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현등사

이학성 기자 2012. 5. 7. 17:59

 

 

 

                                                  기암괴석과 천년고찰의 고풍스러운 어울림

                                                                   “고요한 산사의 봄기운을 맞으며...”

                                                                 운악산의 현등사

 

 가평과 포천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운악산은 높이 935.5m의 기암과 봉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아름다워 ‘작은 금강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관악산과 치악산, 화악산, 송악산과 함께 중부지방의 5대 악산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다. 산길도 험하지않고 근처에는 숙소와 식당들도 많은 것도 운악산의 장점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많은 등산객들이 운악산을 찾은 모습들이 보인다.

등산객과 함께 길을 오르다보면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때 인도에서 온 승려 마라가미(摩羅訶彌)를 위하여 창건한 후, 중창과 재건, 그리고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고찰인 현등사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폐허가 된 절터’의 석등이 ‘빛’을 발아고 있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유래를 가진 것 보면 신라시대 고승 도선이 중창한 후 고려시대 명승 보조국사 지눌이 재건하기 전까지의 사이에 ‘폐허’를 경험했던 현등사이다.

한때는 ‘완전히’ 허물어졌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현등사는 규모가 작고 경내도 좁지만 ‘깊고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호젓하고 고요한 산사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한 운악산의 중턱 언저리에 위치한 고요한 산사 현등사에서 봄기운을 맞으며 선우 주지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관세음보살님의 선몽을 얻어 터를 잡아

 신라 23대 왕 법흥왕 때 창건 된 현등사는 영엄기도 도량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지어진 것이 1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를 정밀이 거슬러 올라가면 1600년은 된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선사 봉말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법흥왕이 인도에서 온 스님이 부처님 경전과 사리를 모셔 온 것을 층계하고 감동하여 밤 중 잠도 이루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그 스님을 잘 모실 수 있을까 비몽사몽간에 고심하다, 관세음보살님의 선몽을 얻어 터를 잡고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을 보광전 혹은 관음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관음절 뒤에 법당을 묻어 숨겼다고 한다. 이 절은 늘 불로 소실되어 이 건물 자체가 불을 밀어내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처음 창건 될 때 받은 경정과 사리를 이 절에 모셨는데 그렇게 보면 최초 우리나라의 정밀보검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나라의 비보사찰로 현등사를 증건 했다. 그러면서 이곳이 궁예의 기도처가 됐다. 궁예가 기도를 하고 나라를 세우겠다고 포부를 가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흔히 우리는 도선국사가 왕건이 섬긴 스승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 계보는 좀 더 위 왕건의 아버지 때로 올라간다. 도선국사가 이 절을 만들고 고치는데 정작 도움을 준 것은 나라가 아니라, 그 시대의 재력가였던 왕건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후 왕건이 도선국사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 당시 도선국사는 왕건에게 여러 가르침과 수기를 준다. 그 수기 중 하나가 궁예와 맞서지 말라. 때가 되면 네가 궁예에게서 나라를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네가 나라를 받거든 천도를 해라라는 수기를 들었다.

 

 

우악 송악 백악 역사에 삼대 트라이앵글

 그 당시 수도는 강원도 철원이었다. 그때 개성을 송악이라 부른다. 그리고 500년 후의 스님이 보니 백악이라 한다. 백악은 청와대 뒤에 선 봉으로 백악봉이라고도 부른다. 봉악과 백악의 중간에 비보사찰을 세우고자 찾던 중 알게 된 곳이 폐허가 된 현등사였다. 그래서 현등사를 다시 중창했다. 여기서 경복궁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현등사와 경복궁 가운데 있는 곳이 동구리다. 거기를 구리라고 한다. 여기는 우악 송악 백악으로 불렸다. 역사에서 이것을 삼대 트라이앵글이라고 한다.

다음 현등사를 주석한 분이 보조국사 지눌이다. 효공왕대 보국사지눌은 등불이 인도하는 예시를 받아 이곳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시절 이 절에 들어왔다. 겉은 수려하고 그 모습이 좋은데 퇴락한 것이 안타까워 대대적으로 중천한다. 다들 지눌을 떠올리면 다른 절들을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그가 최고로 활동한 곳은 바로 이 현등사였다.

