫고 결국 대학가에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뒤덮는 것이고, 국민들은 여기에서 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지와 의견은 무엇인지 모르고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문제만 바라보니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학생들에게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방법은 학생들을 선도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모두가 국가를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너무 다른 양상이 펼쳐짐을 통탄합니다. 서로가 화해로서 문제를 해결하고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학생운동의 방향도 이에 토대를 두고 국민적 의식과 공감대속의 운동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국가의 주인이 모든 국민이듯이 국민 모두는 새로운 국가관으로 무장하여 발언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고 이의 기회를 넓혀가야 하리라 생각해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경제력이 상승되고 국민의식이 점점 높아지면 가능하리라 느낍니다.

저는 이제 집에 돌아가면 과거의 일면만 파악한 것을 극복하고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무모한 행동으로 가정을 파멸로 이끌지 않겠음을 맹세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부터 성실하게 생활하겠습니다. 과거의 인식부족과 무모한 행동과 감정과 흥분으로 부모님께 누를 끼쳐 드렸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화기애애한 가정의 모습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986. 11. 7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 글이다. 의택의 이 같은 생각은 아마도 그 당시 양식 있는 대다수 학생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입영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소, 주어진 복무연한을 성실히 마치고 복학하여 열심히 공부한 보람 있어 삼성종합화학 신입사원모집시험에 당당히 합격하니 아내와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논산훈련소에서 공병학교로 옮겨 후반기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일이라든지 최전방 중대에서 행정사무를 맡아보며 제대하는 날까지 매사에 모범을 보인 것은 그가 언제 부모를 애간장 태웠던가 싶어 자랑스럽다. 제천 중.고 후배이자 고향 친지인 李大勳 (국민은행)지점장의 소개로 1993년 당시 국민은행 본점 방송실에 근무 중이던 金海金씨가문 막내딸 金淑香양과 결혼해 딸 윤수를 낳고 어렵사리 집도 장만했다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두 사람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삼성종합화학 화성영업팀 정의택 대리 부인 김숙향' 명의로 社報에 실렸다기에 여기 옮겨 싣는다.


"사랑의 化身인가"

 "정말 미안한데요. 눈이 너무 아파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하겠습니다. 말끝도 채 잇지 못한 그이는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자 앞에서, 93년 4월, 봄의 불청객 꽃가루가 그이와 나를 잇게 한 사랑의 화신이 될 줄이야!

나의 직장 상사인 은행 지점장님과 시아버님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기로 한날, 그이는 그만 유행성 결막염 최절 정기에 있었던 것이다.

첫 만남, 여자라면 남자에게 잘 보이기에 정신이 없을 텐데,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심한 눈병으로 아파하는 그이가 왜 그리도 걱정이 되던지, 연민이랄까(?) 어쨌든 그날, 식사도 채 마치지 못하고 전화번호만 서로 교환한 채 헤어졌는데.

어느 날, 눈병이 다 나았다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회복됐다는 말이 왜 그리 반갑던지, 우리는 그렇게 사랑의 화신인 눈병으로 인해 애틋한 사랑을 만발하기 시작했다.

"숙향이가 날 좋아하는 것 보다 내가 항상 더 많이 사랑할거야"

"의택씨, 나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모든게 다 좋아"

"그래도 뭐 있을 거 아니예요?"

"숙향이는 사람을 볼 때 조건을 달아서 좋아해?"

" 아니요 "

" 난 숙향이의 모든 것이 좋아. 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으와 또 감동이다)

그 후 은행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던 난 그이를 만난 이후로 우리의 사랑 얘기가 음악 방송 프로에 소재거리로 등장하곤 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랑을 하고픈 그런 계절, 봄이 한창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을 좋아 할 때는 조건이 있어서는 안된다구요. 사랑의 계절인 이 봄에 연인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넌지시 건네 보시죠.

음악 띄워 드립니다.…"

이처럼 그이는 내 생활 전부가 됐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결혼은, 매일 집 앞에서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 보다는 보고 싶을 때 언제나 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해 가을, 우리는 100번의 만남을 기록하며 6개월 만에 결혼하게 됐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결혼하기 보름 전쯤 그 불청객 눈병이 이번엔 나에게 닥친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친정식구와 시댁식구는 모두 비상이었다. 예비신부가 결혼 전에 눈병으로 양쪽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으며 결혼 날까지 다 나을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또 가족들마저 옮겨갈까 안절부절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눈병은 친정식구들 모두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고 이상하게도 매일 만나는 그이에게는 도무지 전염되지 않았다. 눈병으로 인해 연민이 사랑으로 변해 결혼하게 됐는데 바로 결혼 전에 이젠 내가 눈병을 앓게 되다니! 그이는 매일 밤을 기도했다. "결혼 날까지 예쁜 눈으로 돌려주십시오" 그이의 정성과 사랑으로 내눈은 결혼날 새벽 회복됐고 신혼여행에서까지 안약을 계속 넣어야만했다.

그 후로 우리에게 지금까지 눈병은 찾아들지 않았으며 이상한 조짐만 있어도 즉시 안약을 쓰곤 한다.

그이는 결혼해서도 연애시절처럼 다정했고 변함이 없었다. 물론 사랑다툼으로 결혼은 환상이 아님을 깨닫긴 했지만.

올 2월말, 우리의 보배 정박사(정윤수)의 탄생으로 결혼생활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여자는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되고 결혼해서도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다고 했던가. 난 그 말을 내 나름대로 깊이 이해했고 시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됐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게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아이를 돌보면서 인내와 포용을 배웠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자신 있고 멋진 엄마가 되고 싶다.

물론 사랑받는 아내 역할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부모님께 현명한 며느리가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머니 아버지께 잘하는 게 나한테 잘하는 거야" 항상 남편이 하는 말이다. 그이는 부모님을 끔찍이 생각하면서도 그걸 겉으로 표현하길 쑥스러워한다. 그래서 그 역할은 내가 대신하는 편이다.

1년여 단둘만의 신혼생활을 거쳐 지금은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생활의 지혜를 많이 배우게 된다.

권위 보다는 자상함과 유모로 가정의 웃음을 자아내시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아버님, 한 끼의 식사해결보다는 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고자 과감히 다이어트를 감행하시는 영원한 미의 소유자 어머님. 살다보면 힘들고 괴로운 일이 더 많은 거라며 항상 좋은 일만 생각하고 생활하자는 어머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루 동안별일 없이 지낸 것에 감사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려고 한다.

바램이 있다면 가족의 건강이 최우선이며 특히 우리 시부모님과 오래도록 함께 살고 싶다. 또 집에서 대왕마마처럼 대접받아야 밖에서도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이를 잘 내조해 회사에서 한 몫을 당당히 해내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사랑도 좀 더 성숙됐으면 한다. 문득 그이와 함께 봤던 영화 '은밀한 유혹" 중에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의 대화가 생각난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아니" "사랑해" "아직도" "항상" (글 김숙향; 화성영업팀 정의택 대리부인)


 큰 며느리의 이글을 읽으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말 그대로 '인내와 포용' '생활의 지혜'를 배웠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 '현명한 며느리' '시부모와 오래도록 같이 살고 싶다'는 큰 며느리의 말이 빈말이 아니기를 바라고 싶다. 큰 아들 의택이 우리 집안  6대 종손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느냐의 여부도 큰며느리의 내조에 달렸다는 나의 생각에 큰애가 얼마나 부응해 줄지 기대가 크다.

약혼을 하고 병석에 누운 사돈을 제천에서 만났을 때 내손을 꼭 잡고 딸을 부탁하던 사돈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장충동 어느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다음날 친정아버님의 부음을 받고 애통해 하던 큰며느리 김숙향, 그 불타는 향학열만큼이나 생활력이 강한 주부로 우리 집 宗婦역할을 손색없이 수행해주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酒量이 약한 의택이 술 때문에 저지른 실수는 그가 아직 철이 덜 든 탓으로 치부해 두고 싶다. 자식이라고 편애해서가 아니라 원래 심성은 곱지 않았던가.

어릴 때 거지 그림을 보고 불쌍하다고 엉엉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커서는 자기에게 돌아온 아르바이트 자리를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선 듯 양보할 정도로 동정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술이 좀 약한 것이 흠이라면 큰 흠이지만 취중광언 성후회(醉中狂言 醒後悔)라는 성현 말씀대로 술 취해 저지른 잘못을 술 깨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아예 술을 끊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램이다.

둘째 아들  澤은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고생을 모르고 자라지 않았나 생각된다. 1969년 당시 인왕회관에서 태어나 내손으로 태를 갔다 버린 기억이 새롭지만 과묵한 성격에다 때로 막내답지 않은 심성과 씀씀이가 대견스럽게 느껴지곤 해 마음이 흐뭇하다. 녹번초등학교와    영락중학을 나와 갈현동으로 이사 와서 대성고등학교에 배정된 것을 기뻐한 것은 이학교가 강북의 명문고로 세칭 일류대학에 많은 학생들을 진학시켰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성적은 중상위권을 맴돌았지만 국민학교때는 우등상장도 심심찮게 들고 왔다. 평소에 말이 없고 성실해 말썽부린 기억도 없는 착하디착한 아이로 자라 누나들의 사랑도 남달랐던 것 같다. 대학진학때도 학교의 진학지도대로 따라주어서인지는 실력대로 일류대학엔 좀 못 미치지만 동국대학교 물리학과에 들어간 것은 지금의 반려자를 만난 결과로 볼 때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재학 중 성적도 좋아 수업료 면제의 혜택도 받아 보았으며 졸업 후엔 국내 굴지의 대우그룹산하 대우통신 신입사원 채용시험에 응시, 당당히 합격해 취직걱정까지 덜어주니 정말 귀염둥이 막내로 칭찬 받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위로 형이 장가들어 살림을 나고 두 누이 또한 출가한 뒤로 세 식구가 함께 지내며 남다른 정서를 느낀 때문인지 안부 전화도 자주해주어 외롭지 않다. 밀양 박 씨 집안 둘째 딸, 같은 학과 후배 朴姜姬를 배우자로 맞았으니 이상적인 만남일까. 연애를 할 때부터 신중했고 부모의 허락을 얻어 내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을 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내가 아가 방을 차렸을 때는 친구 들을 데려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분장시킨 일화도 나에겐 지울 수 없는 추억이다.

며느리 박강희, 키는 작지만 듬직함이 마음에 든다고 한 아내의 말에 공감이 간다. 친정 오빠의 타계로 얼마나 상심했을 지, 사돈내외의 시름도 시름이려니와 아직 어린나이에 인생의 무상함을 맛보아야 했던 며느리에게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큰아들이나 작은 아들이나 아들은 똑같다고 무리해서 방을 얻어 살림을 차려주느라 동분서주하던 아내의 자식사랑, 아들보다 며느리가 더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 된 자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대우통신이 구조조정으로 어수선할 때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하던 우택이 첫딸 현수를 낳고 엘지(LG)정보통신에 스카웃돼 다니는 것을 보면 더욱 대견한 마음이 든다. 끝까지 화목한 가정, 동기간의 우애는 물론, 직장에서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모범 가장, 모범직장인으로 항상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살아가 주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니 아이들 4남매를 낳으면서 아내가 미역국을 제대로 얻어먹은 기억도 없어 보인다. 둘째딸 희택이 때는 대학친구 朴泰祚군이 제주도 고향에서 미역을 보내와 포식을 한일은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하는 고마움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한 아이도 돌잔치를 제대로 차려준 기억도 없다. 그런 미안함으로 우리 두내외는 일요일 틈을 내어 창경원과 남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이 큰 기쁨이었으나 기저귀 가방을 든체 엎고 안고 걸리고 남산에서 사진을 찍어주다 어렵게 마련한 일제 카메라를 소매치기 당한 적도 있어 입맛이 쓰다.

스승의 날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담임선생님을 찾아 인사드리는 일을 빼놓지 않았던 아내, 대학 공부를 못시킨 순택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내가 고생고생 하며 대학을 졸업시켜 짝을 지어주기까지의 정성이 오늘의 4남매를 있게 한 초석이었음을 또한 높이 평가해주고 싶다.


2.  고향  有情

자랑스런 義兵의 고장

 忠北 堤川市 錦城面 月林里, 바로 내가 태어난 마을이다. 뒤로는 桂香山이 우뚝 서 있고 멀리 동남쪽으로 산자수명하기로 유명한 錦繡山이 가슴에 와 닿는 곳  迎日鄭씨 집성촌이다. 3백여 년 전 나의 10대조 文節公 휘 瀁(태백 5현중 한분)께서 이곳으로 오셔서 정착하신 것이 대대로 뿌리를 내리게 된 내력으로 알려져 있다. 월림鄭씨로 불려질 정도로 이곳 월림리는 정씨집안이 누대를 살아 왔지만 지금은 거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요즘은 여러 성씨들이 고루 상부상조 하며 살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중앙고속도로가 마을 동구 밖을 가로 질러 별로 부대 효과를 기대 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인근에 남 제천 인터 첸지가 있어 서울로 통하는 길은 훨씬 수월해 졌다.

60년대에 축조한 저수지가 농업용수를 충분히 공급해줘 비교적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마을은 인심 좋기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온 동네가 상부상조하며 농사일을 돕고 추수가 끝나고 10월 상달이면 산제를 올리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던 풍습은 나의 성장기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풍년을 빌던 농악놀이, 나보다 대여섯 살 연상이었던 청년들이 연극을 꾸며 관람시켜 동네사람들을 기쁘게 한 일이라든지 농촌 문학지 '계봉'을 엮으며 겨울이면 사랑방에 모여 앉아 시국을 담론하던 추억은 오래두고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복남이의 설음' 이란 연극을 꾸며 공연할 때 내가 그 복남이 역을 멋지게 해내 화제가 됐던 기억도 새롭다.

마을은 그렇다 치고 제천은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조선조 肅宗때 尤庵 宋時烈의 수제자였던 수암 權尙夏가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고 구한말엔 의암 柳寅錫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봉기 했던 곳이 바로 제천이다.

제천은 남한 땅의 등뼈라고 볼 수 있는 태백산맥이 소백과 차령의 두 줄기로 갈라지는 그 겨드랑이쯤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쪽 백운면과 봉양읍의 경계를 이루는 천등산 박달재는 예부터 봇짐장수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이 '울고 넘는 박달재'에서 고려시대에는 10만의 거란군을 물리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을 아는 이는 그리 많치 않은 것 같다.

해발 1천 93미터에 이르는 국립공원 월악산은 한수면의 덕주사에서부터 덕산면의 신륵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경관이 많을 뿐만 아니라 골짜기 마다 유서 깊은 유적지가 숨어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였던 마의태자의 누나인 덕주공주가 창건했다는 덕주사와 그 뒤 켠 바위벽에 새겨진 불상, 덕주산성, 신륵사 삼층 석탑 등이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옛 모습을 전해준다. 충주댐이 완공된 이후 월악산의 8경과 이웃한 수안보 온천, 단양 8경등 지를 배를 타고 관광할 수 있게 된 것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제천은 삼한시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3대 수리시설로 꼽혔던 의림지를 안고 있어 예로부터 풍요로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詩心은 의림지의 맑은 물과 같다'고 한 시인도 있지만 의림지는 신라 때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그 풍광에 심취했던 곳으로 이름나 있기도 하다. 제천은 특히 의림지와 함께 조선조 생육신 원효의 충절을 기려 세운 관란정(송학면), 대원군의 서슬퍼런 박해에 쫓겨 목숨 걸고 찾아든 천주교 베른 성지(봉양면 구학리),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 총대장으로 봉기했던 유학자 유인석을 기리는 자양성당으로 유명하다.

유인석의 뒤를 이어 이강년, 정운경, 원용팔 같은 이가 줄기차게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제천에서 활약한 의사나 열사들의 수가 5백 명도 넘는다는 기록을 보면 제천 사람들이 얼마나 쎄게 왜군과 싸움을 벌였는지 알만하다. 그래서 일제는 제천 의병이라면 더욱 더 이를 갈고 쳐들어와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80년 市로 승격한 제천은 또 강원도의 가까운 지역들인 영월 정선 평창군까지도 생활권에 포함될 정도로 교통의 중심지로, 북쪽으로는 世明大學校가 자리해 제천사람의 자존심을 한층 북돋아 준다.

도하 각지가 제천을 소개할 때마다 '義兵의 고장 제천'을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제천인의 자부와 긍지로 통한다. 이런 제천에서 자란 나의 이름도 빠지지 않고 거명되는 것은 내가 언론계 인사로는 비교적 知名度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물 언론인 千寬宇씨가 제천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손꼽히지만 제천출신 언론인을 소개할 때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이었던 나를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은 영광이라기보다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萬古不朽의 명작 訓民歌

 迎日鄭씨는 크게 보아 신라 때 간관(諫官)을 지낸 정종은(鄭宗殷)을 시조로 하여 고려 때 벼슬 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와 역시 고려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로 나누어진다. 지주사공파는 포은(抱隱) 정몽주(鄭夢周)를, 감무공파에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각각 배출하여 이들 두 분이 종파를 대별해 주는 기둥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송강은 바로 나의 12대조이시다. 송강자손들이 남다른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은 송강 할아버님의 명성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송강 정철 선생은 정치인으로 보다는 국문학의 귀중한 자료를 남긴 문인으로 더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시문학의 대가로, 가사문학의 거성으로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 국민이 추앙하는 인물이시니 자손 된 한사람으로 어찌 자랑스럽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자손대대로 삼가 높으신 유덕을 기리고자 여기 송강선조의 생애와 문학에 관해 적으니 이 또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선조께서는 1536년(중종 31년)에 나시어 1593년 (선조 26년)에 돌아 가셨다. 자는 계함(季函), 호는 송강, 부친은 돈녕부판관(敦領府判官) 유침(惟 )이시며 조부는 정위(鄭 )이시다. 증조인 정자숙(鄭自淑)은 김제군수를, 고조인 정연(鄭淵)은 병조판서를 지내셨으며 5대조 정홍(鄭洪)은 시호가 공간(恭簡)이고 6대조는 대제학을 역임하신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이시다. 뒷날  증조는 이조판서, 조부는 좌찬성(左贊成), 부친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셨다.

송강은 대대로 청백의 가풍을 이어왔는데 특히 부친 정유침(鄭惟 )은 효행과 우애로 유명하셨다. 어머님 죽산안(竹山安氏)씨 역시 효행이 대단하셔서 외조부인 대간공(大諫公) 팽수(澎壽)는 매양 칭찬하기를 '내 딸의 효행은 열 아들 못지않다'고 한 기록이 있다.

4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나신 송강의 가계를 보면 맏형인 자(滋)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지만,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로 인해 경원으로 장류(杖流)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 하셨고 둘째 형인 소(沼)는 을사사화에 실의하여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은거 하신다. 셋째 형인 황(滉)은 명종조(明宗朝)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에 음보되었다가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된다.

세분의 누님 중 맏누님은 인조의 귀인(貴人)이 되고 둘째 누님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崔弘渡(최홍도)의 부인이 되며 막내 누님은 종실인 계림군(桂林君) 유(溜)에 출가 한다. 그런데 계림군 유가 무고에 의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송강 일가는 참혹한 화를 입게 된다. 부친 유침께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남방으로 유락된 것은 송강께서 열살 때이다.  관북, 정평. 연일등 유배지를 따라 다니신 것도 이때다.

1551년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시자 그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 할 때 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奇大升(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우셨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같은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문화 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고 진주 유씨(晉州柳氏)를 측실로 두시니 슬하에 적출소생 4남 3녀와 측실소생 1남1녀 등 5남 4녀를 두셨다. 문화 유씨 강항의 딸과 혼인함에 따라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처외숙으로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처외재당숙으로 된다.

적출 4남중 큰아들 기명(起溟, 화곡공)은 진사로서 31세에 일찍 세상을 뜨고 둘째 아들 종명(宗溟, 강릉공)은 문과에 장원하여 강릉부사를 지냈는데 형제 중 후손이 가장 번창하신 나의 11대조가 되신다. 셋째 아들인 진명(振溟, 운봉공)은 진사로서 벼슬에 나가지는 않지만 독서는 그치지 않은 것으로 전하며 넷째 아들 홍명(弘溟, 기암공)은 문과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형제들 중에서 가장 학문과 벼슬이 높았다.

세딸중 큰딸은 이기목(李基穆)에게 출가했지만 일찍 세상을 떴고 둘째 딸은 최오(崔澳)에게 출가 했으나 일찍 과부가 된지 10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셋째 딸은 목사(牧使) 林檜(임희)에게 출가하는데 임회는 을사사화때 화를 입은 금호(錦湖) 임사수(林士遂)의 조카이다.

서출 1남 1녀중 아들 지명(之溟)은 함흥에 살았다고 하지만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딸은 무사인 권경(權暻)의 첩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뜬 것으로 돼있다.

여기서 잠간 을사사화등 당시의 정치상황을 살펴봄으로서 송강께서 어린 시절 집안전체가 곤경을 치러야 했던 사연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중종(中宗)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 씨에게서 인종(仁宗)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 씨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은바 있다. 1545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를 하게 되자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이 크게 득세한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명종이 즉위하게 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소윤)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윤임(尹任,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화옥(禍獄)을 일으킨다. 이를 일컬어 乙巳士禍(을사사화)라고 하는데 이때 윤임의 생질이며 송강의 매부인 계림군도 역모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된다. 따라서 계림군의 처가인 송강 일가는 을사사화의 소용들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을사사화로 아버지 유침은 관북의 정평으로, 당시 이조정랑이었던 맏형 자는 광양으로 유배된다.

2년 후인 명종 2년 (1547년 송강 12세) 9월에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일어나면서 송강의 일가는 또 한 차례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정미사화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전라도 양제역에서 조정을 비난하는 벽서를 발견하며 비롯된다. 이를 기화로 아직도 을사년 역모의 뿌리가 남았다고 하여 다시금 화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친은 잡히어 구금이 되었다가 영일로 귀양을 가고, 맏형 또한 잡히어 구금이 되었는데 끝내는 매를 맞고 유배도중에 타계한다. 둘째형은 대과를 준비하던 중 통분과 환멸 끝에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은둔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송강은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 1등을 하셨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첫 벼슬은 사헌부(司憲府) 지평, 이어 좌랑, 현감, 전적, 도사를 거쳐 31세에 이르러 정랑, 직강, 헌납에 이르신다. 후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내신 뒤 32세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신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시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으셨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가셨다. 이어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 하셨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都承旨).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진하셨다가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셨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사직, 고향인 창평 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등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시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등을 다스리신다. 다음에 좌의정(좌의정)으로 오르셨고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로 건저(建저)문제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계락에 빠져 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염을 사서 파직당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진주로 강계로 이배되셨다.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셨다. 다시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 하시다가 1593년 12월 18일 향년 58세를 일기로 서거 하셨다.

처음은 고양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진천으로 옮겼다.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編)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고 전자는 1894년(고종31)에 간행한 것이 전하고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 의성본, 관록본, 성주본, 관서본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으나 그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일부만 전한다. 또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가 있으며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 별사에 제향 되셨다.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시다.

비문에 쓰인 송강선조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수충익모(輸忠翼謨) 광국추충(光國推忠) 분의협책(奮義協策) 평난공신(平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光輔國崇錄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영 경연사(兼領 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공(鄭公)신도비명(神道碑銘)

1994년 송강 선조 돌아가신지 4백년, 이해 4월 5일을 기해 대대적으로 추모행사를 가지니 추모행사 집행위원(종친회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그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한 일은 여간 보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송강선조께서 지으신 訓民歌는 만고불후의 명작이다. 그 몇 수를 옮겨 적으니 자자손손 좌우명으로 삼았으면 한다.


松江 鄭澈선생 訓民歌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끝없는 은덕을 어이 다해 갚으리까


어버이 살아 신제 섬길 일은 다하여라

돌아가신 후에 애통한들 무엇 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라

뉘손에 태여 났길래 모양조차 꼭 같은가

한 젖 먹고 자랐으니 딴마음 먹지마라


한 몸을 둘에 나눠 부부로 태내시니

살았을 때 함께 늙고 죽으면 같이 간다

어디서 망녕의 것이 눈 흘기려 하는가


아!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할꼬

아! 저 아저씨 옷 없이 어찌할꼬

험한 일 다 말하여라 도와주려 하노라


이 고진 저 늙으니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으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서럽다 하거늘 짐을 조차지실까


오늘도 날이 샜다 호미 메고 가자꾸나

내 논 다 매 며는 네 논 좀 매어 주마

올 길에 뽕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꾸나


비록 못 입어도 남의 옷을 빼앗지 마라

비록 못 먹어도 남의 밥을 빌리지 마라

한때도 때 묻어 지면 다시 씻기 어려우리라


이제 송강 선조 이후의 世系를 나를 중심으로 상고해 보고자 한다.

 나의 12대조이신 송강께서 적실 소생으로 4남 3녀를 두셨다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다. 송강의 아드님 4형제 중 나의 직대조는 둘째이신 강릉공(江陵公) 휘 종명(宗溟)이시다. 강릉공은 아드님을 7형제를 두셨는데 나는 넷째 아드님이신 문절공 (文節公 )휘(諱) 양(瀁), 호(號) 포옹(抱翁; 태백 5현의 한분)의 직손이다.

삼가 상고하건데 문절공께서는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우암(尤庵), 동춘(同春)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혔으며 서기 1636년(병자)에 북병(北兵) 오랑캐가 침범하자 초야에서 구차히 살수 없다고 가족을 이끌고 강도에 들어갔으나 성이 이미 함락되자 중형의 부처가 먼저 해를 당함에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할 즈음 다시 적을 만나 세 차례나 자문(自刎)하여 쓰러지셨지만 무사하셨고 다시 적의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이 잘 안보이시는 변을 당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가 북병에 온통 유린되자 이를 통분히 여긴 나머지 삼척 땅 산중으로 들어가서 나물을 캐고 도토리를 주어 생활하면서 주자의 글을 더욱 연구하였다. 은거한지 9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 되었으나 벼슬에 나서지 않으려하자 계부(季父) 기암공(畸菴公)의 명으로 억지로 취직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역임하였다.

용안현감(龍安縣監)으로 나가 있을 때 방백이 공에게 북방에서 보내온 사령문서를 반포하라는 임무를 맡김에 이를 거부한 뒤 벼슬을 내놓고 돌아갔다가 뒤에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어 학교를 설치하여 생도를 가르쳤으며 체임된 뒤에는 태백산 도심리에 집을 장만하고 서책 만권을 장치해 읽으며 은둔생활을 마다 않으셨다.

이때 문절공과 함께 은둔 생활을 한분을 후세에 태백 5현이라 일컬으니 나머지 네 분은 홍두곡 우정(洪杜谷 宇定), 강잠은 흡(姜簪隱 恰), 홍 손우당 석(洪 孫宇堂 錫), 심각금당 장세(沈覺今堂 長世)이시다.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 진천현감에 오르셨다가 현종원년 경자 1660년에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옮기었으며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됨에 네 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간성군수로 재임 시는 선세(船稅) 견감( 減)으로 칭송이 자자했고 시강원(侍講院) 진선(進善) 상의원정(尙衣院正)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으셨다. 무신년 서기 1668년 5월 13일에 졸하심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셨다.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간행하시고 율곡(栗谷) 우계(牛溪) 양선생의 년보를 판각하셨다.

공의 아드님 보연(普衍)공은 나의 9대조로 재질이 아주 뛰어났으나 일찍 돌아가니 세상에서 일컫는 태백산인공(太白山人公)이시다. 8대조는 정랑공(正郞公) 휘는 천( )이시고 호는 첨의당(瞻依堂) 공조정랑(工曺正郞)을 역임하셨으며 7대조 도사공(都事公)은 4형제분의 맏아드님으로 휘는 태하(泰河),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시어 벼슬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셨다.

6대조 휘는 영(榮)이시고 삼형제중 막내시며 역시 아드님 3형제를 두셨는데 나의 직대 5대조는 3형제 중 둘째아드님 휘 지환(志煥)이시니 내가 이분의 종손으로 지금 시제를 모신다.

5대조 휘 지환께서 휘 재학(在鶴. 고조고)을 낳으시고 고조 재학께서 3형제를 두셨으나 맏아드님 휘 숙(潚, 증조고)께서 무후로 당질 해우 (海愚, 祖考)로 하여금 후사를 이으셨으나 다시 무후가 되심에 선친께서 양자로 들어가시니 계대를 따지자면 당숙 출계가 되는 셈이다.

고조 휘 재학공 아드님 세분 중 맏분 숙(潚)은 앞서 지적한대로 무후로 당질 해우(海愚)를 양자로 맞으셨으며 둘째이신 휘 혼(混)공은 장자이신 휘 해원(海愿)공으로 하여금 재종숙 휘 동(凍)의 후사를 잇게 하시고 차자이신 휘 해각(海慤)공의 3자 휘 봉원(鳳源), 용원(龍源), 교원(敎源)중 막내이신 선친 敎源공으로 큰댁 해우(海愚)공의 후사를 잇게 하시니 바로 내가 5대조 휘 지환(志煥)공의 종손이 된 연유이다.

아버님 생가 조부이신 휘 혼(混)공은 자는 경익(景益),호는 진제(進濟)시며 관직은 김화현감겸(金化縣監兼)철원병마절제도위(鐵原兵馬節制都尉)에 오르셨다. 선덕정치로 만인산(萬人傘)을 받으신 것 또한 우리 집안의 자랑이다.

나의 伯父이신 휘 봉원(鳳源)공은 운관(雲寬), 운면(雲冕), 운광(雲光) 삼남을 두셨다. 운관은 만택(滿澤), 시택(時澤), 성택(成澤), 서택(恕澤), 계택(桂澤) 5형제를 두시고 仲父이신 용원(龍源)공은 무후, 雲冕으로 후사를 이으셨다.

운광은 금택(錦澤), 거택(巨澤) 2남과 택순 택선 택정 3녀를 생하셨다.

선친 휘 교원(敎源)공은 나 운종(雲宗), 운완(雲玩), 운규(雲規) 3남과 1녀 운희(雲姬)를 낳으셨다.

내가 4남매를 둔것은 앞에서 적었지만 雲玩은 泳澤 溶澤 2남과 1녀 美澤을 낳았고 雲規는 淇澤 晶澤 2남과 1녀 혜선을 낳았으며 출가한 雲姬는 1남 3녀를 두어 모두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머님은 韓山李씨 牧隱 李穡선생 후예로 외조부 李復圭씨의 2남 3녀 중 맏따님으로 태어나시어 열일곱 살에 아버님(당시 13세)과 결혼 하셨다. 어머님 생전에 손자 손녀 14명, 증손자 증손녀 7명을 보시니 이 또한 자랑이라면 자랑이 아닐까.


至高至善 忠淸節義

 내가 종친회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종친회의 산 증인이신 裕澤간사님의 권유로 오랫동안 중단돼 오던 宗報를 복간하는 일과 송강선조 4백 周忌 추모행사를 봉행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文淸公(송강 정철) 종친회 6대 회장단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종보 편집위원장의 중책을 맡으며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종보에 글을 썼다.  


'宗報編輯委員長을 맡으며'

(송강종보 복간호 91년 12월 30일자)

 "영일정씨 문청공파종친회의 부회장이라는 자리도 막중한데 종보편집책임까지 맡게 되니 우선 외람되고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종보란 다른 어떤 친목단체회보 보다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으며 종원간의 친목과 유대뿐만 아니라 조상의 유덕을 널리 선양한다는 숭고한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식도 부족하고 조상에 대한 숭모사상 또한 부족한 제가 송강종보 편집위원장이 된 것은 여러모로 조상께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6대회장 선택님과 여러 부회장님 그리고 임원 여러분의 의욕적인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데 마음 든든함을 느끼며 열과 성을 다해 내실 있는 종보를 제작할 것을 다짐해봅니다.

우리 종보는 특히 종원 모두가 공인하고 있듯이 종원의 눈이며 귀와 입인 동시에 송강선조의 정신과 얼이 살아 숨 쉬는 종원의 광장이라 하겠습니다. 종보를 통해 종원들의 동정을 알고 정보를 교환하며 조상의 유덕을 기리고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며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친회를 보다 생산적이며 능동적인 합의체로 발전시키고 종원 모두에게 따뜻한 화음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종보가 항상 자리하도록 지도 편달해 주시리라 믿고 종보는 늘 종원 여러분의 옆에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종친회는 무엇보다도 온 국민이 추앙해 마지않는 명현 송강선조의 위업으로 하여 어디에서나 자부와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종원들 모두가 혈육지친과 같은 사랑과 우애로 규합돼있다는 것도 자랑스럽고 종원들중에는 남달리 국가 사회에 공헌하거나 종친회의 명예를 드높인 분들도 많습니다. 종보는 바로 이런 분들을 많이 소개하고 본받는 일에도 앞장서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자라는 우리의 2세들에게 우리의 기쁨을 전하고 영광을 알리며 그래서 崇祖思想을 일깨울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 흐뭇한 일이겠습니까.

오랫동안 발간이 중단되었던 종보가 다시는 우리 곁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계속 종원들의 사랑과 성원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의 종친회 지부장님의 적극적인 협조와 종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종보의 내실은 전적으로 종원 여러분의 아낌없는 지도편달과 애정어린 채찍, 다투어 참여하려는 의욕이 충만할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종친회 사무실로 기탄없는 충고와 아울러 많은 옥고를 보내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종원 한분이 모두 편집위원장이라는 생각으로 참여해 주신다면 종보의 장래는 무한히 밝고 알차게 될 것임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종원 여러분의 건승하심과 가정에도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생전에 송강선조 4백周忌 추모행사를 봉행하는 영광을 얻었다는 것은 자손된 입장에서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게 된다.


'宗員 모두의 자부와 긍지가 걸린 송강선조 4백周忌  추모행사'

(종보 제11호. 92년 12월 30일자)

 "송강종보를 발간하면서 먼저 종원 여러분의 깊으신 이해와 아낌없는 협조 그리고 성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종보의 내실은 전국각처의 종원 여러분이 송강선조의 유덕을 기리고 선양하는 일만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선대의 값진 遺跡과 遺訓을 다투어 자랑하고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표출돼야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저희 종친회에 당면한 초미의 과제는 당장 송강선조의 4백주기 행사를 뜻 깊고 성대하게 치러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후손된 도리에서도 그러하지만 송강선조의 숭고한 유덕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이번 4백주기 추모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때 종친회의 위상과 송강후예로서의 긍지와 자부는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송강선조의 4백주기가 우리나라 가사문학사에는 물론이고 민족사적으로 값진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종친회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도록 종원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 드리며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에 전종원의 열과 성이 모아져 종친회의 새위상정립 내지는 송강후예다운 면모가 과시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를 봉행함에 즈음해서 나는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그 가운데 4백주기추모사와 판프렛 작성, 그리고 각 언론사홍보를 내가 맡았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한 보람은 두고두고 자랑스럽다.

