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버지는 반탁운동의 선구! 아들 신용철씨는 월남 참전용사!

이학성 기자 2011. 2. 22. 14:52

 

사회/ 화제의 인물/ 국가유공자, 수필가 신용철 씨

 

 

 

 


아버지는 반탁운동의 선구!  아들 신용철씨는 월남 참전용사!


격동의 세월은 가고 한 많은 청춘은 남아

얼굴도 못 본 아버지의 원한을 어떻게 풉니까?

여기 대를 이어 역사의 정치 현장에 과감히 뛰어든 애국충정의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지금은 국가유공자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아들 신용철(63) 씨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신경득 씨를 한 살 때 생이별하고 4남매가 불우한 환경에서 근근이 살아가다가 18살에 소년병으로 입대하고 월남 참전용사로 지원하여 공을 세우고 굳굳하게 장성하여 사회생활을 했다. 그런데 1991년 47년 만에 구소련에서 살아 돌아온 반탁운동의 선구자 장수덕(당시 83) 선생이 강원일보(1993.8.13일자)에 보도 된 기사를 보다가 철원 지역에서 조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며 신탁통치 반대의 뜻을 같이 한 김상준(당시 42), 이의찬(35), 신경득(35), 송병남(35) 명단 중에 아버지 ‘신경득’ 성함을 발견하고 온몸이 전율했다. 생전 처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무정했던 세월이 뒤범벅이 되면서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철원 출신 유일한 생존자 장수덕 씨의 증언에 의하면 신용철 씨의 아버지 신경득 씨는 1946년 반탁운동에 앞장서다 당시 소련군에 의해 강제로 시베리아로 끌려가 모진 유형생활 끝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다. 두 사람이 극적으로 만나 “네가 진짜 신경득의 아들이 맞느냐?” ‘ 네, 제가 바로 그분의 자식입니다.“ 하며 서로 부등켜 앉고 한참을 울었다. 옆에 있던 신용철 씨 부인 김경순 씨도 하염없이 손수건을 적시자 주위가 눈물바다가 됐다.

 

파란만장한 인생가도를 달려온 의리의 사나이

 약속장소인 전쟁기념관 광장 호수가에서 신용철 씨를 만났다. “예로부터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는데 저는 ‘齊家(제가)’도 못했는데 이렇게 찾아주니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듣는 순간 문득 ‘治國(치국)’하고는 상관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듯이 들렸지만 일단 접어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갔다. 신용철 씨는 원주 농업고등학교를 다니다 18살에 소년병으로 지원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라다 어머니마저 행방이 묘연한 고단한 삶이 그로 하여금 생존수단으로 일찍 군을 선택하게 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다가온 월남파병에 기꺼이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무공훈장을 타게 됐지만 훈장보다는 1계급 특진을 선택해서 제대했다. 그래서 지금도 자신의 군번(11153953) 보다 빠른 사람을 보면 술을 살 정도로 군번이 빠른 것을 긍지로 삼고 있는 신 씨는 어려웠던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제대 후 4남매가 힘들게 살았는데 둘째 누나가 먼저 병으로 죽고, 3남매를 먹여 살리면서 롯데 강원지사장으로 촉망받던 형마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순직했습니다. 이후 하나 남은 큰 누나하고도 해어져 살길이 막막할 때였습니다. 남은 것은 105kg 나가는 몸뚱이뿐이었지요. 마침 오치성 장관 동생 추천으로 젊은 나이에 프로 레슬러 천규덕 씨가 맡았던 당시 오치성 내무부장관 수행비서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60년대 반공시대에 막강한 내무장관을 수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고 겨드랑이 옆에 권총을 차고 다닐 만큼 수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 장관을 가까이 보좌하여 조국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업을 해결해가며 처음으로 공직생활의 어려움을 느끼면서 국가대사와 인생의 고락을 함께 체험하기 시작했다.


역대 대통령과의 인연

 “오치성 장관 수행 시 자주 볼 수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저 만치 떨어져 있던 저를 친히 불러 막걸리를 한 잔 받으라고 따라줄 정도로 아껴주셨습니다. 가까이 모실 때마다 매우 서민적이고 격의 없이 대하시며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시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1980년에 갑자기 보안사령관 출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 정치계가 한 순간에 얼어붙자 김영삼, 김대중 야당 지도자들의 지지모임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을 하게 되는 인생역전이 됐다. 본의 아니게 여당생활에서 야인으로 급변하는 삶이었지만 적응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최형우 의원과 가까워 민주산악회 지부활동을 하다가 장관 수행경력을 인정받아 김영삼 대통령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관운이 따랐습니다.” 88년도 도로공사 이사로 발령이 날 쯤 운명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강원일보에 실린 아버지에 관한 기사를 보는 순간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영상이 뇌리 속에 요동치듯 일어났다. “이제 찾을 수 있다. 찾아야한다. 아버지 없이 40여년 켜켜이 가슴에 쌓고 살아온 기막힌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빨리 지나갔어요.” 이제라도 아버지의 존재를 밝혀서 자식의 도리를 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왜, 우리 아버지가 희생되었어야 하는지?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반탁의 반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도서관과 역사학자를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면서 반탁의 의미와 역사성을 새로 알게 되었지요.” 그럴수록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감정은 더욱 깊어갔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이 안 된 이상 지금도 외진 땅 어딘가에 살아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잠 못 이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반탁운동의 살아있는 전설 이철승 총재를 만나다