현등사가 현등사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는 우낙사라고 불렸었다. 현등사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기원은, 그 당시 이 산을 넘으면 금강산 길이 나오게 돼 있었다. 도성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지눌이 금강산을 가던 중 날이 저물게 됐는데, 그때 서쪽 능선에서 스님을 등불이 인도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이 현등사였다. 현등사라는 이름이 지은 분은 보조국사지눌이다. 간단하게 등불이 인도했다는 뜻이다. 그 뜻은 매달 현, 불복승 삼복을 밝힐 등 또는 진리법등자 그리고 등불등자이다. 불교에서는 등불을 단다는 뜻이 진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불상 좌상, 유일한 부처, 국가문화재로 추진

 “여기에는 부처님이 크게 누워 있다. 이 산 자체가 다 부처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낙산이라 하기도 하고 현등산이라 하기도 한다. 이곳에 바로 하머스님이 계셨다. 너무 수려하고 좋아서 이 스님은 이 절을 다시 사창하신다. 이 분은 세종대왕의 스승이었다. 이 스님은 이 절에서 금강경오가해를 쓰시고 또 정도전 선생 역시 이 절에서 주옥같은 글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였던 신미스님은, 세종대왕에게 우국이세해각전자라는 법호까지 받은 인물로 훈민정은 집필에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분 역시 이 절에서 조석하면서 월인석보, 월인청강지곡 등을 썼다. 이것만으로도 이 절이 탄탄한 내공으로 만들어진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그 이후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도움이 줬던 명망 높은 존자님들이 많이 주석 하셨고, 또 이곳에서 정진하셨다. 현재는 선옹스님이 주지스님으로 계신데 역사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을 반증하듯 이곳에는 여러 문화제가 속해있다. 그 문화제가 십두심경을 넘는데 괄목할 만한 것은, 하머담 스님을 포함해 고려시대 세종대왕의 아들 이명대군이 탑을 고쳐 사리를 모셔두었다는 현등사 탑,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리함과 사리, 세종대왕이 자신의 형 효령대군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 조정했다는 하머스님 탑 등이 그 대표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 돼 있다. 그 외에는 광예 1년에 조성 된 법당의 봉선사종, 지장전, 지장보살좌상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 금동 불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드물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좌상을 유일한 부처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올해 이것들을 국가문화재로 추진하고 있다“고 전한다.

 

 

템플스테이 진정한 정진도량을 갖출 수 있는 기획을 만들어 추진계획

 요즘은 템플스테이를 통해 스님들의 삶과 마음가짐을 배우려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현등사 역시 단순한 템플스테이가 아닌 진정한 정진도량을 갖출 수 있는 기획을 만들고, 부족한 내부 공간을 고친 후에 템플스테이를 추진할 생각이다. 한국 불교의 특징인 선종과 교종 정 정토종을 한 대 어울려 그중 정토종을 좀 더 발전시켜,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그 믿음을 이끈다는 것이 주지스님의 계획이다.

절에는 불자도 오고, 불자가 아닌 사람도 스스럼없이 들리는 곳이다. 주지 스님은 모든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그들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진정한 불성이라고 본다. 그리고 절에 누구던 자신의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고 나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남에게 깊게 배려심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아마 스스로를 비추어보고 남을 배려하는 진정한 불성의 마음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 계획이다. 현등사의 주지 스님은, 사회와 가정을 둘로 뗄 수 없듯 사회와 절도 둘로 나눌 수 없다고 본다. 불자던 그렇지 않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사회의 연관 돼 있음을 알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본다. 이웃종교의 사랑의 관념처럼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란 말로 사랑을 대변한다. 크게 사랑하고 크게 베풀고 크게 다가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 관대해 진다면 좀 더 바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반성에 기초를 두지 않고 남의 배려라는 관점에 초점을 둔다면 잘못이다. 하나의 씨가 바른 밭을 만나 좋은 열매를 맺듯 우리는 사회를 바르게 바라보는 바른 관점으로 좋은 사회 현상을 만들어야 한다. 바른 선인의 올곧은 교육, 그리고 스스로 비춰봄, 남에 대한 배려 그 모든 것이 불교가 말하는 불성이고, 그리고 사회가 말하는 도덕인 것이다.

물론 옛말에 진리는 삼척동자도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환갑의 노인도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현등사의 주지스님은 바른 교육 실천자가 앞서고, 우리가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어려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현등사는 오랜 역사가 녹아 있는, 그리고 지금 현재에 가장 닿아 있는 사찰이다.

취재_이학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