참고로 내가 집필하고 선택 종친회 회장이 읽은 추모사를 여기 옮겨 싣는다.(송강종보 12호. 94년 2월 5일자 발행)



 "먼저 오늘 우리 종문의 현조이신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와 송강 선조 춘향제에 참석해주신 종원 여러분과 이 엄숙한 대제전을 빛내주시기 위해 공사 간 바쁘신 중에도 멀리 경향각지에서 이렇듯 왕림해주신 내빈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 종친회의 내실발전과 종원 상호간의 친목과 인화 단결을 위해 적극 헌신해 오신 종친회 전 현직 임원진 여러분과 저희 종친회의 각종행사에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국어국문학계를 비롯한 사회각계의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송강 선조께서는 서기 1536년 12월 초 6일 서울 장의동에서 탄생하시어 1593년 12월 18일 강화에서 향년 58세를 일기로 서거하시기까지 당시의 어려운 정치상황에서 여러 가지 역경을 겪으시면 서도 청렴, 강직, 결백하신 정치인으로 추앙을 받으신 忠淸節義의 명현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사문학에 있어 불후의 명작을 남기신 만세의 성현이십니다.

아시는 대로 송강선조께서는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의 현직을 두루 거치시면서 이율곡선생과도 극진한 교분을 가지셨고 불철주야 위국충절로 지으신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바로 송강선조의 고결하신 인품과 충직충절의 산 징표로 길이길이 그 빛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또한 송강선조께서 백성들과 젊은이 들을 교화하시고자 지으신 훈민가들은 주옥처럼 빛나는 충효와 애민정신의 진수로 우리 국민의 정신문명에 값진 얼을 심어주신 그야말로 중국의 이백과 두보를 능가한 시가작품들로서 추앙받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를 봉행함에 있어 새삼 송강선조께서 남기신 이모든 위대한 행적들을 되새기는 뜻은 결코 우리 종원들만이 갖는 숭모의 염일 수는 없다고 보겠습니다.

송강선조의 작품세계에 함축된 인의예지와 효제충신의 정신은 지금도 송강마을 송강고개로 불리는 고양군 신원의 전설과 함께 효의 극치를 일깨워 주신 징표로 또한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문학도들을 비롯하여 충효대절에 남달리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이곳 송강묘소 참배를 위해 전국각지에서 모여드는 것도 모두가 송강선조의 거룩하신   유훈을 귀감 삼고자 함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희 종친회가 정부의 후원을 얻어 松江祠를 중건하게된 것은 이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고 국가적으로도 값진 경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송강사 중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 정부관계부처와 전국 유림 그리고 국어국문학계를 비롯한 사회각계의 지대한 성원과 종원 여러분의 지성어린 성금이 답지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또한 감사드리며 그간의 노고에 대해 전종원과 함께 이를 치하 드립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오늘 경하해 마지않는 바는 송강선조 4백주기 행사를 계기로 송강선조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체계적으로 종합 집대성한 '松江文學硏究論叢'이 발간되고 송강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선보이게 된 사실입니다.

후손된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송강선조의 유훈을 기리는데 더없는 보람과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강선조의 충절과 가사문학의 진수를 현양한다는 것은 곧 국민윤리의 함양과 忠孝思想의 전승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며 이곳 송강사는 그 산 도장으로서 추호도 손색이 없는 2세교육의 요람으로 영구히 보존돼야할 성역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종친회는 물론이고 사회각계의 아낌없는 협조와 배전의 성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많은 2세들이 이곳 송강사에서 참사람의 도리를 각명하고 터득할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경건하고 엄숙한 추모행사의 취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송강께서 남기신 만세불후의 유훈들을 생활 속에 실천궁행함으로써 오늘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는데도 다른 누구보다도 모범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

끝으로 오늘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천리길을 멀다않으시고 자리를 함께 하여주신 내빈여러분과 특히 추모강연회 연사로 기꺼이 응해주신 존경하는 교수여러분께 거듭 감사를 드리며 이만 추모사에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종친회 일을 잠시나마 보면서 나는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몇 가지 발견했다.

그 하나는 송강촌의 유래가 밝혀진 점이다. 송강종보 13호(95.2.20)에 실린 송강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송강마을의 이름은 이조 선조 때 명상 松江 鄭澈선생이 부모상을 당해 이곳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 (현재 고양시 신원동)에서 여러 해 시묘살이를 한데서 유래한다.

송강 정철선생은 서기 1536년 서울 장의동에서 탄생하시어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고 율곡 이이, 우계 성혼등과 교분을 맺었다. 27세 때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좌의정에 까지 올랐고 58세에 타계하셨다. 송강이 35세 때(서기 1570년) 부친인 유침 돈령부판관이 타계하시니 이곳 신원에 장사하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며 이어 서기1573년 모친 공인 죽산안씨 상을 당해서도 이곳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또 1577년 셋째누님 (계림군 배위)상과 1589년 장자 기명 상때도 역시 복을 입고 신원에서 우거하며 전후거상을 정례에 극진하였기에 후일 세인이 이곳을 정철선생의 호를 따라 송강 촌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송강께서 선산에 참배하러 매일 조석으로 넘었던 고개가 송강고개로 불리어 진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송강선생은 부모를 섬기되 항상 효행이 지극했고 형제를 대함에 성색이 부드러웠으며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종묘에 배례하고 출입에 반드시 고하며 묘소에 가서는 반드시 곡배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는 중 매양 조석으로 하는 호곡에 이웃사람들이 감동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일찍이 사계 김장생선생은 말하기를 송강공은 상사제례에 반드시 예를 다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친히 보고 탄복한 바라 했고 또 우계 성혼선생은 송강공의 부모거상에 예를 다한 사람이라는 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른 한 가지는 송강 선조의 遷葬에 관한 유래다. 문절공 종손 원태씨가 종보 복간호(91년 12월 30일자)에 기고함으로써 밝혀진 송강선조의 천장유래는 다음과 같다.

"송강선조의 산소를 우암 송시열공이 택지 천장한 것으로 잘못 전해진 것은 송강자손과 우암선생사이의 세교가 두터웠다하여 와전된 것이다. 송강선조의 천장은 송강의 손자 포옹 휘 瀁께서 일찍이 조부와 선고 두 분의 묘소에 침수되였을 것을 의심하여 밤낮으로 걱정하고 여러해 동안 구산하던 차 마침 진천군수로 있을 때 진천 지장산에 묘소를 택지하였다가 이해 을사년 2월(1665년 포옹 66세) 에 비로서 이장하셨다는 기록이 있다.(포옹집 권7 16항) 포옹께서는 송강선조 천장을 마친 뒤 탄식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일은 끝났으니 백수로 역사 관리하는 일은 어렵다 하시고 군수를 내놓고 태백산 본가로 우거하셨다고 전한다."  


종친과의 만남은 뿌리를 확인하고 집안간의 화목을 다진다는 점에서 보람을 안겨준다. 20년 넘게 총무를 맡은 '在京堤川 迎日鄭씨 文淸公派친목회'는 그런 점에서 만이 아니라 그 옛날 고향의 정서가 듬뿍 실려 있다. 雲華회장님과 종형이신 雲光형님의 남다른 崇祖思想이 이 친목회를 이끄는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것도 여느 친목 모임과 비교 할 수 없는 돈독함이 있다.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버스를 대절해 제천 文節公 시제에 참사했지만 갈수록 조상에 대한 향념이 희박해 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和'의 德目

 제천중고, 재경동문회와 나, 생각해보니 꽤 오래전부터 가까워진 인연이다. 1979년 당시 김진억동문이 초대 김택광회장밑에서 총무일 을 보던 그해 곁다리로 쫓아 다녔던 때로 치면 벌서 30년이 가까워온다.

그때는 물론 동문의 한사람으로서 4.6회 동기생들을 동원(?)하는 일이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동기회 회장직을 맡고 보니 자연 총동문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1987년 신현일 선배(2.4회 전 동서산업 상무이사) 가 재경동문회회장직을 맡으면서 동문회보를 발간하는 일에 동참한 것은 더욱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재선 동문(3.5회 '주' 서등 대표이사)과 이종선(6.8회 현 재경총동문회장) 황익척(6.8회 제천주재) 두 동문을 비롯 나까지 4명의 편집지도위원으로 하여 동문회보 창간호를 내면서 역시 신문사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기사작성과 편집을 도맡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단짜리 기사에서부터 각 면 스트레이트 기사는 물론 이고 때로는 모든 기획기사와 인터뷰 인물소개 제언 수필에 이르기 까지 직접 쓰고 교정을 보며 신문을 만들어 내는 재미(?)란 그저 '신문쟁이가 천직이어서' 라는 말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다.

창간당시엔 여러 가지 뜻있는 기획도 많았다. 모교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일과 돌아가신 은사님을 비롯해 동문 선배들에 관한 이야기며 자랑스러운 동문소개로 지면을 빛내고자 나름대로 동분서주 하면서 동문사회의 끈끈한 정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고생스럽긴 해도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개교 50주년을 맞이하며 모교와 총동문회가 주축이되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를 주관하는 일에 미력이나마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다. 모교가 50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것은 지난 반세기동안 모교와 동문 사회가 걸어온 영광과 환희의 족적과 함께 자부와 긍지를 느끼지 않고 어제와 오늘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지만 국적은 변할 수 있어도 학적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강한 동문 애와 짙은 우애가 선후배 사이에 깊이 그리고 넓게 깔려있는 오늘, 우리모교가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제천중고인의 존재와 위상을 새롭게 하고 있다.

필자는 제천시 문화원에서 언젠가 강연할 기회가 있을 때 제천의 발전과 제천인의 위상, 가까이는 제천중고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신나게 소개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탐험가 許永浩동문(20.22회)이 빠지지 않았고 수도서울을 장악(?)했다는 표현으로 李元鐘 전 서울시장(7.9회)이 거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제천중고인의 자랑스러운 모습은 이밖에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다. 시대가 달라져 정계은퇴를 결심해야 했던 고2회의 이춘구 선배도 누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든 제천중고가 낳은 거목임에 틀림이 없다. 4성 장군에 빛나는 宋膺燮예비역대장(3.5회)도 제천중고인의 자랑으로 빼놓을 수 없는 무관이다.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석학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지면이 부족해 다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다. 정계에 입문해 금배지를 달았거나 달고 있는 분은 물론이고 각계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그 분야의 인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음악평론가와 동양화 서양화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재벌은 별로 없지만 전문경영인으로 그리고 유수한 사회단체의 수장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동문도 많다.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이 나라 2세교 육을 위해 노심초사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참스승들이 경향각지에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마음 든든하고 흐믓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모교 50년을 회고하며 이렇듯 자랑스런 동문만을 생각하고 자기도취에 빠져있을 수는 없다. 지나온 반백년이 남긴 장한 족적도 물론 기쁘고 흐뭇한 일이지만 다시 올 반백년. 그 영원한 제천중고로 이어질 제천중고인의 장래가 그 이상으로 빛나고 보람 있는 나날이어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할 책임이 모교와 동문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제천중고에 재학 중인 우리의 후배, 이제 갓 졸업해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사회 초년생으로 열심히 뛰고 있는 우리의 후배들이 제천중고인의 자존심을 걸고 제천중고인임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도록 모교와 동문사회, 그리고 동문 선후배와 선생님 모두가 일심동체로 '화'(和)의 정신을 실천할 때 우리 제천중고인의 영광은 언제 어디에서고 우리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

제천을 가리켜 의병의 고장이라고 일컫는다. 우리 선조들이 남기신 거룩한 뜻과 정신을 거울삼아 그 유훈을 본받고 계승하는 일도 우리의 책임이다. 제천중고가 낳은 세계적인 탐험가 허영호 동문이 우리에게 준 그 강인한 의지와 백절불굴의 집념은 제천중고인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충분하다.

제천중고인의 미래는 바로 이같은 불굴의 개척정신을 기다리고 있다. 개교 50주년의 오늘 모교와 동문사회,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가 거듭 빛나고 희망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96년 발간 '제천중고 50년사'에서)

   

 오래전에 쓴 글이지만 새삼 감회가 새롭다. 동기 동문들과 서울에서 회포를 풀기 어언 반세기, 동기회 회장이랍시고 모임을 주선하며 친목을 돈독히 하려한 나의 충정을 비록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매양 즐거운 마음으로 동기들을 만나고 있다.

申鉉一 柳稷相 李在宣 金鎭憶 鄭夏澤 李鍾善 역대 재경 동문회장과 동문회보를 만들며 선후배간의 끈끈한 우정을 나눈 일은 평생 잊지 못할 보람이다.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權熙錫 선배의 뒤를 이어 제우산악회 회장 일을 보면서 건강은 누가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선배들의 충고를 되새기곤 한다. 70고령에도 펄펄 나시는 洪貞植 金應漢 申鉉鼎 선배의 老益壯, 해학과 유머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산악회 총무 金仁鏡 후배의 재담은 우리를 늘 즐겁게 한다. 세계적인 탐험가 許永浩 동문이 등반대장이니 이 또한 자랑이 아닌가.

어려웠던 그 시절 동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姜信鎔 동문, '우리시대 영원한 지도자'이기를 바란 金鎭億동문의 모교애, 그리고 그 불타는 동문애는 언제 봐도 존경이 간다. 숙질간인 鄭奎源. 鄭雲永동문의 우애는 동문사회에서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있다.

먼 옛날 얘기지만 宋東一군과 '東一신문사 주필' 운운하며 밤새워 시국을 논하던 때가 엊그제 같으니 이 또한 내가 잊지 못할 추억의 한토막이다.

재경동문회 동기회 회장을 맡으면서 제천 동기들과 용문산에서 갖은 졸업 후 첫 합동야유회는 변변한 졸업사진 한 장 없는 우리들에게 우정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자부해 본다. 이런 저런 얘기가 많지만 그래도 동문밖에 없다는 생각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3. 젊은 날의 肖像


값진 勤勞勉學

 나의 학창 시절을 회고 하면 앞에서 쓴 대로 가난과의 싸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으로 밥은 굶지 않았고 중. 고등학교는 그런대로 수업료(육성회비)는 밀리지 않고 낼 수 있었으나 참고서를 산다든지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해야 남의 책을 빌려 읽거나 자력으로 책값을 마련해서 참고서를 구입해야만 했던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값진 경험으로, 독서의 계절 동방생명 사보(80년 9월호)에 기고한 적도 있다.(정운종 시사논평 '논설위원 30년' 427페이지 참고)

앞에서도 썼지만 해방직후 6. 25까지, 아니 그 후 3년까지도 우리고향 마을의 가난은 유별났다. 도시락 못 가지고 다니기는 고사하고 여름이면 고작 감자개떡으로 연명해야 하는 심한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참고서 사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고 읽고 싶은 문학소설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더더욱 엄두조차 못 냈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나무를 해다 팔아 책값을 버는 일이었다. 일요일이면 산에 올라 솔잎을 긁어모아(속칭 갈비) 보기 좋게 둥치를 만들어 소에 싣고 읍내를 가면 그 당시 불쏘시게 로 인기가 있어 너도 나도 사자는 주문이 쇄도 했다.

이사할때마다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영문법 참고서는 그래서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때가 묻고 헐어 걸레처럼 된 책이지만 어렵게 장만한 참고서이기 때문이다. 시골이라 신문을 돌리거나 파는 일은 불가능했으니 유일한 학비조달 방법이 바로 나무를 해다 파는 일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내가 늘 존경해 마지않았던 일은 雲光 종형님의 불타는 학구열이었다. 그때 벌서 단국대학 통신 강의록을 정기 구독해 탐독하며 대학 못가는 설움을 달래곤 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학교과정을 밟게 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시며 유달리 막내 아드님의 총명함을 들려주시곤 했던 伯父님, 장족하인 나를 귀엽게 봐주시며 늘 자상하게 대주시던 그 깊은 뜻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중. 고등학교를  졸업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형편으로 보아 정말 행운이었다. 어찌 보면 종손인 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쳐야 하겠다는 부모님의 극성이 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하는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전답을 팔아 대학입학금을 내고 나서 4년 동안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하숙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그때 한창 유행한 가정교사 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에 올 때는 나의 6촌 누님 댁 신세를 졌지만 그 다음은 망막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돈암동 李貫求 외재당숙 댁에 임시로 기거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비를 벌 궁리를 하던 차에 마침 勤勞奬學會(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만들어 준 일종의 아르바이트 기구)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한 것이 요행이도 합격이 돼 그곳에서 먹고 자며 공부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성균관대학교 근로학생장학회'에서 내가 하는 일은 필경과 제본이었다. 가리방에 원지를 깔고 끝이 뾰족한 가리방 펜으로 깨알처럼 글씨를 쓰는 일이었는데 명필은 아니었지만 서체가 그런대로 쓸 만해 孟子, 論語, 大學 초록과 같은 한문교재는 거의 내가 쓴 것이 프린트돼 배부됐다. 그래서 3학년 초까지 약 3년 동안의 고학생활은 보람과 긍지로 가득찬 즐거운 일과의 연속이었다. 회원들의 상부상조정신 또한 뛰어나서 밤새도록 제본을 하고 필경에 몰두해도 고단한 줄을 몰랐으며 식사는 학교 인근 밥집에서 외상으로 먹고 월말에 계산해주는 방법을 택했다.

밥값 제하고 가까스로 등록금 정도는 벌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2-3학년 때는 성적우수학생으로 뽑혀 수업료를 면제 받아 등록금의 절반정도만 내도 됐으니 부모님의 기쁨은 불문가지였다.

때로는 제본 교재를 택시에 싣고 을지로의 단골 제본소에서 재단을 해 납본하거나 강의실로 직접 운반해 배부하는 즐거움까지 맛보니 많은 학생들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런 나의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교수님은 강의할 내용을 몽땅 책으로 엮어 배부하셨는데 약학과 재학생들의 '본초학'이나 법과의 '법학통론' 은 물론이고 교양과목중의 하나였던 '영법원강'등을 내손으로 배부해준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이원석선생님(전성대, 단국대, 한양대교수)과 친해진 것도 이 아르바이트가 인연이었다. 동대문구 전농동 선생님 댁을 방문해 프린트 할 교재를 받아들고 장학회로 돌아와 밤새워 가리방을 긁은 것이 인연이 돼 이원석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 '海難審判에 관한 연구'를 프린트해 드린 기억도 난다. 일거리가 많을수록 수입이 늘어 등록금이 모자라는 동료들을 도와주곤 했던 회원들의 우정은 보통 끈끈한 것이 아니었다. 근로장학회에는 프린트부만이 아니라 판매부와 그릴(간이식당)도 있었다. 목공소와 도장 새기는 곳에서 특기를 발휘해 등록금을 마련한 동문 중에 조철식 선배와 김유성동문이 있어 가까워 졌고 金裕宬동문과는 졸업 후에도 오래도록 다정하게 지냈다.

김유성동문이 졸업 기념으로 새겨준 목도장이 나의 최초 인감도장으로 요긴하게 쓰인 일이라든지 그가 신진자동차 김제원 사장 비서로 있을 때 내가 많은 신세를 진일도 고인이 된 김동문의 고마움으로 잊을 수 없다. 수업 중 갑자기 고혈압으로 쓸어져 영영 오지 못할 저승길로 가버린 김유성 동문의 남다른 동문애는 그가 근로장학회 회장으로 있을 때 장부상 미수금을 몽땅 책임지고 본인은 정작 등록을 못해 유급 하고도 불평한마디 없었던 그의 인간미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결국 졸업을 못하고 제대 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 漢醫師가돼 한때 '정인한의원'원장으로 1백 80도 직업을 전환하니 내가 자주 경탄해 마지않았다.

참으로 아까운 친구 하나를 잃은 나의 비통함은 장례식 날 포천의 장지에서 더욱 복받쳤다. 10살도 채 안된 아들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淸風金씨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선생의 후예로써 조상에 대한 향념도 남달랐던 김유성, 언젠가 한글판 중암문집을 자비로 편찬했다고 자랑삼아 말하던 것이 존경스러웠는데 나에게 柏山이라는 호를 지어주며 그 뜻을 한문으로 직접써(글씨 또한 명필이었음)준 고마움까지 남기고 환갑나이도 못살고 갔으니 인생무상, 그저 하늘이 무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근로장학회에서 함께 고학했던 회원 선 후배들 중 기억나는 동문들은 노병조(물리학과) 조철식(국문과) 문병준(약학과) 최승옥(약학과) 김상득(법과) 김향규(약학과) 송병익(약학과) 이성규(영문과) 심상철(약학과) 김우열(경제과) 예성혜(약학과) 김유성(수학과) 송봉섭 한명희(교육학과) 이규원(물리학과) 강평치(법과) 최광호(법과) 신상철(물리학과) 동문등 하나같이 다정다감했고 졸업 후 한두 번 모임을 갖고 회포를 푼 일이 있으나 모두들 건강이나 한지 궁금하다.

근로장학회에서 3학년 2학기까지를 마친 어느 날 선배 김향규형의 주선으로 명륜동 조현영군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한동안 학생 가르치는 일로 학비를 벌다가 정규원 동문이 군에 입대하면서 인계해준 서대문구 합정동 강건철, 경철 형제 집으로 옮겨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또 가정교사로 열심히 가르쳤다. 중학교에 갓들 어간 건철군과 미동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경철 형제를 내 딴엔 열심히 가르쳤으나 성적이 안 올라 미안해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문방구를 차려놓고 집에서 풀을 직접 쑤어 종지만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전국에 도매하던 집주인 강현모씨의 억척스러움 또한 본받을만했다. 언제나 가족처럼 대해 주었고 졸업식 때 부부가 함께 학교 로와 축하해준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

밥상에 자주 올랐던 꽁치토막과 시금치국, 칼치 조림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먹고 자기만 하기로 들어갔지만 가끔 용돈도 쥐어준 후덕함은 그 당시 인기가 높았던 가정교사들의 공통된 기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일류중학교에라도 입학시킨 가정교사는 양복 한 벌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었고 이집 저집에서 모셔가기 경쟁대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반대로 자기가 가르친 학생의 성적이 오르지 않거나 떨어질 경우, 또는 입학시험에서 낙방이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찬밥신세로 전락하기 일쑤였던 것도 많은 대학생 가정교사들의 애환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학원이 늘어나고 교사들이 과외수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기가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대학생 가정교사는 1960년대를 풍미한 인기 아르바이트 직종이었다.

1961년 대학원에 입학해서는 이원석 선생님 댁에서 얼마동안 기식을 할수 있었고 다음해 1962년 2월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하기 전 까지는 천안 입장의 어느 외딴집에서 국제법 책을 쓰고 계신 장기붕 교수님의 원고를 정리해 드린 것도 대학시절의 값진 추억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다.

워낙 치밀하시고 꼼꼼하신 성격에다 매사에 빈틈이 없으셨던 장기붕교수님이 천안 입장에서 국제법 책을 집필하실 때 내가 발탁된 것은 사실 의문이다. 근로장학회에서 고학을 하며 내 딴엔 깍듯이 선생님을 모신 것이 마음에 드셨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재학 중 어느 해인가 이원석선생님과 함께 나의 고향 초가집을 방문해 하루를 묵어가신 인연도 한몫을 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식사 후 꼭 한 시간 정도는 마을 오솔길로 산책을 하시며 짜놓으신 시간표대로 집필하신 것을 원고지에 옮겨 적으며 매양 마음 흐뭇해했던 내가 갑자기 징집영장을 받은 것은 1962년 2월 초순, 그달 19일까지 일을 도와드리고 제천 집에 도착하니 그날이 바로 큰딸 순택이 태어난 날이다. 생면을 하는 둥 마는 둥 다음날 서둘러 군에 입대하는 마음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당장 산모를 두고 훌쩍 떠날 수밖에 없는 미안함으로 지금까지 화제가 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내에게 두고두고 죄를 지은 것 같아 유구무언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의 대학시절, 여러모로 뒤를 돌봐 주신 外再堂叔님 이응구, 관구 형제분의 은혜를 잊는다면 이 또한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名敎授 名講義

  1957년, 그러니까 내가 성균관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서울 시내 몇몇 대학들은 한창 교수 스카웃 열풍으로 들떠 있었다. 모교인 성균관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국내 유수한 석학들을 초빙해 강의를 듣는 기회가 많았고 더러는 아예 모셔오기 작전을 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배우겠다는 열의, 좀더 훌륭한 교수님을 갈망했던 당시의 극성파 학생들은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도강(盜講)까지 하는 모험(?)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모셔 온 교수들이 정년퇴임 때까지 모교에 봉직하신 분들을 여기 일일이 소개할 것 까지는 없으나 이렇듯 면학 열기로 충만했던 학구열이 성대의 오늘을 있게 한 무형의 자산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성균관대학교를 가리켜 우리들은 유럽의 명문인 '파리' '옥스포드’캠브리지’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하나라고 자랑삼아 말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6백여 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명륜당(明倫堂)은, 1398년에 조선조의 국립대학으로 건립되었던 성균관(成均館)의 강의실 그대로이다.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학자, 정치가 가운데 우리 역사를 빛낸 퇴계, 율곡 선생등 대학자도 있다는 사실은 성균인 누구나 느끼는 자긍심에 속한다.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은행잎들의 반김과 찬사와 축복이 넘실대는 대성로(大成路)에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학풍을 다진 학생 시절은 성균인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리라.

더욱이 양촌 신동욱(陽村 申東旭) 교수를 기억하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분의 성실하고도 자상한 강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어렵고 까다로운 형법 이론을 여러 학설을 곁들여 풀이해가며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 주시던 강의실 분위기는 항상 엄숙하고 자상함이 넘쳐 있었다. 약관 30세에 성대 법대에 부임하신 이래 36년간을 법학 통론, 형법 총론, 형법 각론, 형사 정책, 형사 연습을 가르치셨고 대학원에서 형사사조연구등을 강의하시면서 한결 같이 정열을 쏟으신 양촌 신동욱 선생님의 행적은 바로 성대 법대의 거룩한 초석이었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다.

신동욱 교수님의 형법 강의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형벌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범죄인을 교육하여 선량한 사회인으로 만드는데 있다고 보는 교육형론(敎育刑論)의 역설이다. 형벌의 내용을 고통으로 하자는 주장에 명쾌한 반론(反論)을 펴셨고 형벌은 범인의 교정·교화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강한 설득력으로 학생들을 공감시켰던 것이다.

신동욱 교수님의 교육형론은 형벌은 오직 범행의 책임에 대한 응보(應報)의 의미만을 가지며 범죄자 자신이나 시민사회를 위하여 어떠한 선(善)을 촉진하는 수단일 수 없다’는 칸트·헤겔 일파의 절대적 형벌이론에 맞선 신파이론으로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근대학파의 주장과 일치한다.

罪刑法定主義에관한 申교수님의 강의 이론도 논리가 정연해 졸업 후 40여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방금 들은 것처럼 귀에 쟁쟁하다. 신동욱교수는 이 죄형법정주의를 설명함에 있어 이는 "피고인의 마그나칼타로서 뿐만 아니라 입법과정에 있어서 시민의 자유권 보장을 위한 마그나칼타로서, 그리고 행형과정에 있어서 수형자의 마그나칼타로서 중시돼야한다"는데 역점을 두고 강의 하셨다.

죄형법정주의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이론으로 기억을 새롭게 한다.

또한 분 잊지 못할 교수 한분은 장기붕교수님이시다.

학생들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대하시는 기분으로 유별나게 강의시간을 엄수 하셨으며 내가 졸업한 뒤에도 그같은 성실성은 변함이 없으셨다는 것이 후배들의 공감이다. 100분 강의에 단 1분도 허실이 없으셨던 빈틈없는 강의와 자상한 인품으로 강의실 분위기는 항상 진지했고 배움의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국제간에 가장 중시되는 법언을 힘주어 강조하시던 국제법 강의는 언제 들어도 정력이 넘쳐 있었다. 항상 제자들에게 배움의 의욕을 고취 시켜주시고 실의와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던 인간미는 많은 제자들이 장기붕교수님을 존경해 마지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이밖에도 모교의 전임교수는 아니셨지만 강사로 출강하시던 김기선 교수(민법2)와 이항령 교수(법철학)의 강의도 백미였다. 그야말로 청산유수로 흥미진진하게 가르치시던 김기선교수의 강의는 60년대 성대 고시반 학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항령교수의 법철학강의는 해박한 지식과 구수함이 돋보여서인지 강의실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어느 교수의 강의든 그 강의가 심금을 치는 호소력과 설득력으로 가득찰때 학생들은 감동을 받게 마련이다. 열과 성이 듬뿍 담긴 강의, 인자 온화하면서도 고결한 인품으로 존경받는 스승일수록 명강의 명교수로 손꼽힌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교수의 가르치심도 배우겠다는 의욕과 열의로 충만된 학생들이 있어야만 빛이 나는 법이다. 교수학습의 열기로 가득찬 스승과 제자의 호흡 일치가 명교수 명 강의를 만든다는 것과 훌륭한 교수와 전통 속에서 갈고 닦은 학풍은 한 인간의 삶을 정신적으로 살찌우는 좌우명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仁義禮智를 말한다.

 모교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지도 40여년이 경과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40년 전의 성대와 지금을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엄청난 발전이 있었음을 또한 자부하게 된다. 문자 그대로 일취월장 그것이다. 졸업생도 10만 명을 훨씬 넘어섰고 졸업생들의 직업분포도 매우 다양해서 각계 각처에서 성균 인들의 기량을 눈부시게 과시하고 있는 동문들도 많아 보인다. 어디를 가나 성균 인을 만날 수 있고 자랑스러운 성균 인을 대할 수 있어 기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1960년 당시 졸업을 한해 앞두고 동료들이 '성균'지를 만든다고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나 역시 '성균법학' 편집인으로 원고를 모으느라 이리 뛰고 저리뛴 기억이 새롭다.

성균인 하면 나름대로 기질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동창의식이 희박하다는 개탄의 소리 또한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딱잘라 어떤 것이 희박하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타 대학 졸업생들보다 연대감이 부족하지 않느냐 하는 지적에 공감이 갈 때가 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성대 졸업생들 상당수가 속칭 일류대학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쓰디쓴 경험을 겪어서인지는 몰라도 마치 짝사랑을 하다가 실연당한 기분으로 1.2학년을 보내다보니 졸업 후에도 모교에 대한 애착을 못 느끼고 동창의식도 희박해졌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제는 전기에 입학전형을 하게 되고 신입생들의 성적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자긍심이 높아진 만큼 성균의식도 그만큼 고양돼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성균인 개개인을 놓고 보면 자질면으로보나 모든 진취성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어느 직장을 찾아가봐도 개체로서의 성균인이 결코 타 대학 졸업생들보다 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위로는 최고경영인으로부터 중견 사원에 이르기까지 성균인의 기량을 남달리 과시하고 있는 동문들은 많다. 대학 강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왕성한 연구의욕과 예리한 통찰력, 꾸준한 탐구정신으로 무장된 기라성 같은 성균석학들이 모교를 빛내주고 있어 자랑스럽다. 멀리 해외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성균인들이 한둘이 아님을 듣고 있다.

한편 이 많은 자랑스러운 성균인들이 과연 하나의 구심체로 단결돼 있느냐 하면 솔직히 말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대다수 성균인들이 느끼는 공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부끄럽게도 성균인들은 대국적인 안목에서의 성균사회 구성원으로서는 너무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라는 비판을 받기 일쑤다. 물론 모든 성균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나타난 현실만 놓고 볼때는 결코 만족스럽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성균인의 일체감, 그 동창의식의 고양이 아쉽다는 지적에 10만여 성균인들은 느끼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건학 6백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동창회가 제대로 운영되기는 불과 몇해전의 일이고 번듯한 동창회관 하나 갖지 못한 것도 동창사회의 부끄러움 그것이다.

74년 동창회보 창간당시 머리기사에서부터 일단기사, 사설 칼럼을 혼자 쓰며 동분서주 하던 일이 새롭지만 '성균인들이어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뭉치자'는 호소는 이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 호소력이 있다. 부득이 지령 68호를 마지막으로 동창회보 제작에서 손을 떼야했지만 매월 동창회보를 받아 볼 때마다 각별한 감회를 느끼곤 한다.

참고삼아 동창회보가 창간이후 계속 사설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대별하면 동창회 조직의 강화 및 그 저변확대를 비롯해서 동창회에 대한 참여 정신의 고양, 장학제도의 확충, 회관 건립, 동창회원 명부 작성사업, 그밖에 모교에 바라는 동창사회의 여망을 대변한 것들로 더러는 주장이 관철된 것도 있어 보람을 느낀다.

우리 모교가 다른 대학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민족정기 속에 관류하고 있는 정통적인 인륜대도를 교육의 바탕으로 하여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 왔다는데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성균 정신으로 다져진 인의예지의 학풍이야말로 혼탁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의 사회풍토에서 볼 때 가장 값진 生活訓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 모교가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 찬란한 전통에 긍지를 느끼고 그것을 생활화 할 수 있도록 노력 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를 사랑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정신, 평화를 추구하며 자유와 자주정신으로 일관된 성균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성균 인다운 다짐이 있어야하겠다는 것이다. 모교는 그 명칭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미취한 인재를 성취 시켜 계발되지 못한 민중을 물심양면으로 일깨워 향상시킴으로써 균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자(成人材之未就 均風俗之不齊)는 것이 설립의 정신이자 사명이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성균 정신과 학풍은 우리 성균 인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교훈이고 동창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돼야 할 것이다.