 “당시 자유민주총연맹의 이철승 총재가 반탁운동의 대부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찾아갔어요. 보자마자 아버지를 보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지요.” 찾게 된 자초지종을 들은 이 총재는 잘 왔다고 하면서 손잡고 아버지의 훌륭한 유업을 받들어 나가자고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반탁운동에 대하여 너무나 한이 맺혀 있는 신용철 씨는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의한 국가통치를 위한 정치적 노력으로 많은 정당이 세워지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통과돼 미국과 소련이 5년 동안 한국을 분할 통치키로 결정했어요. 이때부터 국내 정치상황은 좌익과 우익, 찬탁과 반탁,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당초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는 민족진영이고 공산진영이고 모두 절대 반대에 나섰지요. 36년간의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염원이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시를 받은 김일성 공산진영은 태도를 돌변하여 하루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섰어요.” 당시 정치적 이해타산을 앞세운 찬탁론과 끝까지 민족자존을 내세운 반탁론의 대립 갈등은 결과적으로 6.25동족상잔을 불렀고 민족분단이라는 비운을 낳고 말았다.

“이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철승은 반탁학생총연맹을 조직, 위원장을 맡아 반탁운동의 선봉에 서는 한편 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으로서 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또한 경교장으로 찾아가 김구 선생을 만나서 반탁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하고 민족자주독립을 위한 반탁정신 고취운동에 올인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이철승 총재는 반탁운동의 대부로써 알려지게 되었으나 아직도 반탁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국가차원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그와 관련되어 소련 시베리아 유형을 당한 19인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명예회복이 여전히 방치된 상태이고 그의 유가족에 대한 처우 역시 전무하다.


진실화해규명위원회를 두들기다

 신용철 씨는 2006년도에 여야합의로 국회에서 통과한 진실화해위원회에 희망을 걸고 신경득 외 18인인 조상기, 최중갑, 최윤일, 전용일, 장회선, 김성길, 박병주, 김영호, 김상준, 송병남, 이의찬, 장수덕, 현태묵, 조덕운, 양종염, 황익걸(생), 황이각, 김효진(생)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그동안 발로 뛰어 모은 자료를 준비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증거 미확인이라는 이유로 19인 중 장회선 1명만 진실 규명 통보를 받았다. 다시 재심사를 요청했으나 똑같은 대답이었다. 기자가 신용철 씨와 장시간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자료를 검토해보아도 47년 당시의 정황을 고려하고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 외에 어떤 증거자료가 필요한지 도대체 진실화해위원회의 업무가 재판소도 아닌데 증거 확인자료가 부족하다고 반탁운동으로 일생을 희생한 19인의 한 맺힌 생애를 일종의 죄인 다루듯이 사실여부에 치중하여 냉정하게 결정을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진실과 사실의 차이도 모르는 미숙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진실을 앞선다고 해서 진실을 냉대함은 진실을 두 번 죽이는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엄격한 법정에서도 사실 확인이 미진하더라도 동기와 정황이나 정상을 참작하여 처벌을 신중히 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정치의 수난기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안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미흡한 결정이라 하겠다. 더구나 장회선 1인만이 편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하여 진실규명을 인정한 것은 나머지 18인과 그 유가족을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명칭 그대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현창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억울한 국민의 한을 풀어주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인터뷰/ 국가유공자, 수필가 신용철 씨

대한민국엔 건국절이 없다?

 최근 신용철 씨는 2008년 1월 30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및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다. 이날 모임은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 이철승 위원장을 필두로 하여 각계의 원로들이 대거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 자리에서 신탁통치 반대와 공산주의 배격으로 세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르짖고 1948년 8.15일을 건국절로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신용철 씨는 “금년이 건국 60주년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건국기념절이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건국절이 없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현대사를 바로 잡아 후손에게 떳떳한 자주민족국가를 물려주어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찍이 아버지의 반탁정신을 유훈으로 가슴에 새기고 활동한 덕으로 한 때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친 오제도 변호사의 부름을 받고 그가 발행인인 월간 『申聞鼓』(신문고) 주필을 맡으면서 시대가 요청하는 바른 논지를 펴서 문명을 떨쳤고, 이후 계속하여 민족의 정론을 펼치는데도 최선을 다했다.


