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거행

이학성 기자 2015. 11. 27. 15:43

 

 

 

                                                “전국서 23만8천명 조문”

                                           장례위원 2천222명.. 국회의사당 영결식 7천명 참석

                        김영삼 전 대통령 역사 속으로.. 사상 첫 국장 영결식 국회서 엄수

 

 서거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올해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1월22일 0시22분 지병으로 서거하였다. 사인은 오랜 지병으로 인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밝혀졌다. 빈소에는 김 전 대통령의 친지와 친구, 지인, 민주화 운동 시절 동지, 여권 인사를 비롯해 '라이벌' 동교동계와 그를 탄압한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3만7천400여명이 조문했다. 그동안 혈액 감염으로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가장 이틀째인 23일과 발인일인 26일 빈소를 찾았다. 서울대병원 오병희 원장은 “현재로서 사망에 이른 직접적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 겹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인은 과거 반복적인 뇌졸중과 협심증 및 폐렴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으며, 2013년 4월부터 지난해 19월까지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중과 폐렴으로 입원한바 있다. 고인은 19일 고열로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이송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돼 서거하셨다”고 말했다.

 

역사에 남을 전직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

 정부는 22일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해 유가족의 염원을 존중하여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을 국가장으로 거행하였으며 장례는 5일간 진행되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안장식은 26일 오후 국립현충원에서 거행 하였다. 빈소에는 김 전 대통령의 친지와 친구, 지인, 민주화 운동 시절 동지, 여권 인사를 비롯해 '라이벌' 동교동계와 그를 탄압한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3만7천400여명이 조문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가장 이틀째인 23일과 발인일인 26일 빈소를 찾았다

이학성 취재부장

 

 

 

 

 

 

 

 

 

                                      

 

 

 

 

 

         민주화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 생애, 업적, 정치활동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위로는 형이 두 명 있었는데, 어렸을 때 두 명 다 요절하여 실질적인 외동아들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할아버지인 김동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동옥은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고, 마을에 개신교를 전파하여 외포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8세에 장목보통소학교(현재의 장목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통영중학교에 입학한 후에 일본인 학생들과 자주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교장인 기타시마는 김영삼을 혹독하게 대했고, 김영삼은 1~2주의 정학을 받기도 한다.

 

 얼마 후에, 기타시마가 진해중학교로 전근을 가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 교장이 떠난다고, 통영중학교 학생들은 당시 귀하던 설탕 10여 부대를 나르게 되었다. 김영삼도 마찬가지로 설탕을 나르게 되었는데 이빨로 설탕 포대를 뜯어서 설탕을 흘리면서 나른다. 기타시마가 나중에 확인해보니, 설탕이 다 샌 것을 보고 화가 나서는 교감인 와타나베에게 진상 조사를 명하였다. 와타나베는 김영삼이 범인인 것을 알아챘으나, 한국인 학생들을 가엾어 하던 사람이었다. 이에, 와타나베는 전교생을 모아놓고 점잖은 훈시를 하여 사건을 덮어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김영삼은 와타나베와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고 1983년에는 통영중학교 동창들이 모여 와타나베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통영중학교 학생들은 사천으로 끌려가 일본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때도 김영삼은 일본인 학생이랑 싸웠고 이 일로 정학을 받게 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김영삼은 자신의 책상에 이렇게 써놓고서는 자신의 장래희망을 이 직업으로 정한다.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김영삼은 1945년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1948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김영삼은 철학보다는 정치 쪽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이승만, 김구 등 정치인의 강연회를 많이 쫓아다녔다고 한다.

 

 김영삼이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때에 정부 수립 기념 웅변 대회가 있었는데 김영삼은 그 대회에 출전하여,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하게 된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장택상은 김영삼을 눈 여겨 보았고 자신이 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직접 김영삼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김영삼은 자신의 동문인 손도심과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박사의 추천으로 김영삼은 현역으로 싸우지 않고 대북방송을 담당하게 된다. 장택상은 이선근에게 “김영삼이 좀 나한테 보내줘요. 내 일 좀 돕게 해줘요.”라고 했지만, “대북방송의 중책을 맡고 있으니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한다. 하지만, 이선근은 김영삼에게 “자네가 대북방송을 하든 장택상을 돕든 그것은 모두 나라의 일을 돕는 것이네.”라고 하여 김영삼은 장택상을 돕게 된다. 1952년, 장택상 국회의원의 비서관이 되고, 1952년 5월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자 국무총리 비서관이 된다.

 

 1951년 3월, 손명순과 결혼했고 1954년 5월 20일,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26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54년 11월, 이승만이 3선 개헌을 하려하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방문하여 말하기를“각하, 3선 개헌은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으셔야합니다.”라고 하였지만 묵살 당한다. 1959년, 김영삼은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세우는 움직임을 보이고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1960년, 김영삼의 어머니인 박부련은 1960년에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아버지인 김홍조는 최남순과 재혼하였으나 최 씨 또한 일찍 사망한다.

 

 김영삼은 4.19혁명 후 구성된 윤보선의 민주당 정권에 몸담아 4개월간 여당 의원 생활을 하였으나 윤보선이 탈당, 신민당을 만들어 야당 의원이 된다. 5.16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김영삼은 군정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군정 반대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된다.1967년 7월 20일, 이승만의 시신이 돌아오자 애도 성명서를 내기도 하였다. 1969년 6월, 김영삼은 정치적 테러를 당하게 되는데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에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김영삼은 차에 타고 있던 중 괴한들에 의한 초산 테러를 당한다. 이로 인해 차량 일부와 아스팔트가 녹아내렸다고 한다. 김영삼은 박정희가 범인이라고 주장했고, 김영삼은 박정희의 정적 중 한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에게 경선에서 패배하였으나, 김대중 역시 패배하고 만다.1979년 8월 9일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농성을 벌인다.(YH무역사건) 김영삼은 눈물을 흘리며 이들을 환영했으나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된다. 이 사건으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1980년 김종필과 대권을 놓고 경쟁을 하지만 전두환의 쿠데타에 의해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단식 일주일 후인 5월 25일, 심신이 쇠약해져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였고 전두환이 보낸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권익현의 방문을 받지 않았다.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라고 하여 권익현에게 무안을 주기도 했다. 김영삼은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김대중과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무의로 돌아갔고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결국, 패배하고 노태우가 당선된다. 그 후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하게 되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김영삼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32년에 걸친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부정 계좌 단속 및 처벌,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 등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신군부, 하나회와 관련단체 해체, 대한민국 국군 내 사조직을 해산하고 정치군인들을 제재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임기 말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인하여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