창조하고 신뢰하고 봉사하는 가운데 참다운 성균 인상을 정립하고 여기에 동창사회의 일체감이 충만할 때 성균 사회는 밝고 명랑해지리라 확신한다. 성균 의식이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나 감히 생활화를 주장하고 싶은 성균 정신이 바로 인의예지의 학풍이다. 선후배사이의 존경과 신애 그것은 힘찬 성균 역량의 배양이라는 차원에서 성균동창애를 찬란히 꽃피울 수 있는 덕목임에 틀림이 없다. 독선과 아집, 자칫 배타 심리에 젖기 쉬운 마음을 배제하고 나 한사람의 잘못이 전체 성균인의 명예와 직결된다는 인식위에서 행동할 때 성균 의식은 뿌리 깊게 정착될 것이다. 재학생이나 졸업생을 막론하고 성균인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윤리장전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토론의 광장이라도 마련해 봄직하다.                          (성균지 83년 1월 15일자 호에서)


學籍은 不變     

 또 한해를 맞는다. 우선 모교 성균관대학교 동문 선후배 여러분들에게 만복이 함께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이 새해에도 모든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그저 매사가 순탄하게만 풀릴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욕심이야 한이 없겠지만 원단에 세운 계획들이 하나하나 성취되어 부디 이한해가 마음 흐뭇하고 보람 있는 한해였으면 한다.

1974년 11월 이인근 동창회장 당시 배문환(전 서울시 종로구청장)선배와 성균 회보 창간일 에 참여하면서 원고를 메우느라 동분서주했고 매월 기사를 채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 기억이 새롭다. 68호를 끝으로 회보 편집일을 그만두며 경향신문사로 자리를 옮겨서도 간혹 회보 사설을 집필하던 기억은 성균 회보와의 끊을 수 없는 나의 인연이다. 국내 동창회보중에서 아마도 사설란을 두고 있었던 동문회보는 유일하게 성균 회보를 손꼽은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 동문사회의 결집과 모교발전에 건설적인 의견을 제시하며 단합을 호소했던 사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문회보란 무엇보다도 다양한 정보가 풍부하게 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동문이 어디에서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누구는 무엇을 해서 성균인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는지를 그때그때 자랑스럽게 소개해가는 기쁨이란 동문회보가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 모교소식이 실리고 동문들의 승진, 전보, 개업 결혼과 포상소식 등이 동시에 지면을 메우고 있을 때 동문사회는 생동감 넘치는 진면목을 또한 자부하게 된다.

'자랑스런 성균인'으로 소개된 동문 중에는 이원종 서울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시 기획과장 재직당시의 프로필을 쓰면서 은근히 서울시장까지 오르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났을 때 그 기쁨은 정말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가 충청북도 지사시절 지금은 정년 퇴직후 멀리 시골에서 책을 쓰시며 소일하시는 장기붕교수님(국제법)과 전화로 기뻐했던 일, 서울시장으로 영전했을 때 역시 함께 전화로 대견해 했던 일은 모두가 성균 인으로서의 자부와 긍지를 느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비단 이원종동문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성균 인이다운 역량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는 동문들이 더 높은 지위에 올라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을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잠시 회고해 보았다. 때마침 1994년은 성균회보가 창간된지 20년이 되는 해라서 더욱 감계가 무량하다. 성균 회보로서는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20년이라는 연륜은 결코 짧지 않은 동문지의 족적이라 자부해도 좋을듯하다.

누가 말하기를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같은 학창의 길을 나와 동문으로서의 인연을 맺은 것은 우리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학연을 두고 한 말이다. 모교 성균관대학교 졸업생으로서 모교의 명예를 마음껏 드높일 수 있는 동문이라면 이분들이 모두 모교의 자산이 되어 마음 든든함을 더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교를 실망시키고 모교에 누를 끼치는 동문들이 있다면 역시 모교로서는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모교에 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보다 더 훌륭한 후배들을 배출해 달라는 것 이상 별다른 주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훌륭한 후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어깨도 자연 으쓱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들 후배들을 훌륭하게 가르쳐 배출해내는 일이 꼭 모교만의 책임일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교의 봉직교수님들과 사무직원, 그리고 재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모교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듯이 졸업생들도 다함께 힘을 모아 모교를 성원하고 재정적으로 후원할 때 모교의 발전은 가속화 될 것이다. 

건학 6백주년을 앞둔 모교가 거듭나기 위해 노심초사 하고 있음을 보며 6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모교의 저력에 미력이나마 동문사회가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의 목표달성은 결코 어렵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해본다. 각종 국가고시에서 두각을 나타낸 성균 인들이 얼마나 각고면려의 길을 걸어 왔는지 이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이들을 뒤에서 격려하고 후원하는 일엔 그리 열성을 보이지 않았던 동문사회는 아니었는지 반성해보자.

'93년 성균인의 밤' 행사에서 崔淳永 동창회장이 10억원을 선뜻 모교의 장학기금으로 쾌척했을 때 모두가 감격해하며 63빌딩이 진동할 정도로 박수를 쳤던 이 생동감이 모든 동문사회에 공감되고 살아있는 교훈으로 귀감 되기를 바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두사람의 동문만이 참여하는 건학 6백주년사업이 아니라 성균 인이라면 누구나 성의껏 기여하겠다는 마음과 행동이 바라진다.

동문사회에는 현재 동호인 모임도 많고 각 직장 직능별 동문회가 활기 있게 운영되고 있음을 본다. 공직자들의 모임인 행목회가 그렇고 실업인동문회, 법조동문회, 각단과 대학별 동문회를 비롯 각 지역별 동문회도 타 대학 졸업생들이 부러워하는 동문애로 손꼽힌다. 화합의 새 시대로 일컬어지는 동문회의 새 출발을 보며 이들 다양한 동문조직의 활성화가 곧 총동창회의 저력이라는 인식에 다 같이 공감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동문의 입장에서 성균 언론인 동문회의 발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정말 영광이다. 金命傑 선배(전한겨레신문 사장)를 회장으로 모신 성균언론인회의 장래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국내 각 언론사에 고루 분포된 성균언론인들의 입장에서 언제나 모교의 자랑스럽고 기쁜 소식을 알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단 필자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성균회보 94년 1월 1일자 13면)


 어느 동문사회이건 동기 동창사이의 관계는 정말 허물이 없어 좋다. '성법 5 7 동기회' 는 더욱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우정이 충만돼 있다. 초대 金祥洙회장때 나와 金淵洙 趙昌來 동문이 노후를 생각하며 설계했던 그런 오늘은 아니지만 安淳榮 회장과 金秉鉉부회장의 열과 성이 어우러진 대화합의 한마당 잔치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매월 만나는 成三會 모임도 마냥 새롭고 즐겁지만 몇몇 동문의 부부동반 모임은 더욱 사는 맛을 만끽할 수 있어 기다려진다. 

仁義禮智로 다져진 成均進士會(成進會)는 그 어느 모임보다도 자부와 긍지를 느끼게 하는 친목 모임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 오기 어언 20년, 변함없는 존경과 신뢰, 끈끈한 友情으로 친밀감을 더해 준다. 又史 李容浹선생님(前 성균관대학교 총동창회장)을 고문으로 모시고 鄭鳳輝 朴奎乙 金熙年 高羲龜 鄭盛根 金基太 趙鎬遠 朴正浩 申寬秀 朴斗圭동문이 회원인 成進會에 내가 함께할 수 있었으니 영광이 아니고 무엇인가.      

몸으로만 Ep운 법대동문회와 성균 언론인회의 부회장직도 나에게 과하고 분에 넘치는 직분이었지만 한때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법대동문회를 재건하겠다고 韓溶敎. 賈甲孫 동문과 소주잔을 기울인 일은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런 후배들로 생동감이 넘치는 법대 동문회, 成均의 꽃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이 또한 모교의 자랑이다.       

 

4. 고뇌에찬 證言

苦盡甘來

 나는 솔직히 말해 신문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64년 10월 군에서 제대한 뒤 시골집에서 농사일을 돌보고 있을 때 성대 장기붕교수님이 서재를 내주시며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해 급거 상경한 뒤 아내와 두 남매를 불러 올려 1965년 초부터 서울에서 살림을 차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몇푼안되는 한 달 가정교사 수입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 고민이 태산 같았다.

그러든 어느 날 한전 공보실장으로 계시던 육촌 매형 최기덕님의 소개로 장기봉 신아일보사장을 만나게 된 것이 신문사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될 줄이야.

정확히 1965년 7월 13일 신아일보 조사부 수습기자로 들어가 밤늦게까지 신문을 오려 스크랩하고 사진을 정리하다 우연히 사설 몇 편을 쓴 것이 계기가 돼 1967년 1월 13일 정식으로 논설위원 발령을 받고 동료 언론인들이 모두 의아해 했을 당시가 모골이 송연해 질 정도로 부끄럽기가 그지없다. 1인 3-4역을 해야만 했던 회사사정에 묵묵히 닥치는 대로 겁없이 글을 쓰고 틈틈이 방송출연으로 체면유지비를 충당하던 때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 회장님(당시 KBS 해설위원)과의 광복 30주년 특집 '세월 30년' 라디오 대담프로는 일약 신아일보에도 논설위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추억으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신아일보는 1965년 5월 6일 언론인 장기봉 사장에 의해 창간됐다. 1945년 이후의 많은 변화 속에 몇몇 신문의 창간에 기자로서 참여한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신아일보를 창간한 장기봉 사장에 대한 일화는 많다.

1946년부터 대동신문 정치부장, 민주일보, 평화일보, 연합신문 정경부장을 두루 거쳤는가 하면 1950년 이승만대통령 공보비서관, 1956년 서울신문 사장으로 발탁되기까지 언론인 장기봉의 입지전적 행적은 한국 언론사의 한 폐이지를 장식하고도 남는다. 신아일보 창간 직전에는 코리아 타임스 부사장겸 편집국장,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장기영 한국일보사장과의 교분이 남달랐으며 동화통신 전무이사로도 활약했다.

1965년 한국 최초로 다색도 인쇄시설을 갖춘 상업신문으로 '자유', '중립', '공익'의 사시를 내걸고 창간한 신아일보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립된 속에 탄생됐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창간이후 3년 이내에 거의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사세를 확장시킨 이면에는 사장이하 모든 사원이 신문의 생리와 신문제작에 익숙했고 소수정예주의로 인사를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언론인은 많을 것이다.

보통이면 버려질 試刷紙를 포장에 쓴 일이라든지 '헌 봉투도 선용하자'는 구호 아래 근검절약을 생활화 하고 자동적인 '듀모스텟' 장치로 전기요금의 지출을 절약(이 연구로 1967년도 한국신문상 수상)하는 한편 통신지의 이면지를 활용함으로써 회사 경비를 최소화 하고자 전사원이 노력한 일은 신아 특유의 영업방침으로 소문나 있었다.

가판이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었고 컬러 연재만화에 대한 인기도 대단했으며 전면을 할애해 실은 독자투고 '세론'난과 사장이 직접 쓰는 '社交界',는 장안의 화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과감하고 시원한 편집, 제목과 사진이 유난히 돋보였던 신아일보의 매력은 한국최초 다색도 인쇄라는 강점도 있었지만 그 당시 중산층 이상의 두꺼운 독자층으로 하여 더욱 주목도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처음 신아일보 조사부에서 한 일은 당시 선임자였던 柳武正(현재 문화방송 보도위원)기자를 도와 스템핑해놓은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누런 스크랩북에 더덕더덕 붙이는 일이었다. 장기봉 사장의 알뜰살림 방침으로 제대로 된 스크렙북을 사용하지 못하고 누런 종이를 제본해 엮은 것에 풀칠이나 하는 처량함이란 이로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시골 아버님께서는 신문사 조사부라는 곳이 무슨 경찰서 취조실이나 되는 양 잘못 아시고 "내려와 농사나 지으라"고 못 마땅해 하셨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올 것이 없다. 뒤에 말씀하셨지만 기껏 대학원까지 다니다 만 주제에 남의 뒷조사나 하는 꼴은 참아 볼 수 없다는 아버님다운 자식 사랑에 감복할 따름이다.

뒤에 신문사 조사부는 경찰서 조사과와는 달리 대학의 도서관과 같은 곳이라고 설명을 드리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셨는지 얼마 후 논설위원 발령을 받았다고 편지를 올렸더니 온 동네에 자랑삼아 말씀하셨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전해들은 기억이 난다.

매일 매일 조석간 신문을 오려 붙이고 사진을 분야별로 정리하고 나면 퇴근시간은 거의 저녁 8시, 9시였다. 어쩌다 퇴근하시던 장기봉 사장이 늦게까지 일하는 나를 보고 "여보게 鄭군 그만 들어가게' 하고 격려해 주신 것은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기쁘기도 했지만 때로 사장실로 불러들여 받아쓰기를 명할 때는 죽을 맛이었다. 짧지 않은 문장도 문장이려니와 그 많은 사람의 이름들을 한문으로 받아 적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속필로 받아써도 놓지는 말이 태반, 칸을 비어두었다가 틈틈히 메우곤 해서 가까스로 완성하고 나면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기 일쑤였다. 신아일보 사교계는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장기봉 사장이 창안해 지면에 반영한 것으로 장안의 화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받아쓰기는 사설, 칼럼, 때로는 스트레이트 기사까지 다양했고 그래서 초창기 신아일보는 사장이 직접 기사를 쓰고 사설을 쓰기로 소문나 있었으며 실제로 창간 사설에서부터 웬만한 정치 사설은 거의 張基鳳사장이 직접 썼다는 것을 아는 기자들은 많을 것이다.

통신지 이면에 빼꼭히 써내려간 사설 원고는 늘 내손을 거쳐 공장으로 보내졌으며 저녁 늦게까지 받아쓴 원고의 경우 내가 거의 개작을 하다시피 해 출고한 것을 편집국에서 먼저 알고 오히려 나에게 신문쇄출시간을 단축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도 있었다. 석간신문으로 가판이 가장 빠른 신문이었던 신아일보는 때로 장기봉 사장이 직접 쓴 사설을 너무 많이 뜯어 고치는 바람에  가판이 늦게 나온 적이 많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사설 제목만 지시받아 하나정도는 늘 내가 집에서 써다 공장에 일찍 내려 보내 채자를 한다음 '게라'만 사장실로 들여보내 몇 자 안고치고 나와 신문제작이 훨씬 수월했던 것도 내가 논설위원 발령을 받은 직접적인 동기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1967년 1월 13일. 내 생애에 있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 자신도 놀란 '論說委員 鄭雲宗'의 인사발령에 두 눈을 의심했으니 평소 사설은 직접 여러 편 썼지만 정식 논설위원으로 인정해 주리라고는 그때까지만 해도 기대하지 못했기에 올 것이 와도 너무 빨리 왔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편집국에서 혹 반발은 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당시 정도현 편집국장은 오히려 당연한 인사가 아니냐는 반응으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이래서 2년 가까운 '조사부 논설기자'의 딱지는 떨어지고 대외적으로 신아일보 논설위원 간판을 지키는 일에 항상 겸손함을 잊지 않았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대외적인 직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신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창간당시 유일하게 명단에 오른 이는 洪鎭泰위원이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홍진태위원은 신아일보 고문변호사였던 洪承萬 변호사의 장남으로 귀국 시엔 언제나 나와 함께 담론을 하며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니 논설위원실이 외롭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나의 신아일보 논설위원 시절은 초창기 장기봉 사장의 사설 전담기에 열심히 수련한 경험을 토대로 하루 사설 두 편 칼럼(言中錄)  촌평(事事件件)을 겁 없이 쓴, 지금생각하면 불가사의한 모험의 연속이었다. 뒤에 金慶龍위원이 합류하면서 칼럼은 전담을 했고 가끔 사설 한편을 도와주어 한결 수월해졌으며 정도현, 임승준, 호영진, 임 영씨 등 편집국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경제, 문화 분야 논설을 돌아가며 집필, 논설위원실의 체면을 지켜주었다.

그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송병효 위원이 경제논설과 '財界로타리'를 집필하며 논설위원실은 제법 활기를 찾는가 했더니 그분도 얼마못가 자리를 떴고 임덕규 위원도 잠깐 신아일보 논설위원실을 거쳐 갔으나 가장 추억에 남는 일은 金慶龍위원과 洪鎭泰위원 그리고 나와 林德圭위원이 경인 고속도로의 개통을 축하하며 金裕宬동문(당시 신진자동차 비서실근무)과 인천까지 원정을 갔던 일이다. 통금이 있었던 때라 집에 연락도 못하고(전화도 없었기 때문) 아내에게 걱정을 끼친 일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된다.

교육담당 논설위원으로 교육부장관이나 서울시 교육감이 초청하는 술자리에 나간 일이라든지 국방담당 논설위원으로 국방부장관의 브리핑 자리에, 그리고 최전방 군부대 시찰의 기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신아일보의 존재와 자존심을 살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 아마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金尙鉉 논설위원을 위시해서 丁六秀위원과의 교분도 신아일보 논설위원실의 어제와 오늘을 회고하는데 빼놓을수 없는 추억이며 언론 통폐합당시 경향신문으로 함께 자리를 옮겼던 金達賢 위원이 경향에서 가진 수모를 겪다 사표를 쓰고 홧병이었는지 얼마 후 타계했다는 소식은 신아일보의 애환과 함께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鄭道賢 상무가 교통사고로 타계한 것은 신아일보로서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딸의 대학입학시험 관계로 강릉으로 차를 몰고 가다 대관령 고갯마루 급커브길 에서 참변을 당하니 두 딸과 함께 고인이 된 정상무의 시신을 수습하기위해 달려간 高光卓 총무국장과 張相燮 문화부장과 함께 애통해하며 장례식을 會社葬으로 치른 것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불상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전 서소문병원에 영안실을 차려놓고 조객을 맞으며 조사를 직접 써서 읽을 줄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한 가지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신아일보 논설위원이 된지 얼마 후 기자협회보가 그 당시의 나를 최연소 논설위원으로 보도한 일이 생각난다. 

. 1970년 9월 11일자 記者協會報(제 147호)는 1면 머리기사로  언론인 평균연령을 37.01세라고 보도하면서 논설위원 평균연령은 45.57세이고 그중 유광렬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최고령이고 나와 경남매일의 이배석 위원이 32세로 최연소 논설위원임을 '전국언론인 직위별 평균연령표'와 함께 보도해 화제가 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제5회 한국신문상 수상후보(1970년 6월 28일 마감)로 뽑혔으나 결심에서 밀려난 사실도 나에겐 잊지 못할 족적중의 하나다. 비록 상은 타지 못했으나 당시의 나를 어떻게 평했는지 살펴본다는 것도 내 딴엔 의미가 있어 그때 제출된 공적조서를 여기 옮겨 적는다.


(공적조서)

0 소속; 신아일보

0 직위; 논설위원  0 성명; 정운종  0 언론계종사경력;

  5년 2월  0 현직 근속연수; 5년 2월

0 공적사항

(1) 입사당시 조사부기자로서 창간 일천한 신문사의 조사부 확충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였고 자기업무의 과중함에도 불구하고 논설을 집필하는 등 발군의 재질을 인정받아 1967년 1월 13일 언론계에서는 최연소의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다.

(2) 그는 입사 후 결근 한번 없이 근면성실을 인정받고도 있으며 투지와 인내로 독창적인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매일 단독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있지만 자유, 중립, 정의의 사시에 어긋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논설 진으로 구성된 타사의 경우에 비해 사설이 조금도 손색이 없음은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신아일보 편집 중 가장 특징적인 '세론'난 작성에 있어서도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상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매일 접수되는 독자의 투고를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편집하는 일에까지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

(4) 본 논설위원이야 말로 한국언론인의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한 직장인으로서의 성실성을 입증할만한 충분 자료를 별첨하여 추천하는바 특히 유능한 젊은 논설위원을 더욱 고무시키고 사기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타 언론인의 새로운 분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표창해줄 것을 건의함.

신아일보 논설위원 재직 시에 내가 박봉임에도 살림을 꾸려 갈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월급은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아내에게 전해준 덕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취재경력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취재원과 접촉할 기회란 기대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촌지라는 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껏해야 문교부나 국방부 중앙정보부등에서 가뭄에 콩나듯 뉴스브리핑때 건네준 거마비 기만원정도가 과외 수입의 전부였고 외부원고도 쓸 시간이 없어 거절하기 일쑤였으니 주머니 사정은 항상 찬바람이 일곤 했다. 결국 화려한 직업으로 부러워하던 신문기자 생활은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으며 매일 매일 신문논설에 치여 사생활은 거의 접어둬야 했고 틈만 있으면 도하각지의 사설을 읽고 자료를 모으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으니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참고로 1968년도 한국신문연감(한국신문협회 발행)에 수록된 당시의 편집국 사원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임원

0 사장 장기봉  0 편집국장 윤임술 0 총무국장 안세홍

0 공무국장 장기봉(겸) 0 업무국장 김영흠

0 총무부국장 고광탁

◎ 논설위원 0 논설부장 정도현 0 위원 홍진태. 임승준

    임영. 정운종. 송병효. 김경룡

◎ 편집국

 0 국장 윤임술(겸) 0 편집부장 이규은 0 차장 김중상

 0 차장대우 허경구

 0 기자 이상일 장상섭 임현태 김창현 송명섭 배한룡

   임준수 윤흥로 송창기 육길원 서시철 이경순

 0 편집서무 조규석  

 0 정경부장 김종하. 임승준(겸) 0 차장 호영진

 0 기자 이 충 박광태 차순길 김영국 우홍윤

   김길홍 김희진 전규삼 유무정 백창기

   김문원 최 욱 윤진형 이긍규 정원조

          안재환 홍성균

  0 사회부장 이종성 0 차장 박환수 김왕석

    0 기자 정준모 백동주 김형호 김영준 김인수

           서병철 도기충 이영희 김 육 권동섭

           김형심 노수정 이방원 조태형 정욱조

           서우석 안태원 이근성 오 환 유승택  

 문화부장 임 영(겸)

 기자 배기열 유승삼 방창순 고희자

 지방부장 김경섭

 기자 정윤수 이명자 김문자 백선기

 사진부 기자 문영웅 공길남 김점득 이창성

 교정부차장 정용기    

 기자 최의호 이강우 허준구 박용수 이준호

 김방원 박봉민 권영철

 조사부 기자 정운종(겸) 김재돈 홍정자

 사진제판부장 서한영

 사원 이영진 이종항 김진확 허성관 박희우

 서명환 유성우 박규봉 황병홍 김정석


 言論社 통폐합

 1980년 11월 30일, 신아일보는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1965년 5월 6일 국내 종합일간지로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탄생했던 신아일보가 정부의 언론 통폐합 강제조치로 문을 닫아야 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경향신문으로 흡수 통합되며 신아일보 사원들이 경향신문사로 전직하던 날 신아일보별관(당시엔 이별관에서 신문을 제작하고 있었다) 정문에서 장기봉 사장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며 눈물을 글성이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다.

언론통폐합은 金泳三 정권의 '역사바로잡기' 작업에 의해 그 자초지종이 낱낱이 파헤쳐진 대로 신군부측이 80년 3월 작성한 이른바 'K공작계획'을 시작으로 許文道 전 통일원장관과 당시의 權正達 보안사 정보처장, 李光杓 문공부장관, 李秀正 문공부 공보국장, 李相宰 보안사언론대책반장등이 주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이들에 대한 조사에서 당시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권력장악을 위해 저항성이 강한 언론인 7백 11명을 강제 해직시키고 언론사 통폐합조치등을 최종 재가한 사실로 들어났다.

언론 통폐합은 1980년 11월 12일 밤 전국의 통폐합 관련 언론사 주들로부터 각서를 받는 형식으로 시작됐다.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각 언론사로부터 징구한 각서는 몇 통을 복사해 문화공보부로 전달됐고 이 각서를 증거로 해서 언론 통폐합이 단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징구대상 언론사는 모두 45개사였으나 수합한 각서는 모두 52장이었다. 이처럼 언론사 숫자보다 각서 숫자가 더 많았던 것은 한 언론사에서 사장, 회장 등으로 실질적인 소유 관계가 달랐을 경우나 보안사와 지방예하부대에서 사장이나 다른 임원으로부터 대리 각서를 받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각서의 내용은 각서 징구대상자가 '견본'에 따라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대동소이했으나 각서자의 격앙된 감정이 노출되기나 하듯 분노와 저항이 숨겨저 있었다는 것이 각서를 취합한 합동수사본부 관계자의 출판물(김기철저; 합수부사람들과 오리발 각서-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진상)에 의해 밝혀졌으니 신아일보 장기봉 사장의 경우도 강제 통폐합의 희생양으로 비분강개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경향신문 50년사. 383페이지 하단, 12.12, 5.18 실록 358 페이지 참조)

내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李振羲 문화. 경향사장과 李揆行 주간에게 나의 사람됨을 좋게 말해준 池龍雨. 朴魯敬, 曺圭晉위원을 비롯 경향신문 논설진들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돼 늘 고마움을 느낀다. 자존심 상하기로 들면 당장 사표를 던지고 나오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났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랄까, 처자식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틴 것은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보아주기 바란다.

경향으로 옮겨 처음 걸린 사설이 국가보안법 개정작업을 논하는 사설로,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집필한 것이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고 살아난 것을 보고 안도했던 것은 피나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 그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함께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던 金達賢 논설위원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한 달 내내 글 한줄 못쓰고 있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안쓴게 아니라 쓴 사설이나 칼럼(餘滴) 마져도 빛을 못보곤해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수모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니 폐간된 신아일보의 설음이 새삼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 비슷한 설음은 부장급이상 신아 사원들이 책상도 없이 근처 다방을 드나들며 전전긍긍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버티다 못해 몇 개월 봉급을 더 받은 채 회사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패잔병'의 비애를 연상케 했다.

신아일보 사원들이 경향에서 느낀 가장 큰 상대적 박탈감은 경향사원보다 구조적으로 낮게 책정된 호봉으로 인한 불이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아일보의 차장급이 받는 급료가 경향신문 초임기자 월급을 약간 상회했으니 이는 신아일보 봉급이 그만큼 열악했기 때문으로 변명할지 모르나 통폐합당시의 불평등 약관이 주된 원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논설위원인 나의 호봉이 16호봉이었는데 이호봉은 경향의 차장 대우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개탄했던 기억이 있다. 호봉이 이렇게 낮게 책정되고 보니 인사에서도 불리했고 경향신문이 MBC와 분리 독립할 때의 인사재발령에서 내가 논설위원실 한낱 평사원으로 전락해 버리는 웃지 못 할 난센스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온통 화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 달에 나를 논설위원으로 재 발령하는 번거로움을 자초하는 경향 초유의 정정인사를 단행하기에 이른 것도 낮은 호봉이 부른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어 입맛이 쓰다.

아르바이트은행부장으로 전보발령 시 나를 부국장 대우정도로 승진시켜서 내려 보내려든 尹相哲주필이 차장 대우밖에 안 되는 나의 직급을 차장도 아닌 부장으로 승진시키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실토 역시 경향신문의 호봉제도가 얼마나 경직성 있게 운영돼왔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신아일보 사우들은 퇴직금에서도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 해야만 했다. 불평등 약관으로 인한 상대적 불이익 이 퇴직금 정산 때 나타났다고 보는 이유는 애당초 낮게 책정된 호봉에도 문제가 있지만 신아를 떠날 때 퇴직금 정산을 해버려 흔히 회사 합병의 경우 퇴직금을 승계하는 관행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과적으로 신아가족은 이중 3중으로 손해를 보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제로 경향에서 13년을 근무한 논설위원인 내가 93년 11월 6천만 원 정도의 퇴직금을 받고 나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경향신문 논설위원 시절은 전직 후 4년 동안 비교적 무난했고 논설위원실 분위기도 그런대로 원만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잊지 못할 추억은 강북에 산다는 이유로 출근차를 배차하면서 동승하도록 한 회사 방침에 따라 朴魯敬위원, 池龍雨위원과 출퇴근길을 함께하며 담론을 즐기고 교분을 두터히 한 점이다. 퇴근길에 술잔을 기우리며 고견을 듣고 자문을 받으니 나의 논설위원시절은 이분들로 하여금 외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의 우정이 지금도 돈독한 것은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라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마침 당시의 논설위원실 분위기와 나의 생활이 경향사보에 기고한 글 속에 단편적으로나마 묘사돼 있어 여기 옮겨 적는다.


" 어느새 한해가 저물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경향에 몸담은지도 지난 12월 1일자로 만 1년이 됐다. 생각해보면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막상 붓을 들고 보니 무슨 말을 먼저 할지 쑥스럽고 주제넘은 생각이 든다.

일선 취재 경력도 없이 조사부기자에서 논설위원이 돼 사설을 쓰기 16년, 정말 지난 날이 꿈만 같다. 1967년 당시 신아일보 사장이 나를 무슨 생각으로 논설기자로 발탁했는지 논설을 발로 써야 하는 입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경향에 와서 내가 쓴 사설 분야는 주로 남북관계와 교육문제였다.

지난 일 년 동안 고맙게 여겨지는 것은 역시 논설위원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로 격려해주신 위원님들의 동료애랄까, 발전을 위한 자문이었다. 한 가지 主題를 놓고 보는 관점이 달라 격론을 벌였던 적은 있어도 방분위기는 항상 활기가 넘쳤고 존경과 신뢰와 의욕으로 가득찬 1년이었다고 나 나름대로 자부해 본다.

하나의 논제를 놓고 벌인 열띈 격론이 발전을 위한 진취의지의 소산이었다면 이 모두가 경향 논설의 질을 높이는 결과로 나타났음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투철한 이념지로서의 성격을 얼마나 선명하게 잘 살렸는지는 내가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념지이기를 바라는 쪽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느낌이다. 경향은 경향 나름대로의 사시가 있고 다른 신문사와 다른 입장이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경향이 요구하는 규율을 지켜야 하는 것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에 속한다.

자기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하고 다 쓰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의 입장을 존중하는 까닭임은 말할 것도 없고 사설(社說)이 사설(私說)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차피 개인적인 얘기가 됐지만 내가 7-8년 대북방송요원으로 일하면서도 이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퇴근 후엔 거의 이일로 사생활을 빼앗기다 보니 친구와 쓴 소주잔이라도 기울일 기회마저 없어져 버렸다. 어줍잖게 '시사해설가' '시사평론가'임을 자처하게 만든 대북방송관계 동료들의 일방적 명명에 나는 낯이 붉어 질 때가 많았다. 또 그간의 대북심리전 방송이 냉전시대의 낡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지 모르나 반드시 규탄조만은 아니었음을 나는 믿고 있다. 북한을 어떻게 하면 대화의 광장에 나올 수 있게 하느냐, 철저히 폐쇄된 북한 사회에 자유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것이 대북방송요원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북한 동포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세계의 소식들을 전해들을 수만 있다면 저처럼 어리석은 '우물안 개구리'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30여년을 변하지 않은 북의 호전성이며 갈수록 굳어지는 김일성 족벌 왕조체제라는 사실이다. 이런 북한 측을 상대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매우 지난한 일인 줄을 알면서도 우리는 꾸준히 설득하고 인내와 성의로 북한 사회를 개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점에서 나는 밤낮없이 '총칼 없는 전쟁'을 해야 하는 대북 심리전요원들의 노고도 높이 평가해 주고 싶은 것이다.

방송을 하다보면 때로는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쫓길 때가 많다.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세계정세, 특히 남북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때로 생방송을 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고 미리 제작한 것도 전면 뜯어 고쳐야 하는 애로가 따른다. 저녁때 녹음해 놓은 해설도 상황에 따라서는 밤중에 달려가 새로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사설 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내경 우는 한두 번 있을까 말까했지만 밤사이에 일어난 일로 새벽같이 달려 나와 사설을 바꿔 써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한 분들에게는 '정말 수고 많으셨다' 고 치하해 드리고 싶다. 그만큼 다사다난한 한해였음을 경향 사설은 실감케 한다.

아무튼 지난 1년은 내 인생에 있어 많은 것을 일깨워 준 한해였던 것 같다. 누군가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를 숙명, 우연, 성격,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기억난다. 좋든 싫든 간에 절대 절명의 자기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면 주어진 환경이 자기 인생을 규제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숙명이나 우연, 환경이야 어떻든 간에 한 인간의 끈질긴 인내와 부단한 노력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자각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나의 경향 1년에서 얻은 교훈도 한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아는 새로운 출발이었고 어떻게 하면 경향 정신에 동화 될 수 있으며 경향인 으로서의 품위와 체통을 잃지 않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나의 언론계 생활을 다짐해보고 반성해 보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경향신문 사보 81년 12월호) 


 1980년 12월 1일부로 경향사원이 돼 1993년 11월 30일 정년퇴직하기까지 만 13년의 애환을 필설로 다 표현 할 수는 없지만 나와 함께 고락을 같이한 논설위원과 조사연구실 기획. 심의위원들의 다정다감한 면면들은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함께 한방에서 일했든 동료들의 면면들을 '경향신문 50년사' 부록에서 옮겨 적으니 다음과 같다.

 

 論說委員室

주필;윤상철.손광식, 주간;이규행, 실장;지용우.이광훈

위원; 김은우.이강걸.이성호.이형균.조규진.최용길.이철호,이춘송.강용자.최낙동.김용술.박노경.양동안.오동환,구건서.오익환.박석흥.백선기.성정홍.이원창.김세환,유재철.

0정경연구소 소장; 장명석

 부소장; 최낙동. 기획위원  송선무. 조성길. 박석흥

0조사연구실 실장; 유대희. 최상완

 심의위원; 김화. 조양진

 大學生 아르바이트


 84년 11월 어느 날 나는 鄭九鎬사장과 尹相哲 주필의 부름을 받고 사장실에서 새로된 부서 대학생 아르바이트은행의 부장직을 수행하라는 뜻밖의 인사를 통보 받는다. 사업부의 한 파트로 대학생 부직을 알선해오던 업무를 독립부서로 승격시켜 본격적인 부직 알선체제를 갖춤에 있어 내가 그 책임자로 적격이라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아르바이트은행은 경향 창사 35주년 기념사업으로 81년 8월 10일 개설되었다. 일하면서 공부하려는 대학생들에게 학비조달의 길을 열어 주고 자립 근로정신의 고취와 면학풍토조성을 목적으로 문을 연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대학생 부직 알선기관으로 전국 대학 당국과 학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경향 아르바이트은행은 특히 80년 정부의 교육개혁 조치로 대학생들의 과외교습이 전면 금지됨으로써 가정교사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던 상당수의 대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필요성에서 착안 된 것이다.

이처럼 의미 있는 부서의 장을 맡으며 내가 망설인 것은 17년 동안 줄곧 사설만 쓰다가 과연 현업부서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논설위원이 하루아침에 관리직으로 변신한다는 나름대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인사 발령에 승복하고 아르바이트 알선업무에 종사해 보니 이보다 보람 있는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참고로 그때의 솔직한 소감을 적은 글이 '경향 50년사'에 실렸기에 여기 옮겨 적는다.