종로 피맛골 누비며 문인들과 교류 그리고 신인 수필가상 수상

 중견 언론인 조갑제 씨가 신용철 씨를 ‘의리의 사나이 돌쇠’라는 별명을 붙일 만큼 가까이 지냈다. 종로 뒷골목인 피맛골을 중심으로 ‘시인과 통신’, ‘시인과 화가’, ‘시인과 겔러리’, ‘소문난 집’ 등에서 문인들과 시류를 논하고 주로 수필을 썼는데 『片片雨中』(편편우중)이라는 수필을 써서 조경희 여사의 심사를 받아 정공채 문인협회 회장으로부터 영예의 신인수필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위원장 정목일)으로써 높은 문학적인 소양은 어린 시절 불우했던 만큼 남다른 꿈과 희망을 가졌기에 그때 써놓은 일기장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문학적 식견은 성균관 유교신문 편집장을 맡으면서 더욱 빛을 발했고, 성균관 유림지도자 과정을 수료하고 성균관 유도회 중앙회 상임위원으로 가족법투쟁위원회 언론분과 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2003년도에 국가보훈처에서 공모한 월남 참전수기에서도 당당히 우수상을 획득하여 필력을 떨쳤다. 2006년도에는 한국전례원(원장 김정) 명예교수에 위촉되었고, 월남 참전 맹호부대 최초의 앨범을 보관해 오다가 전쟁기념관에 흔쾌히 기증하기도 했다. ‘의리의 사나이 돌쇠’라고 불릴 정도로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우직하리만치 상대를 믿고 존중한다. 최근에는 동양문화연구소 이사, 성균관유도회 감찰위원을 거쳐 다시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어 유림으로서 활약하고 있고 2007년도에는 동양문화연구소 서정기 소장의 추천으로 KBS 한민족방송 ‘종교와 인생’ 프로에 1주일간 출연하여 유림으로서의 지나온 여정과 희망을 펼쳐서 같은 처지의 해외동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신용철 씨는 “만일 제가 정치계에 계속 몸담았더라면 지금쯤은 저 세상 사람이 됐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함께 어울렸던 많은 사람이 세월의 지난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인생무상이 묻어났다.


명문대가의 후손으로 신숭겸 장군이 시조

 평산 신씨 하면 신숭겸 장군이 시조로서 유명한 집안이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 태조 왕건을 옹립한 개국원훈대장군으로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927년에 대구 공산동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하게 되자 왕건을 피신케 하고 자신이 왕건의 용모로 위장하고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장렬히 전사 합니다. 그 후 태조는 그의 유해를 춘천 서면에 예로써 장사지내고 공신으로 추봉하였으며, 시호를 장절공이라고 했습니다.” 여성으로는 천재 이율곡선생을 낳고 기른 신사임당을 꼽을 정도로 사임당 신 씨에 대한 후손으로서 긍지가 대단하다. 현재 부인 김경순 여사와 슬하에는 3녀를 두었는데 첫째 고은, 셋째 주연은 출가시켰고 둘째 수빈 양과 함께 단란히 살고 있다.


국가유공자를 반납하고 싶다

 신용철 씨는 2002년도에 과거 월남 참전 경력과 부상당한 사실이 인정되어 국가유공자 7급이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아 월남 참전 동기인 친구 송 형에게 언제든지 반납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심중에는 우선적으로 아버지의 억울함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회복을 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과연 제가를 한 연후에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란 정치인들만이 하는 것인가? 왜, 파란만장한 정치적 격동의 세월을 거쳤으면서도 정치를 말하려 하지 않는가? 송 형이 귀띔해 준 말이 있다. 답답한 심정으로 술이라도 한잔 할 때 정치이야기만 나오면 신용철 씨가 자주 쓰는 말이 “술이나 들게~”라는 것이다. 무슨 회한이 그리 많은지 정치를 회피하는 그 심정을 누가 깊이 알까마는 이것이 모두가 한 맺힌 가슴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민심이 천심이라 했다. 이점이 治國(치국) 곧 정치하는 사람들이 꼭 명심해서 상처받은 국민의 아픈 마음을 풀어주어야 할 주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학성 기자

 

 

1965년 월남전 맹호부대 근무시절(왼쪽발 부상)

 

백두산 정기를 느끼며 천지에서..

 

 장백산을 방문한 신용철씨, (당시 유교신문 편집국장)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신용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