"잊지 못할 아르바이트 은행"

 먼저 경향 신문 50년사의 한 페이지에 '경향신문과 나'를 회고해 볼 수 있는 지면이 배려된 것은 크나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 11월 30일, 당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면서 논설위원실 말석이나마 차지할 수 있었던 그때로부터 13년 동안 내가 경향신문에서 일한 부서는 논설위원실과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 정경연구소, 심의실이 전부였다. 내가 고향처럼 몸담았던 논설위원실 경력은 신아와 경향을 합쳐 20년 8개월이었고 경향아르바이트은행과의 인연은 비록 짧았지만 내 평생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답고 보람 있는 추억이 될 것같다.

84년 당시 경향신문은 잘알려진대로 5공 정권의 이념지 구실을 톡톡히 하면서 정부의 대학정책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의 창설도 그 한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근로면학제도의 정당성을 통사설로 엮어내느라고 밤을 꼬박 새운 일이라든지 '정경문화' 지 특집 좌담 토론에 나가 아르바이트 대학생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수 있었던 것은 대학생 일자리 걱정에 거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기록으로 나와 경향아르바이트은행과의 인연 바로 그것이었다.

신문사에서 이 같은 근로 장학 사업을 맡아한 것은 우리나라 언론사상 경향신문이 최초였다. 대학생 아르바이트 알선 확대가 1년에 한두 차례 국무회의의 중요 안건으로 상정돼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 지시로 각 부처에 시달될 정도로 경향신문 아르바이트은행의 영향력은 여러모로 지대했었다.

정부 각 부처와 산하 기관에서 책정한 아르바이트 인원을 전국 각급대학에 고루 배정하면서 경제 4단체와 각 대학 아르바이트 담당부서와의 유대도 각별해야 했다.

정부관계부처 및 경제 4단체 합동회의, 재무부 은행관계자 합동대책회의, 전국대학 학생처장회의, 취업담당부서 협의회를 직접 주재한 일이라든지 직종 개발을 위한 대심포지움, 아르바이트대학생 소양교육등 대학생 부업 알선을 위해 고락을 같이 한 裵宙璿 權純億 두 차장(당시)의 기발한 아이디어 창출과 뛰어난 추진력이 있었기에 경향아르바이트은행이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침 간부회의때마다 반찬처럼 오르내렸던 아르바이트 알선 실적은 담당부서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신청서 제출을 위해 학생들이 밤새워 줄을 서고 있다는 대학당국자들의 고충도 고충이지만 아르바이트 기회균등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50일짜리 은행아르바이트를 25일로 뚝잘라 실적만을 올리려 했던 것도 위로부터의 성화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기엔 부끄러운 통계조작이었다.

나와 아르바이트은행은 어찌 보면 천생연분인지도 모른다. 대학에 갓 입학해 가정교사로 숙식과 등록금을 해결했고 3. 4학년 때는 대학 근로장학회의 인쇄부에서 밤새워 필경과 제본을 한 것이 경향 아르바이트은행의 창설 이념 정립 당시 나름대로 일가견을 펼수 있었다면 지나친 자화자찬일까. 경향신문 50년, 아마도 논설위원이 아닌 관리직 사원이 사설을 집필한 예는 나의 아르바이트 사설이 최초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논설회의에서 아르바이트 사설 얘기만 나오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사설을 쓰게 한 손광식 주필의 세심한 배려는 나에게 용기와 사기를 북돋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했던 사우들이 자의든 타의든 회사를 떠나고 없는 지금 내가 당시를 회고하며 이글을 쓸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글 쓰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지금의 나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지 않았나 생각돼 감계가 무량하다.(96년 10월 '경향신문 50년사'에서)


 경향아르바이트은행은 당시 사회 각계로부터 격려와 찬사를 받는 존재가 됐다. 대학당국으로부터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내에서도 툭하면 지면에 아르바이트은행과 나를 소개해  일약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방송에도 가끔 출연해 대학생아르바이트 알선을 호소한일도 기억에 새롭다.

강남의 한 생활정보지는 나를 인터뷰해 사진과 함께 실어 그날 전화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아르바이트 창구역할 鄭雲宗씨'

(86년 5월 25일 리빙뉴스 보도)

  '대학생의 부직 알선을 위한 아르바이트 창구역할의 일을 오랫동안 맡아오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알맞은 부직자리를 찾아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라고 말하는 鄭雲宗씨(47. 경향신문사 아르바이트은행부장)

그는 신아일보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17년 동안 지내다가 84년 11월 아르바이트은행의 부장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 이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당황했었지요. 그러나 오래전부터 아르바이트 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던 저로서는 부직 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학생들에게 보탬이 되어지고 싶었습니다." 라고 鄭雲宗씨는 그때의 감회를 전해준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마치 낯설지 않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을 주는 인상이다. 대학을 다니며 근로장학회에서 필경등 아르바이트 생활로 학비를 조달해 왔다는 鄭雲宗씨는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무척이나 대견스럽게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학생들이 주어진 아르바이트 근무를 불성실하게 하거나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고는 부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지식이 없는 성실성의 연약함과 성실성이 없는 지식의 위험함을 두렵게 여기며 성실과 지식의 균형유지에 힘쓴다는 鄭雲宗씨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적극적으로 가꾸어 나갈수 있기를 당부한다. 그의 사무실에서 끊임없이 울어대는 전화통이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처럼 보이는 것은 기자만의 착각일까  (남)


경향신문 社報도 아르바이트은행부장인 나를 자랑삼아 소개 하곤 했다.

85년 2월호 경향사보 '잠깐 몇말씀'난이 그것이다.


鄭雲宗씨-

 그는 지난 70년 9월 記者協會에서 실시한 '한국언론인 평균연령조사'에서 最年少 論說委員으로 지목된 人物.

67년 1월 新亞日報 논설위원으로 발령받을 당시가 28세. 80년 12월 京鄕新聞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작년 11월 아르바이트은행부장을 맡을 때까지 17년간을 논설위원만으로 지냈다.

'언론계에 발 디딘지 20년째지만 신아일보 조사부에서 일한 3년까지 포함, 內勤으로만 근무하다보니 '발이 좁아진 것'같아 아쉽다고 밝힌다.

그래서 스스로 '발을 넓히려고' 애쓰고 있으며 친구들을 찾아가 담소한다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아침저녁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다정한 이웃 같은 친근감을 주는 인상.

'딱딱한 글'만 써온 '論客' 특유의 차가움은 느낄 수 없으며 말랑 말랑한 연성체 문장의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안겨준다.

-아르바이트은행부장을 맡은 소감은.

'처음엔 착잡하던 기분이 차츰 담담해지더니 이제는 해볼만하다는 자부심으로 이어지는 군요.

아르바이트은행 이념 정립에 깊숙이 관여해온 탓으로 이론의 뒷받침은 된셈이죠.

81년 '政經文化' 9월호에 '대학생아르바이트의 현황과 문제점' 좌담회를 가지면서 아르바이트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동안 아르바이트은행에대한 사설만 열네번을 썼으니까요.

비록 논설위원에서 관리직 업무를 맡게 되었지만 생소하지만은 않다고 강조한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계획으로 이어진다.

'아르바이트은행이 창설 5년차로 접어들면서 본사 중점 사업으로 정착됐습니다. 범사회적 인식제고로 취업기회를 확대하고 대기업 등의 참여분위기 조성과 아울러 올해는 교육개발원과 공동사업으로 직종개발 기초조사연구 심포지움 등을 개최할 방침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거사적인 도움과 협조가 있어야겠다는 당부도 곁들인다.

'대학을 다니며 근로장학회에서 筆耕등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해 왔다'고 공개하며 요즘 학생들은 관리직등 너무 편한 일만 찾는다면서 빗나간 아르바이트인식을 꼬집는다.

문교부 교육정책자문위원을 겸하면서 교육 南北관계 사설을 주로 써 왔으며 지금도 KBS 비상임전문위원으로 남북관계 해설을 담당하고 있고 청소년 연맹 자문위원, 학술원 국어심의위원으로 대외적인 참여를 하고 있다.

지식이 없는 誠實性의 연약함과 성실성이 없는 지식의 위험함을 두렵게 여기며 '誠實과 知識'의 균형 유지에 애쓰며 '자기관리'를 한다고.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酒量은 '대작'정도. '누구나 다 아는 음치'에 근교등산과 여행으로 여백의 시간을 보낸다고.

38년 忠北 堤原에서 태어나 堤川高를 거쳐 成大法科를 졸업. 부인 李鍾淑 여사와 60년에 결혼, 2남 2녀를 두고 있으며 장녀가 銀行員, 막내아들이 중학교 3학년.(圭)  


끝으로 경향신문 아르바이트은행 부장 당시 나와 함께 고생한 裵宙璿 權純憶 李周勳 趙喜坤 李基憲 崔賢淑 사우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虛像과 實像

 경향신문 아르바이트은행부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어느 날 李綱杰 정경연구소 소장으로 부터 정경연구소 기획위원으로 함께 일할 수 없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최재욱 사장이 정부로부터 엄청난 프로젝트를 따왔는데 이사업만 잘되면 경향신문의 형편도 좀 나아질것이라는등 알듯 모를 듯 한 말로 나를 유혹했다. 인사발령이야 사장이 하는 것이지만 이미 함께 일할 동료들을 천거했으며 정부장도 그중의 하나이니 기다려 보라는 것이 아닌가. 내 의사와는 별도로 이미 내정된 대로 정경연구소 기획위원 발령을 받고 올라가보니 정작 이강걸 소장은 논설위원 발령을 받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지 않은가. 후임 張明錫 정경연구소 소장 밑에 崔洛東 부소장,  宋善武 朴錫興 趙誠吉 鄭雲宗 기획위원등이 포진됐고 다음날 崔在旭 사장의 지시에 따라 착수한 첫 사업은 기획 연재물 '左傾' '巨塔의 內幕'등을 책으로 엮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공익자금 얼마를 영달 받았는데 이 돈을 연내에 어떻게 서든지 소화 하려면 서둘러 작업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강걸 소장의 경질이 작업 부진에 대한 문책성 인사였다는 것을 감지한 우리들 기획위원들은 영등포 어느 출판사에서 밤을 새워 교정을 보는 등 책한 권을 단숨에 펴내니 최재욱사장은 강남의 유명한 요리집으로 우리들을 초대 신나게 한턱내기까지 했다. 그날 저녁 회식비가 사내에 화재가 된 것은 정경연구소에 대한 기대가 경영 차원에서 그만큼 각별했음을 상기시켜준다.

'要錄 第5共和國' '올림픽과 國家發展'등을 비롯해 몇 가지 단행본을 펴내고 난 다음해 우리들에게 떨어진 사업은 '실록 제5공화국' 총서 7권을 연내에 발간하는 일이었으니 쉽게 말해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을 집대성하는 일에 경향신문이 총대를 멘 것이다. 대통령 어록 정리, 편집국 기자들을 동원한 치적 취합, 전문가 코멘트, 사진 수집,  인터뷰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공익자금이라는 돈의 성격을 새로 알았고 이 돈으로 5공 정권을 미화 하는 일에 경향신문 정경연구소가 앞장서야 했다는 것은 당시의 경향신문이 어떤 입장에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실록 제5공화국 총서는 정치 외교, 통일 안보(제1권) 경제(제2권) 복지 과학기술(제3권) 교육 문화 사회 체육(제4권) 지역발전(제5권) 대통령(제6권) 일지(제7권)등 7권으로 구성 편찬 됐다.

이 작업에서 내가 맡아한 일은 제5권 지역발전편에 전국 각시도의 실적을 취합해 싣는 일이었다. 우선 각시도 지사와 기획관리실장에게 공문을 띄워 기한 내에 원고를 보내도록 조치하고 이 책에 실릴 사진을 고르는 일과 대학교수 등 전문가로 하여금 5공 정권의 치적(지역발전 관련)을 집필해 주도록 원고 청탁을 하다 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지역발전편은 비교적 원고 수집이 수월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시도는 원고를 너무 많이 써와 간추리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자기 市.道의 업적이 많았다는 것을 과시하기나 하듯 시시콜콜한 내용들을 각종 통계와 함께 나열한 원고를 정리 한다는 것은 새로 쓰는 것 못지않은 어려움이 따랐다.

어쨌든 실록 제5공화국 총서는 계획대로 발간되었고 이 책들이 어떻게 배포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행정 실무를 맡아 고생이 많았던 송선무 위원이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고 기껏 고생한 대가가 이런 것인가 하고 섭섭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후 최재욱 사장은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돼 회사를 떠났고 영전하면서 사원들에게 보너스를 준 일은 경향신문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모두들 좋아했다. 알고 보니 실록 제5공화국 총서 발간으로 들어온 수입금이 보너스 재원이었다지 않는가. 비록 고생은 했지만 동료들의 주머니 사정에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경향신문이 5공 정권을 미화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언론 통폐합 직전 이념 지를 표방하고 나설 때부터 소위 안개 정국을 거치며 5공 정권이 창출되기까지 경향신문이 어떤 모습으로 독자에게 비쳐졌던가를 아는 사람들은 당시의 경향신문과 5공 정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 계엄하의 신문보도는 거의가 경향신문보도를 그대로 전재해야 할 정도로 경향신문은 신군부로부터 모든 정보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신아일보도 가판이 빠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경향신문 보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석간신문의 경우 거의가 경향신문 보도를 가판에서 베끼는 경향이 많았고 이런 경향의 행보는 결국 당시 이진희 문화. 경향사장과 전두환 國保委상임위원장과의 인터뷰 기사로 한몫(?) 단단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끝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의 기수로 전락하는 몰골로 변신했으니 실록 제5공화국 총서를 경향신문이 출판하는 행운(?)을 잡은 것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비록 언론의 정도는 아닐지 모르나 경향신문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으니 내가 몸담았던 그 시대 한 언론의 허상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論說委員 30년'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어언 30여년, 그동안 쓴글을 하나의 단행본으로 출판 할수 있도록 용기를 준 아내와 거의 실비로 출판을 맡아준 서등 출판사 이재선 사장에게 먼저 고마움을 느낀다.

어느 날 30여년을 끌고 다니던 묵은 스크랩북을 뒤져보니 자그만치 5천여 편,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감히 책으로 엮게 된 것이 '논설위원 30년'이다.

이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지난 65년 이후 신아일보와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쓴 사설과 몇 몇 주간신문과 월간지 단행본, 그리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기관지 민주평통 신문에 기고한 것 중에서 골라낸 것이다. 책명을 '논설위원 30년'이라고 정한 것은 67년 1월 13일 신아일보 논설위원 발령을 받은 때로부터 기산해 신아, 경향 23년 8개월 논설위원 경력과 잠시 논설위원실을 떠나 있을 무렵의 교원복지신보 비상임논설위원, 그리고 국방일보 객원논설위원, 국제기업문화신문 논설고문 경력 등 30년 넘게 별명처럼 붙어 다니던 '論說委員'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때문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 책 발간은 특히 내가 회갑을 계기로 무엇인가 남기고 싶은 욕심에서 그동안 쓴 글을 모아 본 것이다. 글을 모아보니 주로 사회문제와 교육문제가 많았고 통일안보 관련 논설이 또한 적지 않아 이를 따로 분류해 한권으로 엮었으나 세상에 내놓기는 낯이 간지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1998년 4월 25일 오후 5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성대히 치러진 졸저 '論說委員 30년' 출판기념회에는 많은 하객들이 참석했고 도하 각 일간지가 이 사실을 사진과 함께 일제히 보도해 준 것도 나로선 큰 영광이다.

이날 사회를 맡아준 주례박사 陽山 吳栢陳간사(당시 민주평통 상임위 간사)의 분에 넘치는 저자 소개, 그리고 깔끔하기 짝이 없는 사회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고마움으로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싶다.

특히 오랜 친목 모임이었던 成進會에서는 나의 회갑을 기념해 선물까지 증정하는 순서를 가지니 이날의 의미는 더욱 각별한데가 있었고 崔圭夏 전 대통령은 대형하분과 함께 최흥순 비서관을 보내 출판 기념회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지면관계로 직. 간접적으로 축하. 성원해 준 하객 여러분을 다 적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날 축사를 해주신 張基鳳 신아일보 사장과 李蕙馥 당시 대한 언론인회 회장의 글과 당일 축사 순서엔 빠졌지만 池龍雨 전경향신문 논설실장의 글, 서등 출판사 李在宣 사장의 인사말씀, 그리고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준 하객들에게 말한 나의 인사 문을 여기 옮겨 적음으로써 이날의 분위기를 액면 그대로 전하고 싶다.


'李在宣 사장 인사말씀'

 안녕하십니까.

오늘 又松 鄭雲宗위원이 쓴 시사논평집 '논설위원 30년' 출판을 기념하는 뜻 깊은 자리에서 출판을 맡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몇 말씀 드릴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때에 바쁜 주말임에도 불구하시고 이처럼 귀한 시간을 할애 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께 저자인 정운종위원과 함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운종위원과 저와의 관계는 사회자께서 언급하신대로 고등학교 동창으로 정말 흉허물 없는 사이입니다.

약 30년 전 당시 기자협회보에 정위원이 전국 최연소 논설위원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대견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마는 논설위원 30년이란 책을 내기 위해 30년 외길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치밀하게 5천여 편의 글을 모아 온 것을 보고 저는 감탄 했습니다.

우리 언론계에는 정위원보다 연세가 많으신 기라성 같으신 원로 언론인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30년 이상을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몸담은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 같아 논설위원 30년이란 책을 낸 저희 출판사로서는 남다른 긍지와 자부를 느끼고 있습니다.

또 정위원이 지난 30여 년 동안 쓴 글들이 비록 졸작이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국가 사회를 위해 기여 하고자 하는 흔적들을 이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으며 이 나라 언론사에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는 문집으로 기록되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정위원이 지어낸 논설위원 30년 속에는 건강한 사회, 특히 도덕성 회복, 그리고 이 나라 교육 발전과 청소년 선도, 더 나아가 튼튼한 안보와 통일을 바라는 충정들이 신문사설, 혹은 칼럼을 통해 생동감 있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그리고 열심히 매사에 적극적으로 살아온 정위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정성을 다해 내조해 주신 부인에게 이 책 발간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논설위원 30년'의 머리글을 상기하면서 정위원의 앞날이 더욱 건승 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자리를 빛내주신 하객 여러분들의 앞날에도 항상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특별히 오늘 이 행사를 위해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경향신문사우 여러분과 제천 중고 동문 여러분, 그리고 성균관 대학교 총동창회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를 드리며 인사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논설위원 30년' 출판을 축하하며

 李 蕙 馥 (대한언론인회 회장)

  又松 鄭雲宗위원이 '논설위원 30년'을 출간한 소식에 접하여 반가움과 함께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의 뜻이 새삼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정위원을 첫 대면한 것은 75년 중반 거의 4반세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정위원이 신아일보에 입사한 것은 65년이지만 그분은 논설위원으로, 나는 그 시절 사회부데스크만 맡아 왔던 터여서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75년 이른 봄부터 KBS 라디오에서 '세월 30년'(광복 30주년 특집대담)을 기획(당시 라디오국장 고 장기범씨, 담당PD 김수웅씨) 매일 밤 8시 45분부터 9시뉴스 직전 까지 방송(사전 녹음)했는데 칼라 TV가 없던 시대라 라디오의 비중이 컸고 '세월 30년"은 청취도가 높은 인기 프로였습니다. KBS는 "세월 30년"의 주제가(새날의 기쁨도 잠시 한순간, 끊임없는 비바람 눈보라 속을 구비 구비 헤치며 살아온 우리 아 아 세월 30년)까지 붙여 청취자의 관심을 돋우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고 고재경선배가 대담을 이끌고 내가 거드는 역할을 했으나 고선배의 사정으로 후반부터는 정운종 위원이 대담 상대로 바뀌었는데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앞섰으나 어디서 그 풍부하고 생생한 자료를 찾아내는 지.. "세월 30년" 연속대담을 진행하는데 조금도 낯설지 않은데 나는 내심 놀랐습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신문사 일 간간이 국립도서관, 여러 관련기관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해묵은 자료를 뒤지고 관련 생존자까지 만나 값진 증언을 토대로, 마치 그 시절 그 사건을 체험한사람 이상으로 실감나는 대담을 엮어 나갔던 것입니다.

'맡은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책임진다'는 그분의 생활신조의 일단을 거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정위원은 KBS 사회교육방송 비상임전문위원으로 '통일로 가는 길' 해설을 맡기도 했고 '새 소식과 해설'--움직이는 세계' MC를 담당했던 관계로 나는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정위원과 더욱 빈번히 만나 친숙하게 되었지만 10년여 일하게 성실, 근면, 겸허로 일관해온 정위원의 인간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방송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예리하면서도 균형 잡힌 필치를 보여주는 정위원의 논설을 눈여겨 볼때마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에 새삼 감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위원은 교육부 정책자문위원, 또 국어심의위원으로, 평통자문위원으로, 청소년. 이념제도. 교육홍보. 정책심의. 운영위 간사위원으로, 또는 한국청소년연맹 자문위원등 다방면에 걸친 사회활동을 통해 사회 각 분야를 보는 안목을 넓혀 나갔기에 그분이 쓴 5천여 편의 글속에는 정위원의 정과 열이 담긴 알찬 내용이 구석구석에 담겨있습니다.   

이제 '논설위원 30년'이라는 제목으로 정위원의 글이 출간된 것은 그간의 정위원의 노고가 열매를 맺었다는 반가움과 기쁨이지만 무엇보다도 정위원의 빛나는 글이 널리 읽혀져 건강한 사회, 밝고 힘찬 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또는 튼튼한 안보태세 확립으로 바람직한 통일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 보탬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운종 위원의 건투를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격려의 말씀


新亞日報 사장 張 基 鳳 

 우송 정운종위원이 지난 30여 년간 쓴 글을 골라 '논설위원 30년'이란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않습니다. 더욱이 정위원이 67년 신아일보 조사부기자로 근무하고있을 때 남다른 재능이 돋보여 논설위원으로 전격 발탁해 사설을 쓰도록 했던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함을 느낍니다. 정위원과 오랜 세월을 함께 일하며 느낀 것은 너무나 근면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고 내 기억으로는 정위원이 논설위원으로 있는 동안 한 번도 사설집필이 늦어 신문의 쇄출이 지연됐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석간신문의 논설위원은 필법이 빨라야하고 가급적 그날 아침에 일어난 문제도 다루어야 함으로 착상이 기민하고 제목도 빨리 정해야 하는데 정위원은 그런 점에서 거의 완벽했습니다. 오랜 세월 함께 일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궂은일도 많이 있기 마련이지만 정위원의 경우 그의 깔끔하고 온화한 성품 탓이랄까 한 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상대방을 기분 상하게 하는 행동이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사설과 칼럼을 쓰면서도 불평은 커녕 즐거운 마음으로 논설위원실에 청량감을 불어 넣었던 정위원은 정말 유능한 사람이라 평해 손색이 없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입니다.

자고로 논설위원은 '문장규범'에 통달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문장은 그 내용이 충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론도 논리에 맞아야 되고 그것은 또한 시의에 적합해야 함이 요체입니다. 신문 사설의 경우는 그러면서도 주장이 뚜렷해야 했습니다. 정위원의 글은 바로 이점에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 정위원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30여년의 긴 문필생활에서 5천여 건의 사설과 논평을 쓴 것은 결코 작은 문집이 아닙니다. 정위원의 이값진 집적들이 과소평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위원이 겪은 30여년이란 연륜은 특히 이 땅의 많은 논설위원들이 다 그랬듯이 아주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시대였음을 말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언론 그자체가 시련에 봉착해야 했으며 비판이나 비평의 언로는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협이 뒤따른 시기였다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다 인식하면서 정치적인 권력에의 과찬이 강요되다시피 와 닿았을 때 그런 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언론인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용케도 고비를 넘긴 그때의 논설위원들의 고뇌를 아는 사람은 지금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외부의 압력이란 원래 강하기 마련이며 그런 압력이 때로는 언론에 대한 간섭으로 비쳐지곤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압력에 직면했을 때 강하게 반발하는 방법도 있지만 강한 것에는 연한 방법으로 대하여 그 힘을 중화시키는 지혜도 또한 있었습니다. 긴 세월을 글로서 살아온 사람들은 '표현'이란 무궁무진한 기량들을 슬기롭게 발휘 하여 그때그때 오히려 순한 표현을 써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은 다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외압을 설복시키거나 방심케 하며 읽는 사람들에게는 십분 수긍과 이해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렇듯 난세의 일부 언론들이 간혹 정론을 펴지 못하고 딱 부러지게 주장해야 할 사안을 시사해설 류로 전락시켜야 했던 것도 그 당시 신문제작상의 한 단면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런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정위원이 이제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 그가 걸어온 30성상의 문집을 정리해 출판한 것은 정위원을 오래 알던 입장에서 매우 자랑스럽다는 말로 축하해 주고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위원이 더 일하고 글도 많이 써야 한다고 믿는 마음 간절합니다.

요즘 신문을 보니 대학 입시에 논설고사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진다 해서 모범문장들을 다투어 싣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지금 와서 왜 이 난리인지 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듭니다. 글을 닦는 후진들이 이 책에 담겨있는 정의로운 문장의 진수를 찾게 된다면 이 책 출간의 무게와 의미는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위원의 '논설위원 30년'을 축하 하며 정위원의 건투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내가 아는 鄭雲宗 위원'

前京鄕新聞 論說委員室長 池 龍 雨

 '성실하고 부지런 한 사람' 노력하는 사람'..아니 또 있다.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

이것이 내가 30년 가까이 교우해 오는 동안 우송 정운종 논객으로부터 변함없이 받고 있는 인상이다.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 우글거리는 약아 빠진 이기주의자들..혹은 전문지식에 자가도취 되어 '남'은 안중에 없는 재승박덕한 인간들에게 던지는 충고일 것이다. 하지만 우송 같은 진국과는 거리가 먼 얘기이다.

남의 궂은일이나 어려운 일을 자신이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돌보아주는 그의 끈끈한 인간미에 정이 끌리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이 아마도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우송과 만난 것은 박정희정권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한 70년대 중반께였다. 그러니까 내가 경향신문논설위원 초년생 시절이었는데 나보다도 나이가 한참 아래인 그는 그때 벌써 신아일보에서 1인 3-4역으로 혹사(   ?) 당하던 중견 논객이었다. 일선 기자시절이 없이 처음부터 논설위원으로 출발한 것이 나와는 다른 경우였다고나 할까...

아뫃든 소속사는 서로 달랐지만 언론계라는 광의의 한솥밥을 먹다보니 무슨 세미나라든가 '모처'에서 초대 되는 회식자리등 공. 사석에서 종종 만나면  눈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그것이 '10.26'사태 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전대미문의 언론통폐합까지 감행하면서 언론계에는 집단 강제 퇴직이라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 와중에서도 우송과 나는 어찌 생각하면 轉禍爲福(?)의 인연을 맺게 된 셈이다. 무소불위한 신군부의 언론 난도질로 인해 불행이도 신아일보는 이 땅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지만 '신아맨'들은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됨으로써 진짜로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우송이 경향논설위원의 한식구로 변신해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지금 생각해도 우송은 경향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지난 80년대의 9년간 남보다 배나 많이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료위원들이 주제에 따라 기피하는 사설도 자청해서 맡아 썼고 '연장했다'(며칠 연거푸 썼다)며 불평하는 사람의 몫까지 대타했을 정도다.

그렇듯 많은 일의 부하가 걸린 상황에서도 틈틈이 KBS의 대북방송을 거른 일이 없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의 글은 결코 화려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자신이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알맹이(메시지)가 없는 현학적인 말장난은 배격하기 때문이다. 대신 논리전개가 뚜렷한 정공법이나 춘추필법으로 읽는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가는 세월은 붙들어 멜수 없다던가. 한때 우리 언론계의 최연소논설위원이었던 우송도 어느덧 회갑을 맞는다.

강산이 세 번 변했을 연륜을 줄곳 외길만 걸어온 그가 반평생 써온 사설과 논단을 묻어 버리기가 아까워 그중 마음에 드는 글을 추려내 '논설위원 30년'이란 단행본으로 햇빛을 보게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특히 이렇다 할 논설집이 서점에 드문 요즘 우송의 논설모음이 서가를 장식하게 된 것은 장차 논설위원 지망생들에게도 희소식임에 틀림없다.


감사의 말씀

('논설위원 30년' 출판기념회에서 필자) 

 안녕하십니까.

먼저 송구스럽게도 보잘 것 없는 저의 시사논평집 출판을 기념한답시고 언론계 여러 선배님과 동문선배님 그리고 공사에 바쁘신 귀빈여러분과 집안 어른 여러분을 이렇듯 염치없이 모시게 된 것을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서 저에 대한 과찬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처럼 무례하고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저의 후안무치에 제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제 일생에 오늘처럼 낯이 간지럽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느낀 때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이 정운종 시사논평집이지 거의가 신문사의 입장을 대변한 글들로 사설이 나오기까지 주필님이나 논설실장께서 글을 다듬어 주시고 때로는 개작을 하다시피해서 출고된 글을 제가 쓴 글이라고 엮어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염치없는 짓이 아닌가 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솔직히 고백 해 올릴 것이 있다면 어쩌다 언론계에 발을 드려 놓았다가 신문 사설 쓰는 일에만 30년 넘게 종사한 것이 오늘과 같은 무례함을 저지르게 된 동기였으며 평생동안 글을 써온 한 언론인의 자화상을 심판 받고 싶은 만용이 작동했다고나 할까요. 5천여편이 넘는 사설 시평들을 차곡차곡 스크랩해 오면서 이것들을 그냥 버리기가 아쉬워, 그야말로 닭갈비처럼 먹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아까운 그런 고민속에서 고맙게도 출판을 맡아준 이재선 사장님의 용단이 있었기에 염치를 무릅쓰고 무례함을 저질렀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졸작들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마는 이 책이 나오기 까지 용케도 자료를 정리 보관해 준 집사람의 내조 또한 컸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흔히 마누라와 자식 자랑하는 사람을 보고 삼불훌 운운 합니다 마는 많이 참고 열심히 살아준 덕분에 그나마 오늘의 제가 있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꼭 감사를 드려야 할 은사님 두 분만을 소개해 올리고 제 말씀을 마치고자합니다.

시간관계로 길게 설명 드리기는 그렇습니다마는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갔다 제대를 한 뒤 시골집에서 실업자 신세로 있을 때 서재를 비우시고 부엌까지 손수 꾸며 저희 내외를 불러 올려 서울 살림을 차리도록 배려 해주신 두 분 장기붕교수님과 이원석교수님 내외분을 어찌 잊겠습니까. 극진한 제자 사랑의 진수를 3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치하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용서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멀리 음성에서 올라오신 원로 언론인 최기덕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의 말씀을 올릴 분이 한두 분이 아니십니다마는 혹 시간이 있으시면 책 머리글을 읽어 보시기를 부탁드리는 정도로 저의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오늘 자리를 빛내주신 한분 한분이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분이시고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부디 건승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에 늘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자리를 빛내주시고 또 아낌없는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경향신문 신아일보 사우 여러분과 대한언론인회, 관훈크럽 회우님, 민주평통 자문위원님, 그리고 제천중. 고, 성균관대학교 총동문회 선후배 동문님, 또 집안 여러 어르신들에게 송구한 말씀과 아울러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논설위원 30년' 출판에 즈음하여 趙夏及 서문여고 교장(성균관대학교 동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 뜻밖에 좋은 책 받고 보니, 아련한 추억 속에 선배님을 모시고 동창회 일을 보던 기억이 어제 일인 듯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논설을 쓰시는 그 바쁜 와중에도 동창회지 발행이나 동창회 운영에 앞장 스셨던 일들이 모두가 선배님의 타고나신 정렬이 아니었던가 여겨집니다.

저도 벌써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학교를 경영한다고 나름대로 애쓴 것이 30년이 거의 되어갑니다. 그동안 늘 노력하는 자세로 학교 일에 전념하고 있지만 아직 할 일은 태산 같은데 갖추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의 책을 받고 반가운 마음에 우선 목차를 훑어보았습니다. 10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내용 중에 400여폐이지 분량이 교육문제가 거론 되고 있어서 무척 반갑고도 고마웠습니다.

시간을 내어 부분 부분 읽어 나가며 선배님의 교육 철학을 본받아 학교 경영에 도움을 얻고 학교장의 인격을 기르는데 많은 참고를 하겠습니다. 계속 좋은 글 많이 쓰셔서 이 땅의 언론의 바른 길을 보여 주실 것을 믿으며 아울러 선배님의 건강하심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1998년 5월 1일  후배 조 하 급 드림    


5.  보람과 矜持

잊지 못할 戰友愛

 1962년 2월 24일 나에게도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이행해야할 국방의 의무가 지워졌다. 난지 삼일도 안된 큰딸과 산모인 아내를 뒤로하고 3년간의 군복무를 기약하며 입대 하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영영장을 받은 나를 동구밖까지 나와 환송해 주시던 동네 어른들과 부석부석한 얼굴로 대문 밖에서 손짓하며 눈물로 환송해주는 아내를 뒤로하고 제천읍내 집합장소에 나가보니 내 나이 또레의 친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거의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군입대를 연기하고있었던 사람들로, 나만해도 대학을 졸업한 뒤라 고령자축에 속해 있었다. 

간단한 수속과 적성검사를 마치고 00연대에 배속이 된 것은 1962년 2월 24일 늦은 오후였다. 최기호, 정원택, 엄수호군등 동기 동창들이 같은 소대 같은 분대 원이었기에 외롭지는 않았으나 계절적으로 무척이나 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논산훈련소 훈련병 생활을 여기 다 글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그쪽에다 대고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최기호군(현재 제천여고교장)은 아침저녁으로 밥한 술 뜨지 않고 훈련장에 나가기 일쑤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억지 춘향으로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나니 영천에 있는 육군 부관학교 후반기 교육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행정병으로 풀린다는 기대감으로 신나게 현지에 도착하니 과연 부관병과 다운 분위기에 놀랐고 선배들의 격려가 또한 사기를 북돋아주니 이런 군대도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매일 야외에서 먼지와 씨름하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문서 기안 등 모든 행정업무를 배우니 마치 사무직원이나 된양 어깨가 우쭐했던 것도 사실이다. 몇 주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육군부관학교 200기를 수료한 뒤 명령대로 내가 배속된 곳은 전남 광주 송정리에 있는 육군기갑학교 인사행정처였으니 이곳이 바로 나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은 군대 근무처였다.

내가 이곳 군대생활을 통해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배속돼 除隊할때 까지 꼬박 한자리에 앉아 司祭.賞典업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느꼈기 때문이다. 사수가 바로 제대하는 바람에 배속되자마자 사수겸 조수로 날마다 상급부대 업무보고와 예하부대 공문 시달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고 졸병이면서도 직책상 큰소리를 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당시의 육군기갑학교 인사행정처 사병  남무보, 윤성중, 이교성, 전석원, 김웅식 병사들은 지금도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이호갑, 강태규 인사행정처장, 오한근 인사장교 백근찬 안전장교와 같은 분은 군대 상급자이기전에 자상한 형님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간미가 넘쳐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회식도 가끔 있었고 오한근 대위는 나를 송정리 집까지 초대하는 등 각별히 대해주었다. 졸병때는 인사행정처  사역병으로 단골이었지만 사수가 제대한 뒤로는 업무핑게로 선임자들이 사역을 나가야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서로 도우며 군대생활을 영위 할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士兵係 윤성중 병장은 시젯말로 기생 오라버니 뺨치는 스타일에다 가끔 외출도 즐기며 신나게 복무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일보계 남부보, 김웅식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 만만하게 대처해나가는 모습이 돋보였고 庶務係 이교성 선배는 매사에 치밀한 사무 처리로 장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저녁 취침시간에 마치 부부처럼 끌어안고 자곤 했던 將校係 전석원군은 제대를 하고도 연락하는 사이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소식이 두절돼 버려 자주 생각나는 전우중의 한사람이다. 兵力係를 보던 남무보 하사가 제주신문 공무국 책임자로 서울 출장을 왔을 때 만나 회포를 풀었던 일은 세상이 넓고도 좁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나의 군대생활에서 잊지 못할 추억은 제대할 무렵 신병을 인솔하고 전방 배출대대로 출장 갔던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몇 달씩 가족을 못 만난 사병들이 용산역에서 부모를 만나려는 열기로 대오가 흐트러져 신경을 써야했고 배출대대에 도착했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신병을 기다리다 실망을 하고 그대로 병력을 인계하고 돌아서야 하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제시간에는 도착하지 못했으나 거의가 귀대를 해 탈영으로 처리된 경우는 없었다는 후문이다. 

피우지 않고 모아놓은 담배를 휴가 때나 출장 시 아버님께 전해드린 일이라든지 아내가 보고 싶어 출장을 자청했던 일은 동료들의 놀림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춘천이나 의정부까지 병력 인솔을 마치고 제천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거의 새벽 두시나 세시였다. 캄캄한 밤중 30리길 벗고개를 넘어 집에 도착해 반기는 아내를 대하면서 나는 많은 죄책감에 젖어 있었다. 두메산골로 시집와 독수공방을 지키며 남편의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미안한 마음을 어찌다 표현하겠는가. 한번은 출장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인절미를 사들고 간적이 있는데 밤에 그것을 먹고 다음날 큰아들을 낳으니 우연의 일치란 이런 것일까 마치 아내의 출산을 돕기 위해 때맞춰 휴가를 간 것 같았다. 혼자 태를 가르는 등 모든 처리를 척척해내든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1964년 10월 30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역의 기쁨은 잠시뿐 제대 후 취직할 일을 생각하니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이 무렵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추억은 대학 동창 朴稚衡군의 부친 회갑날 어렵게 휴가를 얻어 멀리 정선으로 갔을 때 이미 고시에 합격해 군법무관으로 있던 李種南(현 감사원장)씨가 특사대접을 받는 모습이었다. 이종남씨는 박군의 덕수상고 동창으로 막역한 사이였지만 일등병인 나의 초라함이 한스러워 몰래 소리 내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두드리면 열릴 것인가

 내가 KBS 사회교육방송에 처음 출연한 것은 1967년 4월 정도로 기억된다. 당시 KBS는 남산에 있었고 사회교육방송 부서가 아니라 중앙방송 라디오국 대공과에서 심리전 방송을 전담하고 있을 때 宋賢植 PD였던가 신아일보 논설위원인 나에게 뉴스해설을 부탁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이 30년 넘게 KBS 사회교육방송에 출연하게 되는 동기가 된 것이다.    

KBS 사회교육방송을 듣고 귀순을 결심했다는 어느 시베리아 벌목공의 실토를 들으며 보람도 느껴 보았고 사할린 동포나 연변, 훈춘등지에서 나의 이름을 기억하는 동포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심야에 생방송을 마다 않았던 보람이 있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 그곳에 취재 갔던 KBS 기자가 돌아와 보고하는 자리에서 康仁德씨(전통일부장관)와 鄭雲宗의 안부를 묻는 어느 교포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얘기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쨌든 방송전파 매체의 위력은 지구촌을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크며 효과 또한 지대하다는 것을 자주 실감한다. 오직 사명감 하나만을 간직한 채 밤낮없이 총칼 없는 전쟁터에서 북한을 묵묵히 계도하고 있는 대북 방송요원들도 국군 못지않은 '호국의 간성'이다. 생각해보면 국제사회가 이웃처럼 가까워지고 멀리 지구촌 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순식간에 방영되는 판국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만이 단절의 담을 쌓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시대 역행이며 민족의 수치도 이보다 큰 수치는 없을 것이다. 지호지간, 소리치면 들리는 지척의 거리에 부모 형제를 두고 편지 한 장은커녕 생사조차 모르고 반백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리다 인생을 마감한 수많은 이산가족들을 무슨 말로 위무할지, 비통할 따름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북한이 변해야 하고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사회교육방송의 애절하기 만한 호소가 북한을 얼마나 일깨울 수 있을지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죽은 김일성 시신을 영구히 보존한다면서 유훈통치에 여념이 없는 북한의 우민정치(愚民政治)가 언제까지나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쌀이 없어 굶주리다 못해 일본에 식량 구걸을 하면서도 우리가 주겠다는 쌀은 외면하면서 당국 간 대화를 기피해온 북한의 정권 담당자들도 한심하기는 매 한가지다.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였다고들 대서특필하고 있으나 북한이 언제 또 약속을 어기고 딴소리를 할지 아무도 장담하기 어렵다.

KBS와의 인연은 이혜복선생님(당시 KBS 해설위원)과 '세월 30년' 프로에 출연하면서 더욱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다. 광복 30주년 특집 프로인 '세월 30년' 라디오 대담프로는 일약 신아일보에도 논설위원이 있다는 사실을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확인시켜준 골든 프로로 영원히 잊을 수 없다. 30년 넘게 KBS에 출연하면서 나는 많은 경험을 했다. 심야 생방송은 물론이고 '새소식과 해설' MC, '움직이는 세계' '시사촛점' 고정연사로, 때로는 비상임전문위원으로  KBS 직원 못지않게 활약한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경험이자 보람이었다.

KBS 사회교육방송 요원들과의 교분도 나에게는 큰 자산이나 다름없다. 김순경국장을 비롯하여 김은구 이상설 변영하 정 량 김규홍국장과 이팔웅, 방이동, 길성철, 윤 우, 김찬식, 최규락, 송현식, 라득룡, 장민구, 서진원, 박동선, 최 춘, 이내수, 이후재, 이기청, 윤동원, 이건장, 서진원, 윤 군, 박휘서, 김창곤 전윤표, 이승남, 어호선, 최 백, 윤석훈, 안중원 승원세씨등과도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할수 있었던 보람은 말할것도 없고 강인덕, 장청수, 정용석, 서병철, 강성윤, 전정환, 이서행, 남주홍, 이대웅, 김영수, 박영호, 김경웅, 양재성, 김 집, 이창하, 이항구, 정석홍, 정연권, 여영무, 정종문, 이재근, 도준호씨등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과의 대담은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80년대 초였던가, 이상갑, 김준석, 김영일 유동수기자가 사회교육방송 보도반에 파견돼 함께 일한 일도 기억에 새롭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20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그 전신인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는 나의 제2의 직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창설당시의 이념 정립 논단으로부터 매월 시론을 쓰며 때로는 기획기사를 집필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경향신문 논설위원인 내가 평통일을 도맡아한 것은 한마디로 우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李松培 자료담당관이 1981년 초 '민주평통'신문(창간당시는 '평화통일')을 제작하는 실무책임자로 경향신문 외간 부를 드나들 때(신문인쇄를 경향신문에서 했음) 통일. 안보분야 담당논설위원을 찾은 것이 인연이 돼 20년 가까이 민주평통 기관지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민주평통 신문의 사설난이 생긴 10여 년 전부터는 내가 사설을 전담해 써왔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상임위원이되 체육청소년분과, 이념제도, 교육홍보, 정책심의분과위원회 간사에다 운영위원회 간사위원이라는 중책을 두루 거쳤으니 '제2의 직장'이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해설, 시론, 또는 논단형식으로 내가 민주평통에 기고한 글은 98년에 출판한 '논설위원 30년'에도 많이 실려 있지만 오랫동안 나를 각별히 배려해준 全信炳 공보관과 孫晉一, 李松培 담당관에게는 생각할수록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민주평통에서 여러 차례 간사 일을 맡아 했다고 영광스럽게도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수상하니 민주평통 20년 역사를 돌아보는 나의 감회가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 운영위원회 간사가 되어 민주평통 사무처로 2년 임기동안 출근하면서 함께 동고동락한 陽山 吳柏陳간사(주레박사)와의 교분도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분만큼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사람은 보지 못했다. 주례를 2천 쌍 이상 슨것도 독보적이지만 그 결혼사진 1천 5백여 장으로 8폭 병풍 다섯 개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 것은 결혼에 관한한 우리나라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틈틈이 동창회보를 만들며 그 많은 평통위원의 생일을 챙기고 일일이 축하편지를 써 보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졸저 '論說委員 30년'을 펴낼때 출판기념회를 갖도록 나에게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사회까지 선뜻 맡아 준 것도 나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인연이다.

민주평통 운영위간사로 있으면서 내가 한 일중에 보람이 있었다면 신규자문위원을 상대로 '민주평통의 새 진로'에 관해  특강을 할 수 있었던 사실과 수천 명의 자문위원이 모인 자리에서 의견을 개진한다던가 전국 각.시도 통일정세보고회에 나가 '민주평통의 위상'을 나름대로 열변을 토하며 강의했던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운영.상임위원회 합동회의에서 내가 한 의견개진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미국 출장에 수행하기로 돼 있었던 鄭求鎰 의사과장의 출장명령을 취소한 鄭鎬根 사무총장과의 신경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해프닝이었다. 뒤에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사무처의 입장을 생각해서 한 발언이 엉뚱하게도 사무총장의 비위를 건드릴줄이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나로 인해 출장의 기회를 박탈당한 鄭求鎰 의사과장, 그리고 본의 아니게 시달림을 당한 白玉童 운영국장과 나를 끝까지 감싸준 吳滋福 수석부의장, 南柱洪 사무차장, 金明洙 국장, 吳世政 담당관에게는 이글을 통해서나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민주평통이 어느새 20년의 연륜을 기록한다. 우리나라 통일운동사에 남긴 눈부신 족적과 대통령의 평화통일정책을 자문해온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은 역사에 길이 빛날 보람이며 자긍심이라 하겠다.

오랫동안 민주평통신문 사설을 집필해온 나로서는 정말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며 여기 민주평통의 새위상과 역할에 관한 나의 글을 옮겨 적는다.


'새정부 통일정책과 민주평통의 역할'

(1998년 3월 31일 민주평통 제246호 사설)

새정부 대북정책기조와 의미

 통일부는 지난 17일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체제구축을 비롯, 남북접촉 및 교류협력 활성화, 이산가족 문제의 우선적 해결, 통일정책 추진에 대한 국민적 합의기반 조성 등을 골자로 한 금년도 통일정책 과제를 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같은 새 정부 대북정책의 골간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남북 간에 불필요한 긴장을 피하겠다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를 '적대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로 설정,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부는 특히 남북관계개선의 관건인 '남북기본합의서'체제를 복원시킨다는 기본방침아래 제반 실무조치를 하나씩 추진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특사교환을 제의한 바 있으며 필요시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내외에 밝힌 바 있다. 이와 아울러 정·경분리원칙에 따른 남북경협 추진,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사회·문화 교류 협력의 활성화에 필요한 제반 정책도 착실히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보다 유연한 입장에서 북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며 국내기업의 대북투자 분위기 조성을 위해 대북사업의 승인기준 완화와 추진절차를 간소화 하고 대북경협에 남북협력 기금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밖에도 북한농업구조개선을 위한 정부차원의 협력을 모색하고 4자회담, 대북경수로 지원사업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것이며, 이산가족문제의 우선적 해결을 위해 다음달 중에 고령 이산가족의 방북 절차를 신고제로 전환하는 한편 남북한 합의로 판문점이나 나진·선봉지역에 이산가족 면회소, 우편물 교환소 설치를 적극 추진한다는 내용들이 눈길을 끈다.


국민여론 수렴 중심 고리돼야

 통일부의 이 같은 정책대강은 '북한의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 적극추진'등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3대원칙에 바탕을 둔 매우 현실적이고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 정부의 통일정책추진방향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성과 국민적 지지, 국민적 합의 기반을 통해 대북정책을 펴나겠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민주평통을 통일정책 수립과 관련, 국민여론을 수렴할 수 있는 중심 고리로 거듭날 수 있게 한다는 것으로 이는 민주평통의 역할이 그만큼 중차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평통은 잘 알려진 대로 국내외 지도급 인사 1만3천여 명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는, 그 어떤 통일추진기구 보다도 우월한 인적 자원을 갖추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주민이 직접 선출한 지방의회의원과 직능별로는 사회 각계의 전문가와 지도층 인사가 대거 참여하고 있어 통일정책의 수립 및 현안문제에 관한 국민여론을 실질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남북화해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이라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이하여 민주평통이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역량을 초당적으로 수렴하고 결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면과제에 속한다. 국민의 통일의지와 지혜, 그리고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값지고 보람 있는 과업에 민주평통위원 모두가 활발한 참여와 협력을 아끼지 않을 때 우리의 남북화해와 협력기반은 더욱 공고히 다져질 것이다.

모든 국가시책은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통일정책도 이점엔 예외가 될 수 없다.


국민대화합 분위기 조성에 기여

 더욱이 국민적 합의 속에 일관되고 투명한 대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새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같은 정부의 통일정책 기조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자문건의를 통한 정책의 신뢰성을 제고하는 노력은 바로 민주평통의 몫이라 하겠다. 민주평통의 적극적인 역할수행과 그 기능을 보다 극대화하려면 자문위원 스스로 자문역량을 제고할 수 있도록 부단히 전문성을 높여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분과위원회 운영의 내실화, 지역협의회의 활성화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적 과제 못지않게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초미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총력을 경주해야 할 입장에 있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거국적 노력과 함께 북한과의 관계개선 및 남북통일을 위한 민족적 과제를 풀어가려면 국민 모두의 슬기와 지혜, 그리고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길 밖에 없다. 국민대화합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민주평통이 새로운 위상으로 거듭나려면 국민의 기대와 여망에 십분 부응하는 민주평통, 특히 동서 간, 계층 간의 모든 갈등을 극복하여 국민역량을 극대화하는데 적극 앞장서야 할 것이다.

새 정부의 통일정책 과제가 실제적으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대화의 상대가 북한인만큼 북한이 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긴 하지만 북한의 자구노력을 지원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남북화해·협력의 시대를 여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제9기 민주평통 출범의의와 과제'

(민주평통 제269호 사설)

  7월 1일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제9기 임기가 시작됐다. 헌법에 설치 근거를 둔 대통령 직속의 자문기구로서 면모를 일신한 9기 민주평통은 모두 1만 4천 1백 42명의 국내외 자문위원으로 구성돼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8기 1만 3천 3백 40명에 비해 8백 2명이 늘어난 9기 민주평통은 특히 러시아 등 동구 6개국 재외동포 대표위원을 추가한 것과 여성위원 비중을 전체위원의 22.5% (2,244명)로 높인점, 그리고 직능 및 해외위원 가운데 40대이하 자문위원 비율을 전체대비 21,8%(2,177명)로 높인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계층 정파초월, 여성 젊은 층 참여확대

 국내외를 막론하여 현 위원과 새로운 인사의 전반적 균형을 유지하고 40대 이하 젊은층 및 여성계 인사의 참여폭을 넓히고 계층과 정파를 초월하여 민주화, 통일운동에 기여한 인사와 젊은 층 등 각계를 망라한 것이 또한 돋보인다.

이 같은 9기 민주평통 구성의 특징은 지역과 계층, 정파와 세대를 초월한 인사들의 참여를 계기로 민주평통의 전반적인 운영은 물론, 자문위원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평통은 잘 알려진 대로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통일의지를 광범위하게 결집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초당적, 범국민적인 기구로서 통일에 빈틈없이 대비한다는데 자부와 긍지를 느끼고 있다.

통일문제는 특히 어떤 정파나 계층, 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가운데 추진돼야할 민족의 대과업이며 이를 성취하는 일은 바로 민족자존을 드높이고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국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일이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동포가 다함께 복지를 누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 하자는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화해하고 교류와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한가지씩이라도 실현 가능한 것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해 가는 지혜와 슬기가 필요한 것이다.


국민대통합, 평화통일기반 공고화

 평화 공존, 평화교류, 장차의 평화통일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관계를 개선하겠다는 평화지향적인 정책의지도 결국은 전쟁을 방지해 민족의 공존공영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겨 실현하려면 남북 간의 화해, 협력 못지않게 국민간의 대화합을 이룩함으로써 평화통일기반을 공고히 다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지역 간, 세대간,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더 나아가 민족 대통합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 민주평통이 어떻게 거듭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 다 같이 지혜를 모으고 역량을 결집해야한다.

우리는 지금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열어야 할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다. 2천 1년 6월 30일까지로 된 제 9기 민주평통의 임기가 말해주듯 새천년을 맞는 민주평통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함축하고 있다. 역사상 유례없는 대 전환기에 자유와, 정의, 평화와 복지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통일조국을 건설하여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게 하는 일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부하된 최대의 명제라 아니할 수 없다.

 

 새밀래니엄시대, 새위상 제고

  아직도 우리는 구조적 부정부패와 사회적 갈등의 심화 속에서 사치, 낭비, 흉악범죄, 퇴폐풍조의 만연등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을 퇴치하지 못하고 있다. 도덕적 타락과 이로 인한 가치관의 전도는 건전하고 정의로운 인간성 회복과 사회개혁이 시급함을 극명하게 일깨워 준다 하겠다.

평화통일기반은 사회 구성원들이 선량하고 건전한 도덕성과 주인의식을 갖춘 자유 인격으로 날마다 거듭나며 성숙해 갈 때 더욱 공고히 다져 질수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민주평통은 또 통일관련 국정에 다양한 국민여론이 적시에 반영 될 수 있도록 여론을 수렴함은 물론, 자문 건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야할 입장에 있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각계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정책 추진에 반영토록 하려면 부단한 자기연마와 범국민적 애국운동의 확산에 솔선수범 앞장 서야 한다.


정책 자문, 건의기능 충실화

 우리 민주평통이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7천만 겨레의 여망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기여했는가는 먼 훗날의 역사가 그 값진 기록을 평가 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민족 앞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민주평통, 21세기 지구촌 무한경쟁시대, 목전의  새밀래니엄시대에 십분 부응하는 미래지향적 안목을 넓혀 항상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문위원으로 보람을 찾게 되기를 기대한다.(민주평통 제269호 사설)


'새천년 통일과제와 민주평통의 역할'

(민주평통 제276호 사설)

민족의 좌표 ,떳떳한 통일국가

 새천년, 새로운 도전의 시대를 맞으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정진할 것인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새천년을 향한 민족의 좌표, 그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반세기를 이어온 남북의 대결과 분단이라는 민족의 아픔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현실, 더 나아가  인종, 종교, 영토문제에 의한 다양한 갈등요인과 환경오염, 테러 등의 초국가적 위혐,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등 온 인류가 극복해야할 초미의 과제 앞에 새천년은 우리에게 엄청난 시련과 도전을 예상케 한다.

눈을 동북아 지역으로 돌려보면 주변 4국간의 협력과 견제가 지속 되는 가운데 역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세력경쟁과 안보불안이 그대로 잠재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로 말미암아 한시도 긴장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 또한 엄연한 우리의 현실임을 직시하게 된다.

이러한 정세분석을 바탕으로 우리의 통일과제와 민주평통의 내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이수성 수석부의장이 지난 7일 상임위원. 협의회장 합동회의 개회사에서 강조한 대로 "정서적인 민족통일을 넘어서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민족의 대화합과 떳떳한 통일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통합. 조화의 민족역량결집

 대립. 갈등의 남북관계를 화해. 협력. 평화의 관계로 발전시키고, 한반도 냉전구조해체로 '사실상의 통일'을 이룩해 이를 실질적 민족 통합으로 승화 시키는 일은 21세기 우리에게 안겨진 최대의 통일과제로 손꼽힌다.

이러한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부적으로 다음 몇 가지 지향점에 국민역량을 결집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게 된다.

첫째, 우리의 저력과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발전전략과 현실성 있는 실천계획을 수립하여 국민모두가 일치단결해 정진하는 일이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국가발전 과정에서 경험했던 시행착오와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과감히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치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지역분권주의와 당리당략의 이기주의를 배격함으로써 국민대통합을 이룩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초미의 과제에 속한다.  


건강한 사회, 선진화의 요체

 둘째로 중요한 것은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를 구현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병리 현상은 바로 인간성 상실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윤리의식의 부재 속에서 온갖 병폐들이 유발되고 있는 점이다. 경제성장의 의미가 상실되는 사회악의 일소야 말로 선진화의 위대한 비전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로 첨예화된 지역감정을 해소 하고 세대간, 계층 간의 단절과 갈등을 풀어야하는 과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성장주의 정책에서 파생된 빈부계층간의 위화감과 상대적 빈곤의식은 정책적 치유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로 제기돼 있다.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온갖 부정부패와 부조리, 반목과 불신 풍조는 또 얼마나 심각한가.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도 다원적 사회의 발전적 요소로 작용한다기 보다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중심의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표출된 욕구와 갈등은 대립적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1세기 민족웅비의 시대 열어야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각자가 대화합의 정신으로 뭉치고 민주시민의 자질을 높여 도덕과 윤리에 바탕을 둔 인간성 회복의 가치관을 하루 속히 정립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느냐 못서느냐의 열쇄는 궁극적으로 국민의식의 선진화에 달려 있다고 본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달성해야 한다는 신념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력, 그리고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뭉치게 되면 명실상부한 21세기 떳떳한 통일국가 진입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21세기를 향한 민족의 번영과 발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우리 민주 평통이 자부심을 가지고 민족의 대의를 위해 항상 부하된 사명과 역할을 다할 때 새천년은 분명 우리의 시대로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보다 많은 헌신과 봉사로 국민의 사랑과 존중을 받는 민주평통, 통합과 조화의 구심역으로 거듭난 민주평통위원의 위상을 세우는데 자문위원 모두의 열정이 배가 되기를 바란다.


민주평통 20년 역사에서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사설 집필도 집필이지만 내가 민주평통 운영위원회 간사로 있을 때 민주평통이 헌법기관으로 거듭나기는커녕 존폐의 기로에 봉착했던 사실이다. 내가 金斗權 운영국장과 민주평통의 위상을 제고 시키려 노심초사했던 일이라든지, 통일부로 흡수 통합된 뒤 그 부당함에 인식을 같이하고 심도 있게 의견을 교환했던 일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事必歸正이었지만, 다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분리 독립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던 것은 민주평통을 하나의 관변단체정도로 잘못알고 있는 일부의 편견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민주평통이 이런 편견으로부터 보다 자유롭고 초연해 질 수 있도록 자문위원 모두가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각오를 새로이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停年'을 말하는가!

 한창 일할 나이에 '55세 정년'이라니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었다. 촉탁으로라도 연명이나 할까해서 은근히 기대도 해 보았지만 회사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한사람이라도 고임금 급료 자를 내보내는 것이 경영차원으로 볼 때 불가피하다는 방침이 서 있었던 때라 각오는 했지만 막상 내가 정년퇴임 하는 날 金昇淵 회장이 구속돼 회사는 온통 긴장감이 감돌았으니 나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펄펄 뛰든 물고기가 물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93년 11월 30일 간단히 사장실에서 정년퇴임식을 마치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니 이날이 경향신문 13년 대미를 장식하는 날이었다. 비는 왜 그리 처량하게 내리는지, 다정한 崔相  金 和 趙陽鎭 任貴玉 사우의 송별오찬을 들고 문화체육관쪽 정문에서 작별을 고하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날 崔相  실장이 건네준 방석(내가 의자에 깔고 앉았던 것)을 옆에 끼고 귀가할 때의 내 심정은 상상에 맡길 따름이다. 그 후 무료한 나날을 보내며 내가 궁리 한 것은 어디든지 활동무대를 찾는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時事問題硏究所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내 딴엔 시내 중심가에 사무실을 내서 정식으로 출발하고자 궁리하고 있던 어느 날 이재선 친구 사모님으로부터 작명가 김봉수씨를 만나러 가자는 전화를 받고 내자동 소재 '김봉수 작명소'를 찾으니 손님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간단히 수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에게 지어준 회사이름은 '佑邦時事問題硏究所'였고 온 김에 호도 하나 짖자는 바람에 '又松' 이란 호까지 지어 받으니 나와 김봉수씨와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김봉수 작명가에게 손수 수고료를 건네주면서 나를 격려해 주셨던 이재선 사장 사모님, 지금까지 동기간 이상으로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내외의 고마움에 항상 고개가 숙여진다.

그때 김봉수 작명가가 나에게 한말은 투자할 생각은 말고 활동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후 정식으로 서류를 갖춰 서울시청에 사회단체 설립 신고(신고 번호 제1165호)를 하고 서부세무서에도 면세사업자 등록(등록번호111-94-39463)을 마치니 시사문제연구소의 오늘이 있게 된 사연이다.

佑邦이라는 會社名과 雅號 又松도 내 마음에 꼭 들었지만 우선 호만 사용하기로 하고 우방은 기회 봐서 쓰기로 했다.

내가 시사문제연구소를 차리면서 만든 설립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 7천만 겨레의 통일 욕구와 신한국 창조의 열기로 가득찬 분단 한국의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적 지혜와 슬기의 창출이 요망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소(시사문제연구소)는 통일된 조국 건설을 앞당기기 위해 적극 진력하며 통일시대를 열기위한 국민역량 결집에 기여하는 한편  통일안보 문제의 분석. 진단. 연구. 학술활동을 통해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다각적인 정보수요와 지적 욕구에 충실히 부응함으로써 새로운 통일문화 창달에 이바지 하고자 설립하게 되었다."

定款에서 밝힌 목적사업은

1. 통일 안보문제의 분석. 연구 및 정책개발

2. 통일안보문제와 관련된 조사. 학술세미나. 강연회, 좌담회

3. 통일문화 창달을 위한 연구지 개발

4. 기타 본연구소의 목적 수행사업 등 이었다.


이상과 같은 목적사업을 정한 뒤 친지들에게 서신을 띄우는 일을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그 인사 문을 여기 옮겨 적는다.

   "삼가 존체 금안 하심과 하시는 모든 일이 여의 형통하시옵기를 앙축하오며 그동안 여러모로 지도편달해주신 후의에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불초 소생이 언론계에 두루 재직하는 동안 항상 따뜻한 우정과 격려로써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편달해 주신데 대하여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은덕으로 알고 있습니다.

就悚 지난 연말로 정년을 맞아 경향신문사를 나오면서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림이 마땅한 도리인줄 아오나 늦게나마 서면으로 인사에 가름하옴을 너그러이 용서 바랍니다.

아울러 지난 20여 년간의 논설위원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화시대 국가 사회의 다양한 정보 수요 욕구에 부응하고 통일시대를 열기위한 국민역량결집에 미력이나마 기여하고자 '時事問題硏究所'를 개설하였사오니 언제고 연락주시면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아무쪼록 전과 다름없이 대해주시고 항상 댁내에 만복과 행운이 함께하시기를 기원 하옵니다. 감사합니다."


시사문제연구소의 지명도가 높아진 것은 역시 국방일보에 기고한 나의 시론과 국군방송, KBS사회교육방송 출연, 그리고 교통방송에서 열심히 시사문제를 해설하고 있는 李八雄위원의 맹활약에 힘입은바 컸다.


6. 살며 생각하며

사람 되게 한 '사랑의 매'

(99년 1월 20일 발행 제천고 교지 제11집)

 모교 제천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올해(98년)로 41년째가 된다. 1957년 2월, 정든 교문을 나서며 담임선생님을 비롯하여 모교의 그 인자하시던 은사님들과 작별하기가 아쉬워 눈물을 흘렸던 때가 엊그제 같다.

제천에서도 소문난 두메산골 금성면 월림리 1구, 迎日鄭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제천중고 30리 길을 꼬박 걸어서 통학(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도보 통학)하면서 교문을 드나든 재학 시절은 가정적으로나 모교의 재정 형편으로 보나 국가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가난이 찌들대로 찌든, 빈곤이 대명사처럼 따라 다녔던 때로 기억된다.

오죽하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 운운하는 혁명공약이 나왔겠는가. 재건국민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이다 해서 나라의 경제를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울 정도로 발전 시켰던 우리들이 지금은 IMF 파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1960년대를 회상하면 지금의 고통쯤은 새 발의 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교의 눈부신 발전, 우리의 후배들이 '명문 제천고등학교'의 자부와 긍지를 마음껏 드높여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대견함에 우선 감사를 드린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6회 대선배 신세가 되긴 했지만, 지금의 재학생 동문들이나 그 밖의 많은 동문들이 모교의 명예를 빛낸 장한 족적들에 비하면 필자는 그저 부끄럽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불행하게도 1957년 모교 졸업 당시의 담임선생님 세분이 한창 정정하실 년세에 일찍이 타계하셔서 재학시절을 회상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토록 열강을 하셨던 이상필 국어 선생님, 자상하고 치밀하셨던 위재열 수학 선생님, '고잉 고잉'(Going Going) 의 이필종 영어선생님, 모교의 배구 기량을 전국 재패 실력으로 까지 끌어 올리셨던 이달모 체육 선생님, 그 어느 한분도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이분들이 회갑전후에 모두 돌아가신 것은 우리 6회 졸업생들 입장에선 비탄을 금할 수 없는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어를 가르치셨던 이상필 선생님은 고전 실력이 뛰어나셨다.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을 줄줄이 암송하시며 입에 침이 마르시도록 열강에 열강을 거듭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셔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여러 해 동안 투병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으니 한마디로 인생무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촌각도 잊지 못할 추억은 역시 위재열 수학 선생님의 가르치심이다. 언젠가 동문회보에 기억을 더듬어 소개한 일이 있지만, 이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맞은 '사랑의 매'는 필자가 인생을 살면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근면 성실의 좌우명을 깨우쳐 주신 것으로 지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며 살고 있다.

사연인즉 어느 날 수학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수학 시간 전 시간이 어떤 과목 시간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간에 보던 책을 넣고 수학 책을 꺼내 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들어오신 선생님께서 출석부를 교단에 놓으시더니 앞자리에서부터 학생들을 한명 한명 일으켜 세우셨다. 필자도 영문을 모른 채 일어나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웬걸, 이제는 앞에서부터 일어나게 한 학생들에게 사정없이 매를 가하시지 않는가. 매를 맞고 난 다음에 매 맞은 이유를 알고 보니 수학시간을 맞는 준비자세가 안되어 있었다는데 있었다. 수학시간엔 수학 책을 꺼내 놓고 공부할 태세를 갖춰야지 전 시간에 배우던 책을 그냥 두고 수학 시간을 맞는다는 것은 매사에 준비 없음을 의미하며 이런 자세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 이후로 매사에 준비 하는 마음을 갖고 살게 되었고 가능한 한 장래에 대비하고자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 4남매를 시집 장가보내는 일에서부터 집안의 모든 살림을 아내와 의논하며 알뜰히 저축하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장래를 설계하며 산 덕분으로 큰 어려움 없이 대사를 치러 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재학시절 위재열 선생님이 필자에게 주신 '사랑의 매'로 인한 깨달음 덕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잡은 곳이 신문사였고, 우연히 사설 쓰는 일을 시작으로 논설위원이라는 자리에서 30여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학 시절 선생님의 가르치심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나 다름없다. 학생들을 사람 되게 하려고

든 매가 때로는 과잉 지도로 매도되는 경우가 있으나,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을 증오하며 때리겠는가. 일부 탈선 청소년들의 경우 학교에서 '사랑의 매'를 너무 아낀 탓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새 회갑 나이를 넘기고 보니 지난날 못 다한 일들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 가운데 내가 과연 모교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책감도 든다. 나름대로 동창회 일을 보며 신문도 만들고 모교의 자랑거리를 즐겨 보도하는 정도가 고작이니 후배들에게 부끄럽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선후배 관계란 다른 어떤 관계보다 끈끈한 정으로 가득차야 할 관계다. 모교의 교훈 '화'

(和)의 정신은 오늘날과 같이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다. 동문간의 화합은 물론이고 이웃 간, 동료 간의 친목과 유대를 돈독히 하는 정신적 지주가 바로 '和'의 정신임을 생각할 때 모교의 교훈은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한 영원히 귀담아 듣고 실천해야할 덕목인 것이다.

'장하다 우뚝 솟은 용두산 아래, 굳세고 높은 기개 타고난 우리 제천 중.고' 동문들이 모교의 발전을 기원하며 열심히 살아가려면 먼저 이 '和'의 정신으로 뭉치고 정진해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靑少年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한언론인회보 99년 12월 1일자)

  인천 호프집화재참사, 생각할수록 통분을 금할 수 없다.

'법도 없고 어른도 없었다'는 어느 신문 표제대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부정부패)가 빚은 화재 참사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들어 나면서 더욱 자책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한꺼번에 55명의 나이 어린 10대 학생들을 死地로 내몬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는 한마디로 법과 양심의 매몰에서 헤어나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부른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소년 보호법, 소방법, 건축법, 식품위생법, 학교보건법은 있으나 마나였고 어른들의 양심은 마비될 대로 마비된 그런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해방구'를 찾은 것이 화근이었기 때문이다. 처참하게 숨져간 어린 청소년들을 무엇으로 위무할지 어른들은 이들의 영혼 앞에 참회해야 한다. 왜 그 많은 우리의 아들딸들이 그곳에서 숨져야 했는지 이제 어른들이 반성하고 대책을 세움으로써 다시는 그 같은 참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일밖에 다른 참회의 길이 없다.

첫째로 이른바 '해방구' 방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들이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법이 엄연히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술집에 청소년들이 제멋대로 들고 날수 있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금까지의 수사결과로 들어난 것을 보면 무허가 불법 업소와 이를 단속해야 할 공무원이 유착해 그런 해방구를 방치 하도록 내 몰았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문제의 화재 참사 호프집 주인을 비호한 혐의가 있는 공무원이 경찰서, 소방서, 구청 등에 60여명이 넘는다니 충격과 분노를 넘어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청소년들을 유해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설정한 '청소년 통행 금지구역 및 제한구역'(레드 존)이 야금야금 해제됐는가하면 단체장들이 선거를 의식해 단속을 소홀히 해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 직권 남용이거나 직무유기에 속한다.

둘째로는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천 호프집 화재로 희생된 10대들은 모두가 탈선, 불량소년이 아닌 보통 학생들이었고 이들이 술집을 찾게 된데는 갈만한 문화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집만 나서면 주위에 즐비한 PC방, 노래방, 소주방이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이들 청소년들을 건전하게 수용할 놀이 공간은 태부족이니 이러고도 청소년을 보호한다 할 수 있는지 반문해 보게 된다.

셋째로는 악덕 유흥업자들과 이들 업소들의 불법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요구된다. 청소년들에게 술을 팔고 유흥을 제공해 이득을 챙기는 일부 악덕 유흥업자들과 소방법은 있으나 마나 비상구조차 없는 무허가 업소들이 버젓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방치된 상황은 제 2, 제3의 호프집 화재 참사의 개연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건물과 업소들이 법대로 소방시설을 갖추도록 철저히 단속함은 물론, 어떤 재난에도 신속히 대피할 수 있는 비상구를 완벽하게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끝으로 가정과 학교, 부모와 교사들이 우리의 아들딸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선도할 것이 바라진다. 집에만 있으면 '공부 하라'는 말뿐 가족구성원간의 대화 부족이 청소년들을 가정 밖으로 맴돌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지적은 자녀들과의 대화가 청소년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임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국가, 사회, 가정의 모든 어른들이 심각하게 반문해 보고 대책을 빈틈없이 강구해야 한다는 이 준엄한 명제 앞에 다함께 옷깃을 여미고 청소년 선도에 모든 역량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언론매체에 청소년부를 별도로 설치해 우리의 아들딸들이 바르고 안전하고 건전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도 언론인의 전향적인 대책 강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윤종국군. 한혜승양 결혼 주례사. 98. 9. 12 )

  먼저 오늘 이처럼 화창한 가을날 길일을 택하여 결혼의 예를 갖추는 신랑 신부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두사람의 오늘이 있기까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키워주시고 가르쳐주신 양가의 부모님과 일가친척 여러분께도 축하와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공사 간 여러모로 바쁘신 가운데서도 귀중한 시간을 내시어 오늘 이 성스러운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주례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제가 영광스럽게도 신랑 윤종국군과 신부 한혜 승양이 백년가약을 맺는 이 화촉성전에 참석하여 주례를 맡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친자식을 장가보내는 기쁨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는 조금 전 사회자께서도 잠깐 소개 말씀이 있었습니다마는 신랑 종국군의 아버님과는 대학 동기 동창으로서 친동기간처럼 가까이 지내오는 사이입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 많으신 데도 굳이 제게 오늘 이 화촉성전을 집전 하도록 한데 대해서는 아마도 제가 아이들 결혼에 있어서는 좀 앞서간 입장이랄까, 2남 2 녀를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손자손녀도 여섯이나 둔 친구가 그래도 마음에 끌려 저를 이 자리에 세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신랑 아버님 윤영석 사장님은 대학 졸업 후 공직에 있으면서 그야말로 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했습니다.

지금도 매사에 자상하고 오직 정직성 하나만을 생명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오신, 이 시대 보기 드문 대표적 아버지상으로 친구들 사이에 소문나 있습니다.

부인께서도 보시는 대로 후덕 하셔서 며느님을 친딸 이 상으로 사랑해 주시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런 분을 부모님으로 모신 신랑 윤종국군은 형제 중 장남으로 이 나라 명문 사학중의 명문인 고려대학교 대 학원을 수료하고 지금은 첨단 산업인 컴퓨터 디자인 연 구소의 핵심 중견 간부로 있으면서, 연세대학교에서 특별강의를 맡을 정도로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청년입니다.

신부 한혜승양은 제가 이 자리에서 처음 봅니다마는 듣 자하니 명문 청주한씨 가문에서 곱게 자라서인지 단아 한 모습이 정말 파평윤씨 가문의 며느님 감으로 참으로 잘 선택 되셨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부 한혜승양은 따님 중에 셋째 따님이라 예부터 신붓감으로는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규수입니다.

신랑에 뒤질세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중앙 대학 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지금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강릉대학교 강사직까지 맡고 있으니 저로서는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씀보다 더 큰 찬사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를 이토록 훌륭하게 키워 시집장가 보내시는 양가의 부모님께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과 아울러 경의를

표해 마지않습니다.

이제 인생의 선배로서 신랑신부에게 몇 가지 당부 말씀 을 드리고저 합니다.

두 분 부모님께서 이미 자상한 가르침이 계셨을 것이고 조금 전에 두 분이 굳게 맹서한 혼인 서약에도 금과옥조 가 담겨 있습니다마는 먼저 결혼은 남남이 만나 가정을  이루는 첫 시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가정이란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그야 말로 피를 나눈 혈연관계를 맺는 시작인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환경에 속해 있던 생활공동체를 떠나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까지 익숙하게 지냈던 환경과는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삶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동안 각자가 다른 생활공동체에서 겪었던 문화 습관 생활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며 그래서 때로는 갈등과 부디침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결혼 전에는 좋은 점으로만 비쳐졌던 것이 결혼해서 함께 생활하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구였던가를 느끼게 될 수도 있고 평소에 그토록 깔끔하고 완벽하게만 보였던 서로의 모습에 실망을 느낄 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모든 변화와 실망 속에서 결혼생활이 행복하려면 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이해하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결혼해 살고 있는 많은 부부들은 공감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물론 사랑과 믿음이지만 그것을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이 참고 견디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서로 잘못을 감싸주고 차이점을 줄이도록 노력 하며 기다리는 인내심 ,되도록 즐겁고 기뻤던 일들만을 기억하려는 속에서 행복감은 싹트게 마련입니다.

인간이란 아무리 훌륭해도 완벽할 수가 없는 존재라고 봅니다. 훌륭한 사람도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는 것이고 살다보면 과오를 범하게 될 때가 아주 없다고는 단언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점이 설혹 눈에 뜨이더라도 서로 감싸주고 항상 마음속으로 한쪽 눈을 감는 그러한 자세를 갖고 서로의 실수에 대해서 너그럽게 이 해 하고 용서해 주면서 살아갈 때 가정은 화목해 질수 있습니다.

부부가 동시에 화를 내고 큰소리로 싸우는 일은 자신 의 건강이나 정서 그리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이롭 지 않습니다. 혹 의견 충돌이 있더라도 조용히 이성적으로 슬기롭게 풀어 가는 지혜를 발휘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신부께서 영문학을 공부하셨다니 더 말이필요없겠습니다마는 테니슨의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민들레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봄의 들판에서 사이좋게 놀던 소년소녀가 저녁때 집으로 가던 중 조그만 개천 이 있어 이곳을 건너는 일에 서로가 의견이 엇갈려 영원히 헤어져야 했다는 아주 교훈적인 내용입니다.

긴 여행의 도정에서 서로 어느 길을 갈 것인가로 의견이 달라지는 일에 서로 양보해서 항상 똑같은 길을 가라는 얘기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부부사이의 관계를 2인 3각 경기에 비유하는      분이 많습니다.

여보 당신이라는 부부가 사랑과 믿음이라는 끈으로 한쪽씩 발을 동여매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뛰는 경기를 말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호흡을 같이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가지런하게 함께 뛰지 않고서는 제대로 뛸 수도 없고 곧 넘어지고 마는 경기가 2인 삼각 경기입니다.

또 이 경기는 어느 날 하루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60년, 아니 백년을 함께 뛰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비가 오나 눈이오나 꾸준히 사이좋게 달려야하는 경기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얻어지지 않습니다. 늘 용서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고 감싸주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 그것을 나누고 극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랑은 진솔한 행복감을 안겨줄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 있고 이웃 간에 신뢰를 쌓아 간다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화목한 가정으로 부러 움을 독차지 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가화만사성이란 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욕심 같아서는 신랑아버님이 아들형제를 두셨으니까 역시 아들 형제에다 딸 하나를 더 낳으셔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양가의 집안 어른들과 이웃 어른들, 신랑 신부의 친구 분들을 비롯하여 많은 내빈들이 참석하고 계십니다.

부탁드리지 않더라도 의례 그러실 줄로 믿습니다마는

앞으로도 신랑신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면서 때로는 격려해주시고 때로는 충고도 해주셔서 신랑신부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물론 이고 우리 국가 사회를 위해서도 큰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실 것을 또한 당부 드리며 이만 주례사에 가름 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健康한 사회를 위하여

 건강은 사람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건전한 정신도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이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이치에서 볼 때 아무리 이상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려 해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건강치 못할 경우 모든 것이 뜻대로 성취되기 어려워진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병을 퇴치하겠다는 것은 이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옛부터 내려오는 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다. 윗사람 자신이 깨끗지 못하면 아랫사람들도 덩달아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위에서 썩고 오염된 흙탕물이 흐르는데 아래가 어찌 맑을 것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건강한 사회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우선 상식과 순리가 통해야 한다. 상식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그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말한다. 억지가 통하지 않고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이 곧 순리다. 상식을 부정하고 순리가 통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바른 사회가 아니다. 합리적인 사회란 쉽게 말해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너무도 상식과 순리가 외면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연(緣)이라 해서 끼리끼리 모이고 그들 집단의 이기주의가 판쳐 왔으며 법과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편법과 부조리가 더 판을 쳤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썩어도 이렇게 철저히 썩은 줄은 몰랐다”는 개탄의 소리가 국민들 사이에 없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상식과 순리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제도적 모순이나 허점이 부정부패로 이어진 상관관계도 근본은 상식과 순리가 매몰된데 기인한다. 제대로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서는 손해라는 인식,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문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편법주의가 사회 안에 팽배할 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성이 싹트기 쉽다는 점에서 다 같이 자성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사회가 되려면 먼저 시시비비가 분명해야 한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양심이 가치판단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본다면 최소한 양심(良心)이 지배하는 사회가 곧 합리적인 사회인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볼 때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일단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게 될 것이다. 양심에 호소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한 일이 많을 때 일단 그 사회는 건강진단을 새로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합리적일 때 결과 또한 정당하다는 논리는 신뢰사회 일때 설득력이 있다. 믿음이 통하는 사회, 신의와 성실이 존중되는 풍토에서는 불신보다 신뢰가 더 설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숙원처럼 강조해 왔던 지난날의 역사에서도 문제는 불합리한 사회에 있었다. 불합리한 사회에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 역사는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인간에 있어 이성이 마비되고 불합리한 사고와 행동이 앞설 때 그 결과는 온갖 모순을 낳고 갈등을 부르게 마련이다.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에 있어 상식과 순리는 생명선과도 같은 값진 덕목이다. 비리와 부조리, 그리고 부정부패가 문제되고 있지만 이 모두가 가치관의 매몰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 곧 정의의 수립과 가치관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 참된 법치주의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가리켜 법치주의라 정의하고 있지만 위로는 국가권력에서부터 아래로는 국민 개개인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법과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이 행해질 때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법이 있어도 있으나 마나라면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이기는 커녕 무법천지나 다름없게 된다. 법은 두고 보라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는 것이다. 다 같이 지키기로 약속된 것이 법이며 아무리 금과옥조라도 지키지 않으면 휴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이런 맥락에서 법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해돼야 한다. 양심과 도덕이 앞서고 법이 있어 법대로 되어지는 사회라면 범죄는 생겨날리 만무하다. 법을 어기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취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사회는 어지러워지고 범죄가 싹트는 것이다.

법이란 또 공정과 공평이 생명인 동시에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중요한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법을 어기고, 또 그 법을 어긴 사람이 더 잘 살고 큰소리친다면 누가 법을 따르고 존중하겠는가. 법이 엄격하게 집행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지키고 존중할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준법정신을 생활화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치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공직사회와 경제 분야 등의 모든 지도층에 만연된 배금주의, 사치 낭비풍조도 배격돼야 한다. 황금만능주의는 돈이면 무엇이고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란 말도 있지만 돈이면 죄지은 사람도 풀려나고 돈 없으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면 이보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은 없을 것이다.

힘 있는 자는 법망을 교묘히 뚫고 나가고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법통이 무시된 것을 의미한다. 법통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정의에 기초를 둘 때 바로 설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돈이면 무슨 일이고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져 왔다. 급행료다 뭐다 해서 안 될 것도 되고 시간이 걸려야 할 것도 돈을 주면 빨리 즉석에서 해결되던 때도 있었다. 뇌물을 바치면 더 어려운 일도 쉽게 풀렸으며 인사에서, 모든 인허가에서 돈이면 원하는 대로 다 되는 사회, 이런 사회는 정말 병들대로 병든 한국병의 극치 그것이다.

혹자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측면으로 억압과 착취, 부정부패의 만연, 단결 화합심의 결여등 세 가지를 손꼽기도 한다. 오랫동안 누적된 부정과 비리, 갈등의 병폐가 쌓일 대로 쌓였으니 사회 통합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척결하는 일이 시급해진 것이다. 몰상식과 불합리는 법을 집행하는 쪽에서도 철저히 배격돼야 할 비리다. 각종 불법과 탈법을 눈감아 주고 오히려 이를 부채질하거나 비호한 경우는 없었던가. 철저히 단속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불법자와 한 무리가 되어 부정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적지 않은 공직자들이 사법처리 돼야 했다.

비리의 뿌리를 파헤치는 일은 이래서 중요하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에서 모든 공직자들이 먼저 자성하고 과거의 비리 척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다.

가장 엄정하고 공평한 입장에 서서 법대로 행정을 펴야 할 공직자가 돈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자리를 치부의 수단쯤으로 생각한 데서 행정은 엉망이 되고 기강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버린 예가 많았다. 뇌물액수에 놀라고 그 부정수법에 분개하는 이면에는 결코 어느 누구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결연한 부정척결 의지가 있었다는 점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공직자 재산공개 과정에서 드러난 일부공직자 중에는 위장전입을 밥 먹듯 하고 토지의 지목 변경, 형질변경으로 불법건축을 합리화해 비난을 받았다.

상식은 곧 평범한 지식이다. 크게 깊이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인이면 누구나 보편적 가치로 느끼는 생활규범이라 할 수 있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상식이 풍부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이 할 도리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그가 못 배운 것을 탓하기보다 사람답지 못한 것을 비판한다. 사람다운 삶, 여기에도 상식이 통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흔히 많이 배운 사람이 더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다 철창신세를 질 때가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랄까. 너무 알다보니 그 아는 것을 기화로 남을 속이고 법을 위반해도 괜찮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나 배운 것을 악용한다면 아니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지식을 옳게 활용하고 선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단적인 예다.

사회가 건강해지고 건전해지려면 평범한 상식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 급선무다.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딛고 일어서려는 지나친 이기주의나,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독선이 지배한다면 그런 사회는 항상 불안하고 시끄러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사치와 낭비가 심한 사회에서 건전한 생활기풍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해서 상식을 외면한 채 우선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자는 생각은 옳지 않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돈 가지고 내가 쓴다고 마구 사치하고 낭비하는 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상식이 아니다. 절제와 검소한 생활기풍의 확립도 따지고 보면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행동철학이다. 이런 덕목들은 어릴때부터 생활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가정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생활규범으로 지키겠다는 인식이 보편화돼야 한다. 자기절제와 자기통제를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서 공동체 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만 아는 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일본의 예를 들어 어떨지 모르나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더 중요시하는 교육을 펴고 있다. 첫째는 가까이 있는 소집단에 참가하고 집단의 합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에 만족하는 의식, 둘째 화(和)를 존중하여 대세에 순응하고 개성을 희생하기도 하는 집단본능, 셋째 조직에 참가하여 조직의 상 하 서열을 지키고 온몸을 다바치는 것을 성실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곧 학교 교육에서 강조하는‘집단본능’이다. 이런 집단본능은 자기절제나 자기통제 없이는 생활화하기 어렵다.

일본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학교 외의 활동도 학생에게 협조행동을 가르치는 교육의 일부로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 내외에서의 경험이 졸업 후 기업 안에서나 사회활동에 그대로 반영될 때 그 사회나 직장 분위기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 하다. 지능이나 재능보다는 조직에 대한 기여도와 경험을 보다 높게 평가하는 인식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협조·협동심을 고양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만하다.

지나친 목적 지향적이기 보다는 값진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오직 자기만을 아는 독선과 아집, 그리고 지나친 이기주의가 팽배한 속에서는 협동심은커녕 따로따로 제각기일 뿐이고 그 결과는 사회나 국가발전을 정체시키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상식과 순리가 통하는 사회, 그것은 모두가 공동체 의식을 갖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같이 인식해야 하겠다.

우리 사회 현실을 보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더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 사람들이 과연 정직하게 돈을 모았는지도 의문이다. 정직하지 않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그 부의 축적과정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남들이 차례를 지키며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할 때 일확천금의 꿈이나 꾸면서 온갖 편법과 부조리를 앞세워 재산을 모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마라톤이나 달리기를 할 때 출발은 같지만 중도에서 차를 타고 달려 목적지에 1등으로 도착했다면 누가 그 결과에 승복하겠는가.

이런 논리는 사회 각 분야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시작이 공평치 못하고 더욱이 공정한 출발이 되지 못한다면 그런 경쟁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법과 질서는 생명이다. 그것을 생명처럼 알기에 법을 지키고 질서를 준수한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법과 질서는 안중에 없다. 법이나 질서를 무시해도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부정을 낳고 불법을 일으킨다.

부패, 투기, 인플레구조도 따지고 보면 쉽게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이런 사회 병리현상은 열심히 일하면서 근검절약하며 사는 사람들을 맥 빠지게 만든다. 땅 투기다, 아파트 투기다 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말을 주위에서 듣는 사람들이 과연 한 푼 한 푼 저축해가며 열심히 살 의욕이 생겨나겠는지 생각해보자.

국민 모두가 일한 만큼 잘 사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정의로워질 것이 요구된다. 사회정화운동이 요란하게 벌어졌어도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말만 앞서고 실천이 따르지 못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구두선만으로 끝나버렸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 하라는 식으로 자기 잘못은 제쳐 둔채 남의 잘못만 탓하는 오랜 타성도 문제다. 말만 앞서고 행동(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은 하나마나다. 금과옥조가 있어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휴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의사회란 곧 약속이 지켜지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법도 약속이고 규범도 사회가 만든 약속이다. 도덕규범 역시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서 그것을 덕목으로 실천할 때 사회가 건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동안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지역 간·산업간·부문 간의 불균형 성장과 빈부격차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어왔다. 정직한 사람이 존경받고 주위로부터 대접 받으려면 모든 부문에서 경쟁과 창의가 중시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다시 말해 페어플레이 정신이 존중되고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풍토를 말한다. 선의의 경쟁이 외면된 결과는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없고 그것을 승복하기는 더욱 어렵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고 모든 직장에서도 이치는 같다.

창의와 능률이 무시된 속에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선의의 경쟁이 무시된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경쟁의 결과는 아무리 그것이 국가적으로는 유익한 것일지라도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

'네 분수를 알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결코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려서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지나친 욕심도 따지고 보면 절제와 분수를 모르는 데서 생긴다. 흔히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분수에 넘친, 자기형편에 맞지 않는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 오히려 손해만 보고 마는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정직하지 못할 때 믿음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당위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생활윤리가 생겨나며 그런 생활윤리야말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다.

우리가 수없이 목격하는 크고 작은 갈등도 따지고 보면 서로가 불신상태 속에서 의심을 갖고 생활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국가간의 신뢰가 무너져 전쟁의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달은 경우는 수없이 많다. 하물며 사회단체에서의 상하관계에서 불신이 생길 때 그 결과는 파국의 위기를 몰고 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정부가 정직하지 못할 때를 가상해 보자.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 누가 그 정책을 믿으려 하겠는가. 국민을 기만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정부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나 다름없다.

언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국가가 패망하는 원인으로 크게 네 가지를 들었다. 그 하나는 국론이 분열됐을 때이고 둘째는 정부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부정부패이며, 셋째 그 나라 청소년들의 정신이 유약, 무력했을 때, 넷째 국민과 정부 사이에 불신감이 조성되었을 때, 말하자면 국민총화에 균열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나라는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라가 망하는 원인은 반드시 외부의 어떤 침입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 내부의 자중지란에도 큰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웃 월남의 패망사가 생생하게 실증해 준바 있다. 바로 내부적인 부정부패가 극치를 이루었고 공직자가 무사안일속에 빠져 있었으며 국론이 사분오열돼 국민총화가 무너졌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 만무했다.

정직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만이 강요된다든가 피동적인 입장에 서서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정부가 먼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행동으로 모든 국가시책을 보여 주고 솔직하고 정확한 시안을 밝힘으로써 국민이 납득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라는 것이다.

법치사회 정의 사회는 바로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법은 또 공명정대하게 적용돼야 한다. 누구는 법 위에 있고 누구는 법의 가혹한 심판대 위에 서는 불공평은 법의 신뢰와 권위를 실추시킨다.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어떤 사심도 작용해선 안 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는 법 앞엔 성역도 없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같다. 형평의 원리’그것이다. 사정(司正)의 칼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색하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가혹하리 만큼 무섭게 적용돼서도 안 된다. 큰 고기는 걸리지 않고 송사리만 걸리는 법망은 불공평한 법적용이다.

법 앞에 성역이 없다면서 권력 있고 배경 있는 사람들은 요리 조리 법망을 비켜간데서도 말이 안 된다. 정직하게 재산공개를 하기로 했으면 양심껏 공직자답게 공개할 일이지, 여기저기 재산을 은닉했다 해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온갖 창피를 다 당한 어느 공직자의 경우에서 법과 양심과 도덕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자기 혼자만 약은 것처럼 행동하다 자기 함정에 스스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경우는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국민이 아무리 땀을 흘려 일해도 몇몇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만 잘사는 사회여서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열심히 일한 결과에 만족하고 그 보람이 고르게 돌아가는 사회라야 한다. 부지런하게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무위도식하는 사람보다는 잘 살아야 한다.

분배정의란 말은 바로 땀 흘려 일한 사람에게 소득이 고르게 배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근로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으로 일해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데도 기업주만 모든 이익을 챙긴다면 노사관계가 원만해질 수 없다. 땀 흘려 일해 더 벌어들인 만큼 근로자에게 돌아가는 소득이 많을 때 일터는 더 신바람 나고 애사심이 북돋워 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땀을 어떻게 흘리는 것이 효과적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땀 흘려 보았자 땀 흘린 효과가 없다면 그 땀은 정력의 낭비나 다름없다. 시대는 바야흐로 첨단과학시대이다. 옛날과 같은 노동력만으로는 기업의 생산성을 제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땀을 효과적으로 흘리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과학적인 시설투자에서 찾고, 업무능률의 향상을 위한 지혜와 슬기의 창출에서 부단히 모색할 때

국가사회의 발전은 경제적인 풍토를 보장받게 될이다

모든 병은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처방이 있을 때만 치유가 가능하다. 한국병의 원인과 처방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분석,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침체국면의 경제도 활성화시키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안겨 주어야한다.

깨끗한 정치를 위해서는 돈 안 쓰는 정치, 돈 안 드는 선거를 통한 정치 비용의 절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음성적인 정치자금 마련은 과거에 흔히 보아 왔듯이 개인적인 축재와 치부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정경유착과 권력형 부정부패, 비리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이라는 공직을 이용해 청탁을 알선해 주거나 이권을 따 주고 돈을 받거나 기업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고 각종 인사나 정부 정책 등에 관여해 정치자금을 염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혹과 물의를 일으켜 왔던 것이 사실이다.

부정부패, 그것은 총체적으로 한국병을 집약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체에 만연된 부정부패, 이것이 통치권의 상실이라는 위기로까지 치달은 예를 남미의 경우에서 잘 목격하고 있다.

지역주의와 귀속주의가 남긴 폐단도 많았다.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주의가 그것이다. 이로 인해 생긴 파벌과 극단적인 이해갈등으로 인한 정체와 퇴영적 부패구조는 또 얼마나 심각했는지 생각해 보자. 동창, 친인척, 학연 등의 유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이들 사이의 일이라면 설혹 그것이 불법적이고 위법적이고 탈법적인 것이라도 오히려 용인되고 합리화시켜 주는 풍토 하에서는 준법정신이 강조되고 법치주의가 가능해질 수 없다.

끼리끼리 사회의 병리는 쉽게 말해 사회를 이중 삼중으로 분열시킨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공존의 윤리를 실종시키며 집단 간의 갈등을 불러 공존공영의 장래와는 거리가 먼 집단이기주의를 팽배시키기 일쑤다. 이런 사회에서는 능력, 업무의 효율보다 연(緣)'을 대기에 바쁘고 철저한 보신주의가 싹트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한국병을 도지게 한 의식구조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빗나간 실적주의다. 수단보다 목적 우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요령주의와 업적주의는 동전의 앞뒤와 같다. 지나친 업적주의가 요령주의를 낳고, 요령이 판치다 보면 결과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목적만 달성되면 과정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식의 잘못된 군사문화의 잔재가 우리 사회에 요령주의와 업적주의를 뿌리 깊게 심어놓았다는 지적도 많다. 공무원사회를 비롯해 일반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사안일도 이런 요령주의와 업적주의가 부른 나태의 한 단면이다. 골치 아픈 일 안하기, 새로운 일 안하기, 시키는 일만 생색내기가 바로 요령주의의 표본에 속한다.

요행수를 바라고 한탕해서 돈을 끌어 모으겠다는 생각이 문제다. 도박은 개인적으로는 근로의식을 저하시키고 사회적으로는 한탕주의를 만연케 하는 대표적인 사회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도박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성실하게 일해 일한 만큼의 노력의 대가를 얻을수 있다는 사회풍토의 조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온 지구촌이 부패척결에 나선 느낌이다. 독일, 이태리, 가까이는 일본, 중국에서까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자는 사정태풍이 몰아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냉전시대의 썩은 관행을 일시에 혁신하겠다는 국민적 공감대, 그것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한국병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것은 시민정신 결여로 인한 사회공동체 붕괴라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부정부패나 비리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한국병이 퇴치되어진 합리적인 사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의미의 건강한 사회이며 그 속에서 생활하는 국민 모두의 정신도 건전해지고 어떤 불의와 부정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한국병 치유의 당위성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자는 데 있다. 자유월남이 부패와 부조리 때문에 패망했다는 역사적인 교훈, 과거 장개석 정부가 모택동에게 패배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부정부패 등 취약성 때문이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나라의 안보란 군사적인 전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정신전력도 국가 안보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 국민의 정신전력이란 특히 건전한 국민정신에서 샘솟는다. 국민의 정신자세가 이완되고 온갖 부패와 부정으로 오염돼 있을 때는 애국심은 고사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뭉치지 못하고 흩어지기 쉽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려면 먼저 가진 자들이 베풀어야 하고 양보해야 한다. 국민화합이란 지역적으로 계층적으로 대립돼 있는 상황에선 얻어질 수 없다. 감정으로 대립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된다거나 온갖 이기주의로 가득찬 사회에서 이웃과 화합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가능한지 모르나 내심 우러나오는 진정한 화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먼저 집권층과 정치인들이 자정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공직자 관료사회의 부패와 권력남용, 나태와 무사안일과 무책임을 추방하여 전 공직자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결연한 자정의지를 발휘하여 국민의정부 공직자답게 거듭나야 한다. 부정부패 척결에 성공한 대만의 장개석 총통과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이 보여준 피나는 자정 노력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무서운 실천력을 우리도 본받아 마땅하다. 한국의 '잠롱'이 따로 없다. 모두가 잠롱처럼 청렴하고 공명정대하게 공무를 집행할 때 부정은 감히 발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99년1월4일 발행 이제 나라를 생각할 때다 기고문)


新聞과 社會發展

( 99년 11월 18일 세명대 경영행정대학원 특강 원고)

1. 신문의 사회적 기능

가. 일반적 기능

  오늘날 신문(광의의 언론)의 기능하면 그런대로 신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먼저 신문이 독자에게 대하여 어떻게 작용하느냐, 또 그러한 작용의 결과 독자가 속하는 사회나 집단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신문의 기능을 크게 나누면 사실보도, 여론유도 또는 레이저 오락 그리고 이 세 가지를 다 내포한 기능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실을 전달하고 신문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하며 설득하는 과정에서 신문의 역할과 사명이 제대로 평가되게 마련이다. 신문이 독자에게 직접 작용하는 지도적 기능은 독자로 하여금 현실적인 문제가 제시되었을 때 옳은 판단과 식견을 가지고 이를 바라 볼 수 있도록 하자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인이 전부 동일한 견해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독자의 판단과 신문의 의견이 상치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은 항상 공통적인 사회의 의견과 관심을 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신문 논설 역시 이런 신문의 기능과 역할의 범주를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사명을 집약적으로, 또는 지도적으로 대변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신문논설의 사회적 기능도 따지고 보면 모든 신문기능의 일부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신문 중에서 독자에게 공공연히 주장을 내세우고 그 신문의 입장을 매일 피력하고 있는 난은 사설과 논평난이다. 사설을 통해서 독자는 그 신문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으며 신문의 논조가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논평 난은 기명, 무기명 할 것 없이 신문보도의 보다 자세한 해설로 어떤 사실을 분석 평가하고 장래까지 전망하게 하는 풀이로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이 신문사설, 내지는 논설란이 독자로부터 심한 불신 속에 경시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신문의 사설이 너무 약하다든지 그 독자성이 너무 존중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왜 이런 결과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언론 내적인, 혹은 언론외적으로 그 요인이 지적되고 분석될 수 있을 것이며 논자에 따라 그 보는 각도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문인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생활을 영위 하는 사람인만큼 그런 신문인이 모인 신문사도 사회의 흐름에 고립되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어느 특정인, 또는 제한된 독자만이 아니라 다양하며 읽는 이 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때로는 그런 이해가 상충되는 사람이 같은 신문을 읽게 된다. 하기는 이들 다양한 독자들의 비위를 고루 다 맞추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독자들의 의견을 고루 반영시키자는 것이 신문의 공통된 희망이며 그런 편집방향에서 신문이 제작되고 있는 줄 안다. 따라서 신문은 신문사 마다 그 독자적인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기에 앞서 독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말하자면 사설이 강한 주장을 못 펴고 있는 것도 신문도 상품인 이상 고객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신문인은 항상 무엇인가 고민해야 하고 신문이 가지는 본래의 기능과 현실 사이의 마찰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물론 일부 독자의 비판처럼 신문논설이 어떤 정치적 여건 때문에, 다시 말하면 언론외적인 요인으로 해서 또 한편으로는 국토가 분단된 나라의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독자성을 잃거나 힘없이 그런 요인에 위축되고 있다는 데에도 전적으로 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집요하게 강요되는 여러 가지 제약에 대해서 신문인도 달리 이론을 펼 수 없는 입장이 되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함께 느끼는 한 신문은 항상 그런 협조에 대해서 인색할 수 없을 것이다.

신문인도 사회인인 만큼 신문종사자로서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각종 법률의 내용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런 제약이 심하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신문은 스스로 자가비판의 기회를 배제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독자의 비판에 대해서도 신문은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신문논설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신문의 입장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 내용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왜 이 논설을 써야 하느냐 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논설을 쓰는「논설기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계도 적이든 지도적이든 단순한 해설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강조하려는 주장에 강한 설득력과 이해를 기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신문논설은 흔히 편집인이나 경영자의 의견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논설자의 주관적 견해에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쓰는 사람의 주관이 많이 작용한다.「논설기자」의 양심, 용기 그리고 신념이 중시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오늘의 신문논설을 주의 깊게 관찰해온 사람이면 신문이 사회의 부조리에 매우 민감해왔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정치문제에 대한 찬반이나 정부 시책의 시시비비보다도 그날그날의 사회문제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다루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불신을 받고 있는 신문이 그나마 독자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신문이 그런대로 사회문제에 민감한 때문이라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만약 신문마저 부정부패에 둔감했다면 이 사회가 어느 정도였을까 상상해보라. 그렇지 않아도 세태를 개탄한다는 소리가 높은 이때 신문의 고발역량은 신문이 갖는 중요한 역할이며 이에 대한 강한 호소력은 바로 신문논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신문의 영향력이 얼마만큼 만족스럽게 사회를 정화시켜 왔느냐고 묻는다면 선듯 대답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이 명실상부한 계몽지로서의 역할에 좀더 충실하기 위해서는 신문이 계속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경주해야 한다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사회정의의 구현은 신문이 앞장서서 이룩해야 할 명제요 신문인의 사명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신문논설도 이점에 눈을 크게 떠야하고 사회인으로서 궁금해 하고 부닥치는 시련에 고민하는 것들을 진단함으로써 가능한 처방책까지 제시하는 예지와 총명이 기대된다. 자원난이다 물가고다 해서 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국민도의와 윤리관이 날로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개탄도 없지 않다. 패륜으로 지탄을 받고 흉악범이 날뛰고 있다는 세태를 신문은 너무도 잘 고발하고 있다. 신문논설이 제대로 지도적 기능을 다하려면 이 퇴폐한 세태를 정화하는데 누구보다도 밝은 형안을 가지고 내일을 향도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 신문의 공공성과 국가관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는 범죄의 수법도 지능화되고 국제화되어 역시 과학적인 방법과 수법이 동원 되고 있다. 매스컴이 사회정의의 구심 역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시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에 손색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물질만능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의 양심에 호소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풍토를 양성하는 일은 우리 언론에게 맡겨진 중요한 책임이며 과제라 할 것이다. 세상이 물질에 너무 치우치고 기계에 의해 모든 것이 처리되다보면 인정은 메마르고 각박해질 뿐이다. 건전사회를 향한 매스미디어의 역할은 과학시대에 살수록 더 기대되는 일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지금 제대로 비판기능을 행사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매스컴기능의 공공성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의 사명은 책임 있는 자유언론을 통해 사회공익을 추구하고 국가의 번영과 안전을 도모하는데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언론이 그 본연의 사명에 비추어 과연 제대로 자부와 긍지를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언론의 자율적 기능이 너무 약해지면 질수록 고발주체로서의 언론의 역할은 나약해질 뿐이다. 매스컴은 권력의 시녀도 아니며 그렇다고 독자에 아부하고 편승하는 것만을 기쁨으로 알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건설의 우렁찬 망치소리를 들으며 또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적 숙원을 향한 기반구축에 최선을 다해야할 입장에 있다. 언론 역시 이러한 국가적 요구를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크게는 국가이익 그리고 사회공공성이라고 하는 지상명제앞에 小利를 앞세울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정의를 향한 민주언론이 국가지상주의나 정부편향에 지나치게 작용을 받음으로써 정보화 사회를 사는 국민들에게 가치판단의 획일 을 강요하는 것까지를 환영하자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국민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참여의식을 감퇴시키지 않는 방향에서의 진로 모색인 것이다.

당국이 생각하는 국가관과 언론의 입장에서의 공익성이 원천에 있어서는 같으나 현실적인 인식에서의 차이 때문에 상층 되는 경우 언론의 입장은 난처해지기 쉽다. 굳이 언론의 자주성을 논할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국론을 집약하고 객관적인 현실분석을 토대로한 국민의 참여의식을 부단히 고무하려는 언론 스스로의 노력이 관주도의 인상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다.

언론의 독자성, 그 자유로운 판단의 기초위에서 정론을 펴고 직언을 과감히 할 수 있는 한국 매스컴의 내일은 발전하는 자유사회의 중요한 저력으로 평가돼 마땅할 줄 안다. 북한공산주의의 남침위협속에서 국가를 지키고 국민의 자유와 창의를 보장하는 선봉역으로서의 언론, 국민의 현명과 지혜와 슬기를 창출할 수 있는 훌륭한 향도자로서의 목탁이 되어야 할 언론의 입장에서 우리가 극복해야할 시련은 너무도 많다. 높은 국제안목과 최신의 정보와 깊은 지식을 겸비한 언론인이 신문과 방송에 더 많이 종사함으로써 사회교육적인 측면에서도 언론은 더욱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고 관권이나 대중의 압력에 언제고 초연할 수 있어야하며 누구나 신문에 난 기사와 방송보도를 믿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아야 할 줄 안다.


2.매스미디어의 순기능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생활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런 사회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요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생활을 영위해감에 있어서는 제각기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게 마련인데 그 중요한 수단이 매스 미디어인 것이다.

매스 미디어라고 하면 대중을 향해 대량으로 인쇄·방송되는 모든 것을 지칭하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등이다.

복잡다기한 사회에서 우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러한 매스 미디어로 생활정보와 정치의식, 또는 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매스 미디어의 영향을 논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정보전달 수단인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그것이 국민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지대한 것이다. 그 가운데 신문의 경우를 예로 들더라도 그 기능면에서 사회 교육적 가치는 한층 높이 평가되고 있다.

흔히 신문의 기능을 손꼽을 때 교육의 기능, 선전의 기능, 오락적 기능으로 대별하는 것이 상례지만 현대 사회에 있어 신문이 갖는 교육적 기능은 국가발전과도 밀

접,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신문종사자들의 자부다.

사회교육, 성인교육, 혹은 생애교육의 유효한 수단의 하나로서 학교교육에서 가르치지지 못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신문이다. 뿐만 아니라 신문은 소비자 주권의 보호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해 매스 미디어가 창출해 내는 다양한 지식은 미래 사회의 발전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신문만이 아니라 TV, 라디오, 잡지와 같은 대중매체들도 그것이 갖는 유익한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의 기능면에서 보다 알차고 보람 있는 인간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할 지식을 듬뿍 싣고 알리려 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방송은 특히 우리 사회인의 생활을 지도한다고 일컬어진다. 직접적으로 어떤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 기능보다는 경쾌한 음악, 만담, 코미디, 기타 재미있는 오락물과 교양 좌담 등으로 우리 생활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가운데 충분히 그 지도적, 계도적 기능을 다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라디오, TV가 우리들에 주는 영향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를 들면 ① 지식을 넓혀주며, ② 생각을 깊게 하며, ③ 행동성에 자극을 주고, ④ 정치적 비판력을 길러준다는 한 교육전문가의 지적을 상기할 때 매스 미디어 가운데 라디오, TV가 국민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신문이나 방송, 잡지 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이와 같은 사회 교육적 기능과 역할은 바로 이 때문에 막중한 책임이 강조되곤 한다. 매스 미디어의 책임, 여기에 신문, 방송의 공공성과 윤리성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까닭이 있음은 물론이다.


3. 매스미디어의 역기능

 매스 미디어는 때로 역기능 면에서 보면 비교육적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우선 매스 커뮤니케이션 속의 범죄와 폭력의 경우에 눈을 돌려 보자. 범죄와 폭력의 묘사가 미디어 속에 많이 나타난다는 것도 많은 뜻있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공감이다. 왜냐하면 이 많은 폭력 묘사물들이 독자나 시청자들이 실제로 폭력을 범하게 될 정도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잔인한 드릴러극이나 미스터리 영화, 그리고 저속하기 이를 데 없는 비도덕적인 방송극과 가요, 부정한 남녀 문제를 다룬 것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소년범죄가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범죄 물을 모방함으로 빚어진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다. 발랄하게 성장하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이나 욕구를 무조건 막고 차단한다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을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선도하느냐 하는 것은 어른들의 책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매스 미디어, 특히 신문이 지나치게 독선적이라는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독자의 알 권리를 정당하게 대변한다는 것은 신문 특유의 보람이지만 독자의 판단을 강요한 다거나 편견을 가지고 여론을 오도할 경우, 신문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론기본법 조항을 구태여 들출 필요도 없이 신문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다면 이것도 비교육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언론의 국가 사회적(교육적) 책임

 매스 미디어의 공공적, 그 도덕적 차원의 중요한 역할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은 한마디로 긍정적이다. 그것이 가정교육, 사회교육 특히 학교의 교육 현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일쑤였던 것도 우리는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매스 미디어가 제대로 교육적 기능을 다하려면 종사원들의 교육적 안목이 높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신문이나 방송, 잡지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매스 미디어가 사회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해선 안 될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교육정책 당국자와 매스 미디어 종사자들과의 유기적인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신문의 보도 형태나 논조는 교육기관 및 학교교육을 평면적으로 논평 보도하는 데 그치기보다 교육의 이념이 무엇이며, 국민의 교육적 욕구가 어떤 것이며, 국가발전에 따른 교육의 방향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깊이 규명하고 재검토하는 입장에서 이를 입체적으로 다루는 안목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 전문가로서의 전문기자 양성이 바람직하며 교육 전담부서나 팀의 구성이 필요하리라 본다.

매스 미디어에 대한 교육 정책 당국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신문을 중심으로 한 학습 분야를 개척해 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교육방법이 창출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와서 TV의 교육방송 프로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신문이나 잡지들의 경우에도 교육면을 크게 할애함으로써 국민의 다양한 교육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도 산업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 신문이나 방송 등 매스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의 경제적 가치도 중요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보의 문화적인 가치와 교육적인 가치를 도외시할 수 없음을 감안할 때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부 및 교육 유관 기관과 지식산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매스 미디어 상호간의 공통된 과제와 사명은 아무리 강조돼도 지나치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신문이나 방송의 경우 교육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교육문제만큼 국민의 관심이 큰 뉴스거리도 없고 보면 교육에 과민하다는 것은 그만큼 교육열이 높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할 것 같다.

이제 교육은 학교에서만 받는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또 학교만 졸업하면 교육은 끝났다는 인식은 큰 착각이라는 사실도 널리 공감되고 있다.

사회가 하나의 학습장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오늘의 평생교육 차원의 다양한 교육 욕구에 대해 매스 미디어의 역할은 더욱 막중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언론 윤리의 확립

 언론이 사회발전의 구심역이 되려면 먼저 언론에 종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윤리관 확립이 요구된다.

최근에 물의를 빚었던 '언론 문건' 파문도 따지고 보면 기자의 윤리문제로 귀착되는 언론의 치부를 그대로 들어냈다는 점에서 언론계 내부에서 자성의 소리가 높았다.

'권언유착' 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언론 문건' 파문은 언론이 이익집단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극명하게 일깨워 준다. "언론인은 직능, 직업, 이익단체 및 특정종교나 종파 등 어떠한 사회세력과 기업 등 어떠한 경제력의 부당한 압력, 금전적 유혹이나 청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언론윤리강령을 상기할 때 더욱 그렇다.

언론윤리강령은 언론자유 수호와 공정보도를 강조하는 선언적 의미와 함께 품위유지, 올바른 정보사용, 정당한 정보수집, 사생활보호, 오보의 정정, 판매, 광고활동의 범위등 실재 취재행위를 규정하는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품위유지와 관련된 세부지침은 구체적으로 기자의 공정하고 품위 있는 취재 활동을 해치는 취재원의 경비부담, 선물, 향응, 편의 제공, 그리고 이른바 촌지라고 불리는 것은 일절 받지 않아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언론인들의 윤리의식이 매몰된 속에서는 언론비리와 부패척결을 위한 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취재원이 제공하는 구두발표와 보도자료는 사실의 엄격한 검증을 통해 확인하여 보도해야 하며 특히 홍보자료를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함을 경계해야한다"는 언론윤리강령 보도준칙은 언론인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좌우명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언론은 사회발전과 밀접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이 긍정적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순기능이 강화돼야 하며 국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언론인의 양식이 투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變革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오늘과 내일의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특별히 초청돼 나온 시사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정운종입니다.

먼저 이 귀중한 시간에 저의 강연을 듣기 위해 나오신 이곳 학생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처럼 좋은 학교에서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는 춘천 소년원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에서 시행한 청소년 선도 강연의 연사로 참여했고 서울 한서고등학교에서도 1학년 480명을 대상으로 청소년 선도 교육을 실시한바 있습니다.

저는 주로 통일안보 문제를 관심 있게 관찰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강연을 주로 해 왔습니다마는 오늘은 좀 다른 시각에서 여러분과 의견을 교환하려 합니다.

우리가 처한 오늘과 2천년을 목전에 두고 내일의 문제를 조망해보면서 학생 여러분의 입장을 저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강연제목을 "변혁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정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룩한 과학문명의 경이적인 발달은 우리가 일찍이 생각 할 수 없었던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의 그리고 쾌락을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 같은 과학의 경이적 발달이 우리 인간에게 정신적 빈곤과 인간성의 타락에서 오는 여러 가지 범죄와 새로운 사회악이 늘어나는가 하면 환경과 에너지 고갈, 국경 없는 경제의 무한경쟁 등 현대문명의 역기능도 적지 않아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현대 산업사회의 대부분의 사회적 문제들이 과학기술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방금 말씀드린 대로 환경문제, 에너지 문제, 핵문제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 국제간의 특허권 분쟁, 산업스파이, 컴퓨터 범죄 와 같은 새로운 문제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더욱이 이제는 개인자유의 침해를 훨씬 뛰어 넘어 정보사회로의 진입과 생물기술의 발달로 인해 개인의 비밀이 보장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유전자 조작, 생명윤리 등의 문제가 뜻하지 않은 양상으로 나타나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뿌리에서는 감자가 영글고 가지에서는 토마토가 달리는 이른바 포마토(포테이토-토마토의 합성어)라는 작물은 그것대로 유익하다고 보겠으나 기술의 힘을 빌어 사람까지 공장의 제품처럼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 생긴다고 가정해 보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1932년에 영국의 헉슬리가 그린 용감한 세계(A BRAVE NEW WORD)라는 작품을 보면 인간은 난자와 정자를 제공할 뿐 벨트 컨베이어에 실려 태아기 운반되어 하루에 수천 명씩의 아기가 공장제품으로 생산되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가상한바 있는데 오늘의 유전공학은 이러한 상상이 허구가 아님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1996년 7월 5일 오후 4시 영국 에딘버러의 로스린 연구소에서 복제돼 나온 새끼양 둘리의 출현은 성숙한 6년생 암양의 몸 일부를 떼어내 이를 핵이식이라는 방법으로 복제해 낸 생명복재의 과학적개가였습니다.(월머트 박사와 카이스캠벨박사)

둘리의 탄생이후 과학자들은 경쟁적으로 동물들을 복재했고, 일본 긴키대(近畿大)연구팀은 쌍둥이 송아지를. 미국 오리곤주의 과학자들은 원숭이를 복재해 인류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 하와이대에서는 생쥐를 5세대나 걸쳐 연속적로 복재한바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서울대 황우석교수팀이 복제젖소와 한우를 탄생시켰고 영국 로슬린연구소는 사람의 유전자를 지닌 양 폴리를 만들어 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사람인데 이 기술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복제인간도 아주 쉽게 공산품처럼 생산해 낼 수  있게 된 참으로 어이없는 이 과학의 힘을 과연 우리가 인류의 개가라고만 경탄해야 하는지,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많은 미래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생명복재는 과연 복음인가 재앙인가를 심각하게 문제 삼아야 할 시점입니다.

또 산업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환경재난은 더욱 우리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음을 피부로 경험하며 느끼고 있습니다. 온갖 유해물질의 양산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하나뿐인 지구를 병들게 했는가 하면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머지않아 일본열도가 침몰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들리고 있을 정도로 오존층 파괴가 심각하다는 지적입니다.

세계자연보호기금과 영국 이스트 앵글라이아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것을 보면 지구온난화현상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서기 2080년에는 세계평균기온이 1999년에 비해 섭씨 최대 3.9도 상승하고 해수면은 최대 104센티 정도 올라갈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일본열도의 모든 해수욕장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일본열도가 물에 잠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한국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은 물론이고 대기오염, 수질오염, 소음문제도 과학문명이 가져다 준 공해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컴퓨터 통신의 편의도 그것이 유익하게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역이용한 온갖 범죄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개인의 정보를 빼내 팔아먹고 컴퓨터를 작동시켜 개인구좌에서 예금을 송두리째 빼가는 신종범죄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문명의 현주소와 그 위력이 보여주는 밝고 어두운 양면성을 올바로 판단하고 예측하는 동시에 우리가 겪어온 과거와 오늘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길을 지혜롭게 개척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낙오되지 않고 보람 있게 사는 길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인간만이 지닌 높은 기능과 양심, 그리고 이성을 올바로 발휘 할 때 그 존엄성을 구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은 물질적 가치에 우선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이념이라든지, 체제 인종과 종교, 성별, 신분, 지역과 직종을 초월하여 존중되고 구현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성 상실과 도덕적 타락이 얼마나 많은 잘못을 가져 오는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탐욕과 거짓, 위선과 퇴폐, 음난, 사치, 허영, 방종과 무질서, 남을 중상 모략한다든지 잔인한 폭력이 난무한다든지, 파괴와 살상 등이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회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되고 선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도덕성을 함양하여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고 협동하며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제가 생각하는 삶의 지혜는 건강한 도덕적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모아져야 한다 이것입니다.

새롭고 바람직한 인간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선량하고 건전한 도덕성과 주인의식을 갖춘 자유 인격으로 날마다 거듭나며 성숙해 갈 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맡은 소임을 다하고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때 사회는 그만큼 건전, 명랑해 질것입니다.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속이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억압하지 않으며, 서로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믿고 사랑하며 친절하고 품위 있는 신용사회, 그야말로 정이 듬뿍 넘치는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는 가정과 학교. 사회윤리의 회복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학교 교실이 붕괴돼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습니다 마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성 문제는 심각해 질 때로 심각하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입니다. 급속한 사회 변동에 따라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정의 윤리가 손실되어 가고 있으며 이른바 핵가족화 현상으로 가족구성원간의 정이 갈수록 메말라가고 있다는 지적은 가정이 가정답게 자리 메김을 하지 못한데서 야기된 폐단이라 하겠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공경하며 모시는 효도에 힘쓴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가 되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성현 말씀에 효도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라 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제일의 덕목으로 강조한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삼강오륜이라는 말을 아시겠지만 부모와 자식 그리고 부부간에 지켜야할 기본적인 도리에서부터 스승과 제자, 어른과 아이, 친구와 친구사이에 마땅히 지켜야할 상경하애와 신의가 존중될 때 사회는 더욱 명랑해지고 모든 범죄도 살아 질것입니다.

너무 수신교과서적인 얘기가 될지 모르나 사람은 자기 전에 세 가지를 반성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하루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으며 혹 비애국적인 행동을 한일은 없는가하는 반성이고 둘째는 배운 것을 제대로 실천했는가하는  반성이고 셋째는 친구와 사귐에 있어 신의를 저바리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 이세가지입니다. 여러 학생들도 하루에 이세가지만 꼭 반성하고 잠자리에 든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보나마나 걱정을 안해도 되는 지상천국이 되리라  확신 합니다.

얼마 전 어느 방송에서 추적 60분이라는 프로를 보니까 학교교실이 붕괴 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우려 속에서 일부 학교의 수업태도를 몰래 카메라로 잡은 것을 방영했는데 저는 역으로 그만큼 학생들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연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저렇게 엉망이 돼도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수업태도와 관련해서 제가 옛날 중학교에 갓 입학해서 수학시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바로 전시간이 국어 시간이었다고 기억됩니다마는 수학시간에 수학책을 빨리 꺼내놓고 선생님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 화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수학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맨 앞줄에서부터 학생들을 한명 일으켜 세우시는 거예요. 그런 다음 요즘 같아서는 학교폭력으로 112를 돌릴지도 모를 그야말로 눈에 번갯불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저도 그중의 한사람으로 뺨을 맞았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수학시간에 수학책을 펴야지 왜 다른 책을 펴놓고 있느냐, 말하자면 수업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을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그때이후로 저는 매사에 준비하는 습성이  생긴 것으로 생각돼 가끔 글 쓸 때 인용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준비하고 대비하는 자세는 미래를 아름답고 보람되게 개척하려는 기본적인 생활 자세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수업에 임할 때도  이점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고등학교 1학년 성적에 대해 어느 신문이 보도한 것을 보니까  반평균이 90점 이상인데 시험문제를 쉽게 내서 모두 '수'를 맞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002년 무시험 대학진학을 앞두고 자기학교의 내신 성적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적뻥튀기 경쟁을 벌이고 있어 성적은 오르고 학력은 떨어지는 현상을 빚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교육현장이 바뀌어도 되겠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가정과 사회의 윤리문제를 얘기하다 다른 얘기로 번졌습니다마는 사회가 어지럽고 각박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모두가 도덕적인 면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인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못한데 연유 한다는 것을 지적해 둠으로써 여러 학생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넷째는 국제 경쟁력 강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21세기는 다음세가지로 특징지어 질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지적입니다.

첫째는 그로발리제이션시대(지구촌시대 울타리와 국경이 없어 졌다.)

둘째, 경제민족주의 파고(WTO. 개방파고)

셋째, 정보혁명의 파고 즉 인터넷 등장(노트북; 5천배 빠른 정보처리능력)

이렇게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세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람다운 삶을 살아 갈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모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격증시대라 할까, 라이센스 없이는 직업도 갖기 어려운 시대가 이미 도래하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라도 기술을 배우고 노하우를 익히는 것이 경쟁에 뒤지지 않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국민성을 가리켜 너무 조급하고 끝마무리가 시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적당주의가 지나쳐 건설현장에서 사고가 잦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도덕적으로는 다른 나라 국민에 비해 뛰어나지만 협동심이 약하고 탐구력이 떨어지는 등의 결점이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여기 국민성을 비교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어  하나 소개해보면 이렇습니다.

미국의 한 부자가 녹색줄 무늬 말을 발견한 사람에게 100만 달러의 상금을 준다고 현상을 걸었는데 이를 본 독일 사람은 도서관으로 달려가 진화론을 뒤지기 시작하고 미국사람은 실험실에 들어가 유전자 조작에 몰두하고, 프랑스 사람은 시장에 달려가 노새 한 마리와 백색, 녹색 페인트를 사고, 스페인사람들은 우선 전야제부터 열어 자축부터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아프리카로 날아가 경건하게 산제부터 지내고 이 들판, 저산을 넘어 다니며 산삼 찾든 헤맸을 것이라는 웃으게 소리가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지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에만 집착하거나 적당주의로 매사를 처리할 때 결과는 성수대교와 삼풍상가의 붕괴와 같은 모래성을 쌓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98년 한해 사고로 12,000명 사망, 지난 10년간 15만 9백 명이 사고로 사망, 경제손실 143조원)

또 한 가지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평화적인 남북통일과 민족의 공동발전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분단시대의 우리에게는 조국을 통일하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숭고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부흥 발전하기위해서는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를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해야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만의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전인구의 50%가 죽고 국토의 90%가 괴멸될 것이라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예측입니다. 6.25전쟁 때보다 남북한의 무기가 15배나 늘어났고 위력은 그때보다 8배, 파괴력은 120배나 증가했다니까 전쟁은 곧 민족의 자멸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것입니다.

통일은 또 아무렇게나 남북이 하나로 통일만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첫째로 통일조국의 미래상은 자주적인 민족국가여야 합니다.

둘째 조국 통일의 미래상은 민족성원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평화국가여야 합니다.

셋째 자유로운 민주 국가, 넷째, 풍요로운 복지 국가

다섯째 문화국가의 건설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조국의 미래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올바른 통일은 민족성원 모두의 항구적인 자유, 인권,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이를 앞당기기 위한 최선의 정책방향이라 하겠습니다.

오늘과 내일 우리의 국가적인 문제는 이쯤하고 이제 여러 학생들의 문제로 시야를 좁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여러 학생들의 연령층을 가리켜 청소년기라고 부릅니다. 활기 있고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그야말로 신선한 미래를 꿈꾸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학생들은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며 긴장감이 감도는 그런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는 연령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실망과 좌절이 교차하면서 "이유 없는 반항"이랄까 "공연히 저항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쉬운 나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실제로 진학문제, 취업문제, 장래의 진로문제로 고민할 때이고 이성문제 교우문제까지 겹쳐 중심을 잡지 못해 방황하기 쉬운 때가 바로 청소년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양  좌절하거나 무의미하게 청소년기를 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몇 가지를 강조해 말씀드림으로서 오늘의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능력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일입니다. 나도 할수 있다는 확신, 그것은 인생을 보다 긍정적으로 이끄는 힘이 될 것입니다.

둘째,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눈앞의 것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좀 더 먼 곳을 바라보며 미래를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먼 곳의 꿈을 바라보며 때 묻은 오늘을 순화하고 정화시켜 나갈 때 우리는 현재보다 보람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바른 행실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행실은 반드시 바르고 성실하고 정중해야 합니다. 단정하고 엄정하며 약속한 일을 굳게 지키는 생활태도로 일관한다면 반드시 보람과 기쁨은 여러분 옆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 세상을 이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범한 현재일지라도 성스러운 하루라고 생각하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언제나 명심하고 진리를 듣는데 인색하지 말라.

희망과 좌절은 누구 게나 있다. 자신의 일생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라".

쇼펜하워의 말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말씀 드리면 생활의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좌절하지 않고 줄기차게 전진하는 진취성과 옳은 일은 망설이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자세,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한다면 성공은 반드시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99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신정여상 강당에서)

 

새천년 國防政策課題 무엇이 문제인가

(1999년 12월 31일 국군방송)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지금 대망의 2천년을 하루 앞둔 1999년 마지막 날,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 서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감회가 새로운 이사 간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온 국방정책을 뒤돌아보고 새천년에 지향해야할 국방정책추진 방향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새천년을 하루 앞두고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세기를 이어온 남북의 대결과 분단이라는 민족의 아픔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현실, 더 나아가  인종, 종교, 영토문제에 의한 다양한 갈등요인과 환경오염, 테러 등의 초국가적 위혐,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등 온 인류가 극복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눈을 동북아 지역으로 돌려보면 주변 4국간의 협력과 견제가 지속 되는 가운데 역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세력경쟁과 안보불안이 그대로 잠재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로 말미암아 한시도 긴장이 가시지 않고 있는 현실을 또한 직시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강성대국의 기치아래 병영국가식 관리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북한이 체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대내. 외 정세를 오판할 경우 전면 도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전망을 바탕으로 우리의 안보에 주목 할 때 국방부가 내년도 국방정책 추진방향을 현존하는 북한 위협에 대비하여 완벽한 국방태세를 확립하며, 미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하여 선진 정예군의 기반구축, 군 본연의 소임 완수로 국민의 사랑과 신뢰획득이라는 3대 과제로 잡은 것은 시의 적절한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21세기는 특히 자본이나 노동력 토지와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 즉 하드웨어가 핵심요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과 정보와 문화 창의력 즉 소프트웨어가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시대라는 것이 공통된 전망이고 보면  안보를 튼튼히 해서 파괴적인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바로 미래지향적인 정보군. 과학군의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는 당위라 하겠습니다. 

국방부가 마련해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의 촛점도 정보화된 군사력 건설로 대북 억제력을 완비하며 한국형 첨단무기 핵심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등 미래 전에 대비하자는 것이 골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군이 미래지향적 강한 군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보화. 과학화. 첨단기술을 고루 갖춘 강한 군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흔히 미래전은 미사일전, 정보전쟁, 우주전쟁 등이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시 말해 미래의 전쟁은 지식과 정보를 네트워크화 하여 전장의 공간이 지상, 해상 공중뿐만 아니라 우주로 까지 확장되어 입체전의 양상으로 발전할 것이며 미사일, 로봇트 등 첨단 정밀무기들이 크게 활용되는 기술 집약형 기계전쟁이 될 것이라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입니다.  결국 미래의 전쟁은 정보 과학기술의 우열이  승패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열쇠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국방부가 정보화 과학화로 상징되는 미래 선진 정예군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역량을 모으기로 한 것은 바로 우리 군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한 것으로 국방개혁을 실질적이고 내면적으로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함축된 것으로 마음 든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미래전의 추세를 고려할 때 장거리 정밀타격능력의 증대와 전장정보능력의 급격한 개선, 전장을 우주공간으로 가상해 군사기술을 개발하는 일은 더욱 시급한 당면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보도된 대로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양상에 대비하기 위해 '디지털화 전장' 개념을 구상하고 그 실천 방책을 구현하기위한 모든 시험단계를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도 미국의 뒤를 이어 5-10년 후가 되면 상당한 수준의 정보전 능력을 구비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21세기 미래 전 양상에 대비하는 선진 정예군육성을 위한 과제를 도출해보면 대체로 다음 몇 가지를 중시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국방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의 미래 전 추세를 예측할 때 미사일등에 대비하는 장거리 정밀 타격능력의 증대에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안목이 높아져야 할줄압니다. 북한의 대포동 시리즈의 개발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선진국의 과학 기술은 이미 우주정복 경쟁으로 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고 이 같은 우주과학의 발달이 미래 전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무기체계도 이제는 양보다도 정확성위주의 질적 향상이 기대됩니다. 지속적인 민간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국가차원의 국방과학기술발전에 주안을 둔 선진정예군육성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국방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의 확대 등 이 분야의 예산을 적정하게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국의 군사력 증강추세를 볼 때도  일본은 '전 방위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가운데 '2천 해리 전수방어 개념'을 설정하기위해 GDP의 1%를 방위예산에 투입하고 있으며 99년도 국방예산의 경우 4백 25억 달러로 한국군의 국방비(약 1백 15억 달러)의 4배나 됩니다. 더욱이 일본자위대의 병력규모가 한국군의 3분의 1에 불과함을 상기하면 일본 자위대는 한국군에 비해 무려 12배의 질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국방예산을 운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제한적 국지전략'을 구사한다지만 '1천 해리 작전능력확보'를 목표로 기술 집약형 군대 건설을 위한 군현대화를 추진하고 있고 이를 위해 量위주의 군사력건설에서 주요 첨단무기 위주의 질적 군사력건설로 방향을 전환 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주변국들은 역내에서의 영향력 확대 및 자국의 국익 보호를 위해 무서운 속도로 군을 현대화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더욱이 신형 ICBM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등 핵탑재 미사일의 장사정화. 다양화를 기하는 한편 중형 항공모함의 건조, 핵잠수함 추가보유. SU 30 MK전투기 도입, F-10 신형 전투기 개발, 조기경보기 확보 등 첨단 전력증가에 열을 올리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가 세운 7대 핵심 전력체계 즉,  정보전력체계, 기동전력체계, 해상해중체계, 공격편대군 체계, 유도탄 방어체계, 포병체계등을 차질 없이 갖추기 위해서는 연구 개발역량을 강화 하는 게 무엇보다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합리적 효율적 국방운영이라 하겠습니다. 역시 정보화와 경영혁신을 통한 경제적인 군대운영이 요구됩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 군이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병행하여 일부 형식적이고 비전투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군대운영을 절약형 예산집행체제로 발전시킴으로써 '작지만 강한 군'으로 위상을 정립하는 한편 인터넷 세대에 걸맞은 병영문화를 정착 시키는 일도 중요한 정책 과제라 하겠습니다. 에너지 절약의 생활화, 환경 친화적인 군 운영 등 국방예산의 낭비를 방지하고 가능한 절약정신을 함양하는 일도 경제적인 군대운영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넷째로 핵전쟁은 물론 화학 세균전에 빈틈없이 대처해야 하는 입장을 간과 할 수 없습니다.

한미양국이 지난 31차 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북한의 생화학 세균전에 대비, 긴밀한 협력을 다짐했지만 앞으로 우리는 북한의 다양한 생화학 무기 투발수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노력을 절대로 게을리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기존의 한.미 연합방위체제를 최고수준으로 유지하면서 활발한 군사외교활동을 펼치겠다는 대목은 이점에서 큰 기대를 걸게 합니다.

21세기 동북아 질서는 역내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 질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따라서 역내 국가들이 공동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협력의 방법을 모색해서 평화와 안정을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냉전시대의 동지와 적의 개념은 이제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으며 국가이익에 따라 협력하고 갈등하는 양상을 어떻게 우리의 국가 이익에 맞게 조화 시키느냐, 여기에 국가차원의 안목과 지혜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21세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안보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 간의 군사 안보적인 유대가 바람직하며 이점에서 다자간 대화체제의 확립과 군사외교의 강화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간주됩니다.

유엔 회원국으로서 동티모르에 보병부대를 파병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군의 국제적 활동기반을 확대한 것과 같은 외교노력과 우방국과의 군사외교 활동을 통하여 유리한 안보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돼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군의 왕성하고도 투철한 정신전력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최첨단 장비와 과학기술에 의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군의 투철한 사명감과 임전무퇴, 불굴의 정신전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기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모든 침략세력과 단호히 맞서 승리 하려면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우리 국군이 정신적으로 일사분란하게 뭉치고 엄격한 기강위에서 거듭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군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바로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기본임을 확인하고 언제나 국민과 함께하는 군 대상을 구현할 때 군에 대한 국민의 믿음도 확고해 지리라 확신합니다.

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국민의 각별한 배려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뒷받침한다는 것도 상식입니다. 한나라의 국력은 모름지기 군사력으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력과 경제력, 국민복지가 총체적인 안보의 개념 속에 포함된다고 볼 때  군의 사기는 바로 이 같은 총체적 안보역량을 구축함으로써 진작될 수 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군대,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국민의 군대야 말로  오늘의 우리 국군이 지향하고 있는 최대의 가치이자 진정한 목표임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21세기를 맞으면서 국가안보와 관련하여 무엇이 시급한 과제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제는 동.서 냉전이 종식된 현재 까지도 북한만이 한반도의 편화정착과 평화통일을 거부하고 한국과 미국의 대북포용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북한은 잘 알려진 대로 김정일 체제 출범이후 줄곧 "군대는 곧 인민이고 국가이며 당"이라고 역설함으로써 기존의 당우위에서 군사우위 정책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1차 회의를 통해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김정일은 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부족 등 계속적인 경제침체 및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군사강국'의 건설만이 '강성대국'으로 부상 하기위한 첩경임을 강변하면서 이를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어떠한 현실 인식과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과제로 제기 됩니다.

대북정책에서 '안보'와 '통일'은 양 날개와 같다는 인식은 계속 유효한 전략으로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적이기 때문에 서해 교전에서 최선을 다해 북한군을 응징했고 동족이기 때문에 쌀과 비료를 주었으며 금강산 관광을 진행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황이 이중성을 면치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언젠가 동족으로서 끌어 안아야할 북한 동포들을 인도적으로 배려 한다는 것은 21세기 통일에 대비하려는 포용적 자세로 계속 설득력을 갖는다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안보와 화해가 함께 정착돼야 하며 전쟁억지를 위해서는 철저한 안보태세 유지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새천년을 맞는 국군 장병들의 무운장구와 건승을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어느 前職大統領의 고뇌

(자유공론 97년 9월호)     

 '한국의 대통령' 崔圭夏. 월간 '자유공론'이 6월호부터 시리즈로 '한국의 대통령'을 연재하고 있는 가운데 이달에 필자가 최규하 대통령편을 집필하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다. 편집자의 주문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나름대로 자료를 찾고 기록을 뒤져 보았지만 별로 이렇다 할 소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워낙 과묵한 성격에다 자신에 대한 얘기를 즐겨하지 않는 분이어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는 보도만 있었지 이 또한 공개된바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기껏 참고한 문헌이 있다면 최규하 대통령 취임 전후의 신문스크랩, 퇴임(하야) 이후 12.12, 5.18 사건 항소심 공판과정에서의 증언거부파동 등 보도내용 그리고 '월간 조선' 93년 신년호 별책부록, '주부생활' 90년 2월호 정도였음을 밝혀둔다.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기 전 대통령권한대행으로 격동기의 국내정국을 수습할 당시 도하 신문들은 최규하씨를 가리켜 '순리 존중하는 중후한 행정가'로 평했다. '원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원리를 고수하는 원칙형의 지도자' '우리나라 외교사의 거인'에서부터 얼마 전까지의 신문 논조엔 '뚝심으로 헌정유지'등 증언 거부에 대한 비판 외에도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전직대통령 가운데 한분이다.

최규하 대통령 그는 이렇게 볼 때 '세기의 영웅'이라든가 '탁월한 지도자' '반독재 민주주의의 신봉자' 와 같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평해지기보다는 '과묵 뚝심으로 지킨 헌정질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공과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평해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숨 가쁜 역사의 현장을 관리해야했던 그가 12.12 신군부 등장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 부분에 대한 공과가 그의 증언 거부로 명확히 가려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다만 12.12, 5.18 사건 재판기록 행간에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대응조치가 우유부단했다는 쪽으로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것은 시시 하는바 크다 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10.26, 12.12, 사건당시와 그 후 최규하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회고해 보면 그의 결심여하에 따라서는 이 나라 역사가 180도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80년 8월 16일 하야한 최규하 대통령이 그 당시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역사적 격변기를 관리했으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일절 증언하지 않음으로써 '신군부의 정권 탈취' 과정이 미궁으로 빠져버린 것은 최규하 대통령의 공과를 평함에 있어 앞으로도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남길 것으로 생각 된다.   


고집스런 증언거부

  10·26때 총리로 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그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올라 12·12사태 당시 참모총장 연행 재가와 대통령직 하야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역할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어왔다.

'항룡(亢龍)은 말을 하지 않는 법'이라며 강제구인당해 법정에 서서까지 검사가 제시한 수사기록도 뿌리치면서 "굳이 증인신문을 하겠다면 나는 답변하지 않겠다"고 침묵으로 일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 최전대통령은 그의 대국민담화(95.12.16) 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통령 재임 중의 공적인 행위 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따라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하여 후일에 와서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을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만드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이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아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수없이 탄생할 대통령들의 직무수행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바 전직대통령으로서 후임 대통령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겨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과, 비록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통성과 계속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대통령직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행하여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 생각하여 왔고 지금도 그 소신과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최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소신은 작년 11월 14일 서울고법 형사1부 심리로 열린 12·12, 5·18 사건 항소심 11차 공판에 증인으로 강제 구인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최규하씨가 이때 법정에서 낭독한 '증언거부에 대한 입장'을 보면 "전직 대통령의 증언은 자칫 대통령직의 상징성 즉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삼권분립상의 독립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것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증언거부 이유를 되풀이 강조했다. "80평생을 상식과 순리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국법의 집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법정에 서긴 했어도 증언은 할 수 없다는 소신, 그것은 고집스런 그의 단면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지난 88년 국회 광주특위 때는 국회의 증인출석 요구에 불응,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국회 모욕죄로 고발당했다가 기소 유예되는 전례까지 남긴 바 있지만 그 후 8년여가 지나도록 일체의 공식·비공식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최규하씨에 쏠린 여론의 화살은 。내란 방조자。라는 혹평까지 받아야 했으니 그가 과연 이런 모욕적 비난을 언제까지 감수할지 주목된다.

그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문제의 사건은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난 상태지만 국민주권과 국가운명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사건 당시의 국가통치권자로서 그 시대 그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주저한 것은 그 자신 커다란 역사적 책무를 저버린 것은 아닌지. 이 부분에 대한 국민적 실망은 클 수밖에 없다.

참고로 '12·12, 5·18실록'(대한민국재향군인회 97.5.30. 발행)은 최규하 대통령이 79년 12월 12일 취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소개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7일이 되던 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 대통령 공관 접견실에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으로부터 10·26사건 조사과정에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연루되어 있는 새로운 혐의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줄 것을 요청받았었다. 이에 대하여 최 대통령은 비상계엄 하에서 계엄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정 총장의 연행은 중대사안인 만큼 국방부장관의 보고와 의견을 들어 신중히 처리할 사항이라고 사실상 재가를 부결했으나 전 장군은 집요하게 재가를 요청했다.(중략) 최대통령은 결재를 받기 전에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을 연행한 것은 위법이라고 명백히 지적하면서도 절차 중시의 요식행위나 사무적 흔적 남기기 등에만 주의와 관심을 집중하여 사실상 '쿠데타를 수용'이라는 납득이 안가는 결과를 빚어놓고 말았다."

외국의 경우 대통령이 헌정수호의 책무를 다하려고 목숨까지 바쳤던 사례에 비추어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처신은 너무도 대조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평화적 정권이양 선례 남겨

 최규하 전 대통령은 정확히 말해 79년 10월 27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고 그해 12월 6일 제10대대통령에 선출돼 12·12 사건을 치르면서 같은 해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 80년 8월 16일 하야성명까지 3백4일 동안 우리나라 최고 통치권자로 재임했다.

재임 중 숱한 우여곡절 끝에 5공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주역을 했다면 주역을 한 과도정권의 。단역배우。였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국내 정치학자들도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가리켜 '과도정부' 또는 '위기관리 정부'(안해균, '한국행정체계론', 서울대출판부, 1986, p.312)로 정의하고 있다.

최규하씨가 아직은 이렇게 증언한 바 없지만 일부 정치학자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초헌법기구인 국보위를 통해 새 정권의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정의 최고 통수권자이면서도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국권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과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최규하씨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시간이 아닐 것이다.

"나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그 같은 사태(광주민주화운동)로 국민에게 우려를 기친데 대해 정치 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하고.." 80년 8월 16일 발표된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성명중 한 대목이다.

이보다 두 달 전인 6월 12일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평정되고 국보위가 발족된 지 열흘이상 지난 시점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매우 의욕적인 정치 일정을 제시해 놓고 하야를 결심하기에 이른 배경이 궁금해진다.

이날 특별담화에서 밝힌 정치일정은 '10월 개헌, 81년 초 선거, 6월 정권이양'이었던 만큼 80년 8월 16일의 하야성명은 필히 곡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나 최규하 대통령 재임 10개월은 그의 하야성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불행했던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이양의 선례'를 남기기 위한 전두환 정권 만들기의 준비 기간이었다는 인상이 짙다.

심하게 말하면 10.26 이후 이미 대통령을 꿈꾼 것으로 보이는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 앞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이양해 버린 결과가 된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5.17 계엄확대를 재가해준 것은 시국을 안정시켜야 하겠다는 충정이라 치더라도 국보위까지 재가해 줌으로써 이 기구가 사실상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는 막강한 기구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은 '최규하씨가 신군부 측에 속았다'(최규하 법률고문 이기창 변호사 일문일답, 96년 7월 1일자 동아일보)는 것을 추정케 한다.

이기창 변호사는 특히 최대통령이 하야 하게 된 경위를 비록 직접적인 강압은 없었던 것 같지만 국보위의 무소불위의 힘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다시 말해 '80년 8월 당시 국보위가 통치권을 갖고 있어 책임만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자신은 신군부 측의 로봇'이라고 생각해 하야를 결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대통령이 처음부터 실권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취재한 기자들의 입을 통해서나 당시의 언론 보도를 보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최규하씨의 하야로부터 전두환 대통령 취임에 이르는 평화적 정권이양은 말이 평화적 정권이양이고 헌정질서 유지이지 내막 적으로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인 정치일정에 불과한 것이다.

이점에서 최규하씨는 자의건 타의건간에 전두환 5공 정권 탄생의 원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아무튼 최규하 대통령은 그의 하야성명에서 '헌정중단의 사태를 방지하고 국가의 계속성을 유지하면서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등 국가의 위기를 관리. 극복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온 것'을 자부하면서도 '우리나라의 특수한 안보적상황과 시국의 중대성을 외면한 일부의 정치과열 작태, 폭력화한 노사분규와 학생들의 불법적인 교외 집단시위, 마침내 광주사태라는 가슴 아픈 국가적 불상사에 책임을 통감'하고 하야를 결심하게 되니

그의 위기관리 능력은 그 당시 이미 한계상황을 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평한 신문논조들은 이구동성 약속이나 한 듯 '새 지도자에게 길 열어준 용단'이라고 극구 찬양, '안개정국'시대의 언론 상이 어떠했는지를 상기해 보게 된다.


부정부패와 거리 먼 직업공무원        

 최규하 대통령 재임 10개월은 5. 6공 정권과는 달리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힘이 신군부 쪽으로 경도되면서 '통치자금'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는지는 몰라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돈과는 거리가 먼 대통령이 바로 최규하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지난 95년 12월 검찰이 12.12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최규하 대통령의 은행계좌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추적 작업에 나섰을 때도 뒤는 깨끗했다는 후문이다. 최규하씨의 고문변호사인 이기창씨는 그 당시 한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최전대통령의 부인 홍 기여사 명의로 86년 5월과 94년 6월 한일은행에 개설된 가계금전신탁과 개발 신탁계좌 등 2개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한 기록이 있다.

80년 당시 대통령 하야 직전에 최 전 대통령이 전두환씨로부터 1백 75억 원을 받았다는 민주당 강창성 의원의 폭로도 있었지만 이 역시 사실로 밝혀진바 없으니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다.

최 전대통령이 12.12와 5.18 신군부의 내란혐의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말문을 열게 하려는 검찰의 히든카드가 '최규하 계좌 뒤지기'가 아니냐 해서 비판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 같은 계좌 추적은 무의미했고 결과는 최규하씨의 비자금에 관한한 깨끗함만을   입증시킨 셈이라 하겠다.

엄청난 부정축재로 국민의 빈축을 사야했던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과는 이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평생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 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서 국가원수에 오른 이는 우리 헌정사에서 최규하씨가 첫 번째 경우다. 최규하씨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비자금'과 담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그의 전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외교사에 큰 획

 최규하씨의 본관은 강릉이고 호는 현석(玄石)이다. 1919년 7월 16일(음력 6월 19일) 오전 7시경 원조 옥거리(현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25번지) 집에서 아버지 최양오(崔養吾)공과 어머니 전주 이 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석은 3-4세 때 이미 어깨너머 귀동냥으로 '천자문'을 습득했고, 5세 때부터는 학동의 일원으로 '동몽선습'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6세 때 '효경', 7세 때 '명심보감'을 암송하였는데 "그때 순리를 따르려는 정치철학이 배태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한 현석의 말이 전해진다. 최규하 전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일했던 최홍순(崔興洵)씨가 전하는 최규하씨의 어린시절은 '소학'과 '통감'까지도 통달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년 8세때 현석은 취학 전 학력을 인정받아 원주 보통학교(현 원주초등학교) 제2학년에 월반 입학했는데 그때 현석의 별명이 '공부벌레'였다니 전교 2등으로 경성 제일공립고등학교(현 경기고의 전신)를 졸업한 실력도 어릴 적부터 남다른 면학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경성 제일고보 4학년이던 해. 35년 음력 11월 29일 부모님의 뜻에 따라 남양인(南陽人) 홍병순(洪炳純)씨의 3녀(홍기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고 치열한 경쟁시험을 거쳐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제3부(영문과)에 합격, 고학으로 이 학교를 졸업해야 했던 최규하씨의 그 후 행적은 그가 만주 대동학원(43년)을 졸업, 광복 후 같은 해 서울사대 조교수로 교편을 잡는 것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현석은 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의 길에 들어섰고 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농림부 양정과장이 된다.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식량기구(FAO) 아주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 그의 외교적 수완이 돋보이면서 이것이 인연이 돼 당시의 변영태 외무장관에 의해 외교관으로 발탁돼 외무부 통상국장에 오르게 된 것이 국제무대를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닌 '외교가의 거인'으로 남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현석은 특히 52년 7월 17일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일본에 건너가 57년 5월 16일 주일 대표부 참사관으로서, 59년 3월 20일에는 주일공사로서 그동안 ECAFE 제11, 12, 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등 대한민국 건국초기 외교기반 구축에 그만큼 전력한 이도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외교역량은 59년 9월 12일 41세 나이에 외무부 차관으로 승진되는 관운에다 62년 외무부장관 고문, 63년 최고회의 의장고문, 67년 외무부 장관이 되니 이때가 '외교통 최규하'의 진면목이 한창 돋보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70년대 고도성장에 공헌

 현석이 외무장관 재직 시에 내건 지침은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통한 국력배양이 다변외교와 통일의 지름길'이었다.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그가 거둔 괄목할 업적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연례 통상진흥공관장 회의를 개최, 수출목표 달성에 기여한 것을 비롯, 68년 8월 1일 ASPAC 사회문화센타 설치 협정에 외무부 장관으로 조인함으로써 외무부 대사 시절부터 구상과 교섭에 앞장서 진력한 바 있던 ASPAC 활동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업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68년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때는 고조된 한반도 긴장상태에 대해 밴스 미국특사와 담판, 한·미간 국방각료 연례회의를 가질 것을 요구, 그것을 공동성명으로 발표케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이 연례회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효시가 되었다. 유엔총회에서의 눈부신 활동으로 한국문제의 '자동 상정'이 아닌 '재량상정' 방식을 끌어냈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외교담당)으로,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산유국을 방문, 석유위기를 해결함으로써 70년대 고도성장에 적잖이 공헌한 것도 현석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다.

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절차를 밟아 국무총리가 돼 4년 동안 '민주정치, 경제·사회 등의 상호균형된 발전이 실질적인 국가발전의 바탕이 된다'는 신념으로 국정에 임한 현석 최규하씨의 행적은 '티내지 않는 공복'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보인 그의 모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총리 시절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하고자 노력한 것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최규하씨는 대통령 재임 시의 업적보다는 그의 외교업적과 전형적 선비스타일의 공복으로서 그리고 '중후한 국무총리'로서도 많은 인기를 독차지한 분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평일지도 모른다.


맺는말

 최규하 전대통령의 공과를 지금 단계에서 필자가 감히 운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주제넘은 일이다.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전직 대통령에게 자칫 누가 되거나 명예를 더럽힌다면 이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증언거부로 시달려야 했던 전직 대통령의 고뇌에 찬 입장을 동정하는 국민들도 언젠가 역사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말들은 진실로서의 가치가 없다. 헌정중단을 막고자 애쓴 최규하 전대통령이 세간의 의혹을 명쾌하게 불식시키지 못한다면 후세 사가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그것이 두렵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 최규하, 전형적인 선비형 공직자, 외교가의 거인으로서 숨 가쁜 역사의 현장 한복판을 직시하고 국가의 위기를 관리 극복하고자 노심초사했던 현석 최규하 전대통령의 공과, 그것 역시 역사의 심판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규하 대통령 편을 단편적이나마 기술하면서 필자가 느낀 소감이다. 혹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빌 뿐이다.


당대의 名 作名家

 작명가 金鳳秀. 전국적으로 소문난 작명가로 숱한 話題를 불러 일으켜온 김봉수씨를 내가 만난 것은 94년 봄 어느 비오는 날 오후였다. 친구 李在宣 사장 내외를 통해

자주 명성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김봉수 작명가를 찾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실업자 신세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내 딴엔 진로 문제를 의논해 보고 싶은 충동도 있었고 친구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김봉수씨를 찾은 것이 그분과의 첫 대면이 된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름과 생년월일을 대고 아호 '又松'과 '佑邦時事問題硏究所' 이름을 지어 받은 것이 인연이 돼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많은 애기를 듣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나름대로 느낀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해박한 역술지식에 놀랐고 경이로울 정도로 적중한 예언과 작명에 얽힌 숱한 일화들이 '작명가 김봉수'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김봉수 작명소를 찾으면 그를 만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극장표나 명절 때 기차표를 사기위해 줄을 선 모습이랄까. 멀리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를 만나러 구름떼처럼 몰려든 적도 있다. 통행금지가 있을 당시엔 이웃여관에 숙박을 정하고 해제 사이렌이 울리기가 무섭게 뛰어나와 줄을 서 번호표를 받는 극성파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가위 결사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작명가 김봉수를 좋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만대면 알만한 장안의 유수한 기업인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신문광고나 TV광고를 한 것도 아니고 신문방송 잡지의 그 흔한 운수풀이 해설가로 이름을 알린 적도 없는 그를 소문만 듣고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작명가 김봉수씨에 관한 숱한 일화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실화도 심심찮게 회자되곤 한다.

이름 있는 출판사가 펴낸 역학서적에도 소개된 얘기지만 김봉수씨의 예언은 너무도 정확하게 적중한다는 것이 그를 찾는 이유로 알려져 있다.

5.16 혁명이 있고 난 몇 해 뒤 육사 8기생이며 고등학교 시절 전국에서 수석을 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난 이름을 대면 금방 알만한 김 모 헌병대령이 경험한 일화도 비슷한 경우다. 그 김 모 대령이 친구를 따라 김봉수 작명소를 찾았다가 심심풀이로 자신의 성명과 생년월일 및 출생 시를 대자마자 김봉수씨는 그 특유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정신없는 친구 뭘 하러 왔어. 정신 차리라고, 애새끼 잡아먹을 놈이 얼굴은 왜 들고 다녀 응? 몇 달 만에 자식 죽겠어"

김모 대령이 얼마나 당황했겠는지 는 묻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애지중지 해 왔던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해 김봉수를 주먹으로 강타하고 돌아간 몇 달 뒤 아닌 게 아니라 김봉수씨의 예언대로 김모 대령의 자식이 집 앞 신축공사장에서 무너진 벽돌더미에 깔려 비참하게 죽고 말았으니 이보다 정확한 예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후 김모 대령은 김봉수 신봉자가 돼 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김봉수 작명가의 예언이 신통하리만큼 적중한다는 것은 그를 찾은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서 입증된 지 오래다.  요즘 그를 찾는 손님 중에서 그의 예언이 너무 적중해서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업의 흥망성쇠나 가족들의 신상을 정확히 맞춘데 반해 버려 김봉수 신봉자가 된 재벌 기업의 사장이나 학자 언론인도 적지 않다는 것이 김봉수씨를 아는 분들의 자랑 섞인 증언이다.

때로는 김봉수 작명소에서 이름을 바꾼 덕으로 사업이 크게 번창해 은혜를 갚기 위해 찾는 이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김봉수 그는 어떤 사람인가.

김봉수씨는 지금으로부터 67년 전 그러니까 1933년 음력으로 12월 0일 전라북도 임실군 덕중면 일중리 38번지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 있었지만 그중 한명과 일찍 사별해 5형제중 셋째로 자랐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때라 그도 일찍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생신고를 3년이나 늦게 하는 바람에 실제 나이는 호적보다 3년이 위다. 열 대여섯이나 낳은 아들 딸중 5제만 컸으니 그럴 법도 하다.

다섯살때 유명한 한문선생에게 서당공부를 하며 천자문과 소학 명심보감을 읽다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덕진국민학교(현 덕진초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초등학교라야 2.3학년이 제일 위고 생긴 지 얼마 안된 학교지만 서당공부를 한 탓으로 책을 받자마자 다 읽어 버렸다는 것이 김봉수씨가 회고한 초등학교 시절이다.

공부를 잘해 1등은 도맡아 했지만 정작 1등상은 빽이 든든한 교장이나 면장 아들이 차지했고 자신은 3등이 고작이었고 한다.

초등학교 6년을 마치고 중학교과정을 밟다 8.15 해방을 맞았는데 그때까지는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때 놋쇠와 쌀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수탈이 심했을 때도 어머니가 워낙 지혜로우셔서 굶지 않고 살았다.

김봉수씨에게 수난이 닥친 것은 역시 6.25 한국전쟁이 발발 하면서부터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집안에 불운이 닥쳤다.

이 사건이 나던 이듬해에 둘째 형도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순창에 간다고 집을 비웠는데 여순 반란사건 장병들이 들이 닥쳐 군인 가족. 경찰가족(큰형님이 공부를 잘해 5백대 1의 경찰시험에서 유일하게 합격돼 경찰공무원으로 있었다)이라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해 십년감수를 한 적도 있다. 마음이 불안해서 동네 뒷산에 숨어 지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순창 임계면 보령리로 이사를 오면서 유년기의 김봉수는 임실중학교에 다니게 되고 이때 틈틈이 소학. 대학. 역경을 탐독하기에 이른다.

6.25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 유격대장이 집을 강제로 빼앗아 순창군 노동위원회본부로 삼았고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에 붙들려 심부름을 해야 했던 적도 있다. 경찰관 군인가족은 모조리 죽이는 판국에 인민군 심부름이라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마 위의 고기처럼 살며 심부름을 한 것이 부역자로 몰려 불리한 신세가 돼 버린 것도 그의 인생행로를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진짜 빨갱이는 안 죽고 강제로 끌려가 심부름만 한 죄 없는 사람이 많이 희생된 것을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김봉수씨의 성장과정이 너무도 기구했다는 것은 그가 작명가로 변신하기에 이른 배경이 잘 말해준다.

15살 아버지와 17세 소녀의 어머니가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산 것 까지는 좋았으나 눈만 뜨면 부부싸움에다 아들딸을 열 명이나 잃고 겨우 다섯 명을 키운 팔자가 그토록 사납게만 느껴진 것이 청소년기의 김봉수로 하여금 운명철학에 눈을 뜨게 한 동기였기 때문이다.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점치는 책, 사주보는 책을 사다 이름도 지어보고 부적도 써보고 했던 그가 스스로 작명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언젠가 유명한 천석군 할아버지 집에서 며칠을 묵다가 쌍둥이 사주를 봐 준 때였다. 공부께나 한 노인이 있다면 백리고 이백리고 찾아다니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사주도 배우곤 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가 본 쌍둥이 이름은 큰놈이 '상형' 작은놈은 '하형' 이었는데 작은놈은 하형이니 보나마나 땅속으로 들어갈 죽을 이름이고 형은 살기는 살지만 별 볼일 없겠고 하체가 힘이 없어서 오줌도 싸고 식은땀 흘리고 잘 넘어지고 한다 했더니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해

지어주고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이 작명의 시초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김봉수씨는 사주도 중요하지만 이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본격적으로 작명공부에 몰두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군산, 이리를 거쳐 서울에 와서는 남산의 점쟁이들과 싸우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름만 가지고 획수를 맞춰 풀이하거나 이름에 불이 빠지고 물이 빠졌다고 '병화'니 병수'로 짓는 작명가에게 그렇게 이름 짓고 돈 받느냐고 했다가 크게 싸운 일도 있다. 그 후 이름 짓는 사람이 떼로 몰려와서 행패를 부려 곤혹을 치르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악질로 굴던 사람은 결국 다 죽고 말았으니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이름을 획수나 맞추고 풀이하는 경향이 많이 있으나 그래선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김봉수씨의 지론이다. 사주에 물이 없다해서 무조건 이름자에 물을 넣는 식의 작명도 반대한다. 이름 자체에 오행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나이(띠)를 참작해야 하고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발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오랜 작명 경험에서 터득한 김봉수씨의 철학이다.

이런 그의 작명이론이 전해지면서 많은 역술가들이 이를 본받고 있는 것은 시사 하는바 적지 않다.

김봉수씨가 根(뿌리근), 美(아름다울 미), 愛(사랑 애)자가 이름에 안 좋다고 하니까 작명가들이 모두 안 쓰고 있는 것도 비슷한 경우다.

김봉수, 그는 누구나 이름만대면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척 척 알아 맞춘다. 신기하게도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것을 보면 무서울 정도로 경이롭다는 느낌이 든다.

'좋은 이름이 좋은 운명을 좌우한다'고나 할까,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필자가 지켜본 김봉수씨의 작명철학은 그의 오랜 작명 경험과 해박한 역술지식이 어우러진 진귀한 작품세계 그것이라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듯하다. 김봉수, 그는 컴퓨터 못지않은 두뇌의 소유자다. 그만큼 기억력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오행과 역리를 바탕으로 하여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을 풀이하고 새로 이름을 지어주면서 30-40년 전에 지어준 이름과 사람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컴퓨터 이상의 두뇌로 보아 틀린 말은 아니다.

김봉수씨를 사석에서 만나면 그처럼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온화한 인품에다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거리감이 있을 수 없다. 성질은 좀 급한 편이지만 맺고 끊음이 그처럼 정확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오랫동안 역술관련협회의 중책은 다 역임했고 향우회에 대한 애착도 대단해서 남다른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불우한 사람을 돕는 자선활동이나 봉사에도 늘 마음이 후한 편이어서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도 한둘이 아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인간 김봉수. 작명가로 변신해 40여년 이상 이름 짓는 일에 종사 하면서 그가 중시하는 것은 통계철학이다.

그 경험철학을 바탕으로 '우주와 인간세상'(김봉수의 작명반세기)이란 책을 출판한 것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역리학계에 적지않이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저서는 김봉수 작명반세기의 결정이자 김봉수 이름 석 자의 명예와 자존심이 담긴 일대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심오한 자연 섭리와 신비의 우주과학을 역술적으로 분석 접목시키기를 좋아하는 김봉수, 그의 작명이론은 그가 오랫동안 작명세계에서 터득한 그만의 깨달음으로 학계에 많은 공헌을 남기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참스승의 길

(柳明杰 선생님 정년퇴임  사은사. 93. 2. 20)

 오늘 존경하는 公義 柳明杰 교감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에 이처럼 만당하신 내빈과 모교에 재직 중이셨던 은사님, 그리고 많은 선후배 동문들이 참석하신 가운데 불초한 제가 감히 사은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오며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 40여 년 전 오늘이 생생하게 상기되어 벅차오르는 감격을 이로다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42년 전 1951년 봄, 바로 이 무렵 이 자리 우리 금성국민학교 교정에서 저희들이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 들고 교문을 나설 때 여기 오늘 자리하신 鄭宅源 당시의 교장선생님과 鄭雲穆 선생님 그리고 朴賢秀 선생님,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金東雲 담임선생님께서 저희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으시면서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던 그 인자 온화하신 용안들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졸업하기 2-3년 전부터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답시고 고사리 손으로 모를 심고 돼지를 키우며 부푼 꿈을 불태우다가 6.25난리가 터져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선생님께서 그토록 아쉬워하시며 위로해 주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옵니다. 유난히 키가 크셨던 선생님의 그 스포티하신 몸매로 저희들 체조시간을 도맡아 지도해주셨던 학창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세월을 가리켜 유수와 같다 하옵니다마는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버린 지난 40여년은 오늘 정년을 맞으신 선생님이나 저희들 모두에게 많은 것을 돌이켜 보게 하옵니다. 혹은 값지고 보람이 있었으며 때로는 기뻐하고 실망했던 나날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어제의 값진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보오며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그 많은 덕목들이야 말로 저희들의 오늘을 있게 하신 참다운 삶의 좌우명이었음을 알고 더욱 소중하게 느끼고 감사드리게 됨은 비단 저 혼자만의 감상은 아닌 줄 아옵니다.

다만 오늘 저희들이 느끼는 바로는 선생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신 참된 인간, 훌륭한 사람으로의 성장을 위해 우리가 얼마만큼 충실했고 또 성실하게 살아왔느냐를 반문해 보올 때 오직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드릴게 없으니 그저 송구하올뿐입니다.

일 년에 한번 맞는 스승의 날은 고사하고 언제 한번이나 제대로 선생님을 모시고 마음속 깊이 울어 나오는 사은의 자리를 마련해 드렸는지 이렇게 정년 퇴임식에나 겨우 나타나 얼굴이랍시고 내밀게 되오니 정말 부끄럽고 여러 선생님 뵈올 면목이 없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희들은 오늘 정년을 맞으신 선생님께서 정년이라는 인위적 제도에 밀려 비록 교단을 물러나시지만 오직 한평생 고결하신 인품과 탁월하신 경륜, 그리고 투철하신 교육철학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선생님의 거룩하신 행적으로 하여 다 같이 경앙해 맞이 않는 기쁨과 자긍심을 만끽하게 되옴을 선생님께 감사드리옵니다.   선생님께서는 1940년 당시 나라가 안팎으로 어려웠던 때에 국운을 좌우하는 교직의 중대성을 인식하시고 한국의 페스타롯치로서, 숭고한 교육이념을 몸소 실천 하신 사표로서 낙후된 지역사회의 횃불을 밝혀 오셨습니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셨고 3남 3녀의 어버이로서 경로효친사상과 가정교육관이 투철하셨으며 선생님께서 늘 강조해 오셨던 '애국하는 어린이' '근검절약하는 어린이' '질서 있는 생활'덕목들은 선생님 문하를 거쳐 나간 많은 후학들에게 꿈과 희망과 보람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선생님을 존경해 마지않는 바도 선생님의 이 같은 교육자상에 감동하고 있기 때문이며 선생님께서 수범보이신 주경야독의 면학정신은 독학으로 배움에 정진하려는 후진들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길잡이로서 다투어 귀감 삼아야 할 생활 훈임을 각별히 일깨워 주신데 있다고 저희들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새삼 말씀드릴 것도 없이 교육은 단순한 지식이나 기능의 전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 나라와 겨레, 넓게는 인류의 공익을 위해 제몫을 다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바로 교육이며 이런 교육의 이념을 구현 하는데 는 오늘 정년을 맞으신 유명걸 교감선생님처럼 자기희생을 수반한 무한한 사랑과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도 달라질 수 없는 진실입니다. 하기 어려운 말로 사도가 땅에 떨어졌다느니 교육이 병들었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일부에서는 하고 있기도 합니다마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선생님 같으신 스승님이 우리 교육계에 건재 하셨기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교육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교가 이렇게 발전 하고 우리 고장이 이렇듯 내실을 기할 수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선생님과 같으신 교육자들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선생님의 높으신 가르치심을 받들어 2세교 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는 많은 선후배 교사 여러분들이 어느 자리에서나 돋보이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는 비록 정년을 맞으시지만 선생님께서 가르치고 길러내신 많은 제자들은 결코 선생님의 은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한 치도 선생님께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서 더욱 선생님의 남은여생을 보람되게 하리라는 것을 감히 말씀 드리며 또 다짐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은 선생님과 저희들이 더 경건하고 돈독하며 항상 존경과 사랑이 넘치는 사제의 정을 꽃피우는 계기가 돼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교단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사랑의 매를 드시는 더 인자하시고 온화하시며 언제나 강령하신 모습으로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는 선생님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교단을 떠나신 이후에도 나날이 새롭고 또 복된 하루하루를 大安 하신 존체로 오래 오래 만수무강하시기를 비오며 변변치 못하나마 두서없이 사은사로 대신 하옵니다.

 1993년 2월 20일 문하생 19회 졸업생 대표 정 운 종


우리시대 '영원한 校長선생님'

(1994년 2월16일 故 鄭宅源 교장선생님 영결식장에서)

 鄭宅源 교장선생님.

엊그제 까지만 해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노익장을 과시 하시던 선생님께서 이렇듯 유명을 달리 하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이옵니까?

저희들 금성국민학교 졸업생 일동은 한결같이 우러러 숭앙해 마지않던 크나큰 봉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 같은 허전함과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이처럼 슬픔에 잠겨있는데 유족 되시는 가족여러분은 얼마나 상심하고 애통 하시겠습니까.

삼가 문상을 드리면서 조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의 문하생을 대표하여 선생님께서 처음 교직에 몸담으셨고 오랫동안 교장선생님으로 모교발전과 2세교 육에 심혈을 기울이셨던 금성국민학교 졸업생의 한사람으로 전동문의 애도의 뜻을 전해 올리고 져 선생님의 영전에 섰습니다.

지금 이 자리 선생님의 영현 앞에는 선생님의 마지막 가심을 애도하며 머리 숙여 고별의 인사를 드리고 져 경향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조문객들의 오열로 가득차 있습니다.

鄭宅源 교장선생님.

선생님께서 80평생을 통하여 후진 교육에 남기신 발자취는 너무도 빛나고 너무도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천 마디 말과 만 마디 글이 있은들 이를 어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 보오면 선생님께서는 조국의 여명기에 태어나셔서 암흑과 수난의 시대를 거쳐 다시 조국광복이후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선생님의 일생은 이 나라 학교교육과 가정교육 그리고 사회교육의 사표이자 귀감이셨습니다. 

그 가난했던 유년 시절 모교 금성국민학교를 졸업하신 뒤 주경야독 하시며 교직에 오르시기까지 그리고 교장 선생님으로 모교에 봉직하신 행적은 우리시대의 '영원한 校長先生님像'을 심어주신 민족교육의 산증인이시자 근로면학의 산 징표로서 우리 모두의 뇌리 속에 살아 숨 쉬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이 나라 2세교 육에 몸 바쳐 오신 반세기동안 선생님께서 길러내신 제자들이 무릇 몇 만이며 자녀들을 그토록 훌륭하게 키워 내신 보람은 또 얼마나 크오며, 참 사람의 도리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생활 속에 실천해 오신 행적은 또 무엇에다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금성국민학교는 물론이고 제천 시.군 관내의 모든 초등학교를 두루 거치시면서 학교경영과 2세교육 발전에 기여하신 공로는 국가가 선생님께 드린 상훈으로 널리 선양된 지 오래입니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셨고 먼저 가신 선생님 配位에 대한 극진하신 간병에 얽힌 정감어린 일화들은 至高至善의 夫婦愛 그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높으신 인격과 고결하신 생애, 특히 참다운 사람의 도리를 몸소 실천하신 선생님의 80평생은 오늘처럼 인륜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해 마지않는 세태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仁義禮智이며 三綱五倫인지를 일깨워 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슬하의 자녀들이 그토록 다투어 모시기를 간청했으나 끝내 향리를 지키시며 오로지 사랑과 봉사정신으로 목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처럼 이곳 제천 시.군민의 가슴속에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신 후덕하심에도 새삼 머리가 숙여 지옵니다.

이제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명복을 비는 이 엄숙한 제전에서 선생님의 거룩하신 행적을 되새김은   바로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이 모든 가르치심과 덕목들을 귀감 삼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가르치고 키워주신 많은 제자들이 사회 각 분야의 거목으로 성장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열심히 공헌하고 있음도 다 선생님의 따뜻하신 보살핌 덕분이라 믿사옵니다.

남에게 폐 끼치는 일과 신세지는 일은 절대로 피하신 그야 말로 안빈낙도의 선비정신도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생활철학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옵니다.

선생님께서 모교의 대선배이자 교육자로서 모교의 명예를 드높이신 행적도 동문사회의 자부와 긍지로 더욱 빛날 것입니다.

부디 가시는 길 평안 하시고 끝없는 명복을 누리시옵기를 두손 모아 기원하면서 이만 조사에 가름하옵니다.

 

                                                                                                                                  1994년 2월 16일 금성국민학교 문하생대표 정운종 재배


著者 정운종(鄭雲宗 아호 又松)

1938년 堤川 출생

성균관대 법과졸

신아일보.경향신문 논설위원

교육부 정책자문위원

민주평통 운영위원(운영위 간사)

국방일보 객원논설위원

세명대 경영행정대학원 초빙강사

(현재)

시사문제연구소 소장

민주평통 상임위원

통일부 교육전문위원

대한언론인회 논설위원

(상훈)

국민훈장 동백장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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