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한언론인회, 강원도 춘천, 양구일대 옛 전적지 순례

이학성 기자 2012. 8. 2. 11:17

 

 

 

                                     격전지를 방문한 6.25 참전노병들

                                                     - 말 없는 산하에선 영령들의 숨소리만 들리는 듯

 

 

 6월과 7월은 역사의 아픔을 함께하고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달이다.

 

 

 대한언론인회(회장 홍원기)는 호국보훈의 달인 6월 국가안보의 최북단 전초지인 백령도와 철의 3각지 등을 답사하며 6.25의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휴전협정 59주년이 되는 7월에는 본회 6.25 참전 언론인회(회장 박기병)가 중심이 되어 피로 물들었던 옛 격전지를 찾아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국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등 뜻 깊은 ‘안보체험’을 했다.

무엇보다도 60여 년 전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 바쳐 싸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노 언론인들의 격전지 순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6.25 당시에는 소년병이었으나 이제는 80-90대 노인이 된 몸으로 최전방을 찾아서 호국 영령들을 추도한 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 전선을 지키고 있는 젊은 장병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6.25 첫 승리 쟁취한 춘천대첩

 6.25참전언론인들은 지난 7월 20일 강원도 춘천과 양구일대에 산재한 옛 전적지를 두루 순례하고 순국장병 위령비에 헌화하고 묵념을 올리면서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안보태세를 확고히 다지고, 안으로는 나라를 좀먹는 종북세력 등 '내부의 적'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 성명서(별항참조)도 낭독했다.

이날 6.25 참전언론인들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6.25전쟁 개전초기에 첫 번째로 대승을 거둔 ‘춘천대첩’의 현장이다. 쌍룡부대 관계자는 이날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에서 “1950년 6월25일부터 3일간 한국군 6사단은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려오던 북한군 2군단 산하 2사단과 12사단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고 당시의 전황을 설명했다.

춘천대첩은 개전 3일안에 수도 서울을 함락하려던 북한의 남침 계획에 결정적 차질을 빚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의 한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시간벌기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전사적 의미가 크다. (참전언론인회의 박기병 회장도 춘천사범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역전의 전통을 자랑하는 쌍용부대를 방문한 일행은 대한언론인회에서 미리 준비해 간 ‘무적쌍용부대’(無敵雙龍部隊)라고 쓴 액자를 부대장 박선우 중장에게 전달하고 춘천대첩평화공원에 들러 전쟁영령 위령비 앞에 헌화, 묵념했다.

 

 

‘무적해병’ 용맹 떨친 도솔산 전적지

 춘천지구를 뒤로 한 일행은 오후에는 양구 산악지대에 자리한 도솔산 전적지와 두타연주변의 전적지들을 차례로 돌아보고 장병들의 전투태세도 살펴보았다. 이어서 이 지역의 철통방어를 책임진 백두산부대(사단장 정항래 소장)를 방문, 부대현황을 들은 뒤 홍원기 회장과 박기병 참전언론인회 회장은 ’無敵白頭山部隊‘ 라 쓴 액자를 증정하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이날 백두산부대에서는 6.25 참전 노병들의 부대방문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탓인지 군악대와 의장대까지 등장해서 대대적인 환영퍼레이드를 벌여 노 언론인들을 감동케 했다.

뒤 이어 찾은 곳은 도솔산 전적지다. 이곳은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우리 해병이 보름동안 쉬지 않고 피 흘려 싸운 지역이다. 도솔산지구 전투는 한국 해병대가 산악전투에서도 무적임을 증명해 보인 대 혈전장으로 기록되었다. 백두산부대 도솔대대장 마주영 중령의 설명에 따르면 “일진일퇴의 격전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던 미 해병 제1 사단 5연대와 임무를 교대 한 우리 해병 제1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가 확 바뀌었다는 것이다. 꼬박 15일간의 대 혈의 연속으로 고지는 벌거숭이가 되었을 정도다. 결국 북한군은 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퇴했고 고지는 우리 해병이 완전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정예부대를 자처하던 북한군 12사단과 32사단은 궤멸되었다. 해병은 700여명의 사상자를 낸데 비해 북한군은 3,200명이나 전사했다는 것은 우리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만한 대 전과로 평가된다. 바로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이라고 명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대부분이 산악지대인 중동부 전선에는 6.25때 이름난 격전지들이 지호지간에 잇달아 있어서 방문자들은 깊은 인상을 받게 마련이다. 도솔봉에서 고개를 180도만 돌리면 바로 눈에 띠는 격전지만도 해발 1,142m의 백석산전투를 비롯해서 대우산(1,178m)전투와 그 건너편의 악명 높은 ‘피의 선’(Bloody Ridge)이 있고, 미군들이 너무나 버티기 힘들어서 오죽하면‘단장(斷腸)의 능선’(Battle of Heartbreak Ridge)이라고 이름 지은 고지도 그 언저리에 있다. ‘피의 능선’은 연전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기도 했다.

 

 

고지에 널린 碑木에 머리 숙여

 이날 마지막으로 찾은 두타연(頭陀淵)일대는 전 지역이 지뢰매설로 살풍경하지만 자연경관만은 빼어난 곳이여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묘한 감정에 휩 쌓이게 한다. 중동부 전선의 전적지를 돌면서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노래가 생각났다. 현충일이면 들려오는 ‘비목’(碑木)이란 노래다.

‘초연(硝煙=화약연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중략)/ 이름 모를 비목이여(중략)/ 달빛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이 구슬픈 노래의 작사자는 바로 韓明熙란 사람이다.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중동부 전선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 썩어가는 나무(비목)기둥에 녹슨 철모가 걸려있는 광경을 본 것이 ‘비목’을 작사하는 동기부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뒤에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골들이 긴 밤을 오열하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사람들/ 묘비를 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도 모르는 사람들/ 아직도 호국의 영령 앞에 (주략)평화의 깃발 한번 바쳐보지 못한 이웃들이여, 그대들만은 (제발)‘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죽은 놈만 억울하다고 젊은 영령들이 진노하기 전에...

 

여기에다 “6.25는 북침이다” “천안함의 폭침은 자작극이다”라고 주장하는 악의에 찬 종북세력은 당연히 비목을 불러서는 안 될 1순위의 인간들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전쟁론’의 저자인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일찍이 “전쟁은 다른 수단을 동원한 정치의 연장”이라고 정의했다. 전쟁도 전쟁 나름이다. 남북한 합쳐서 총 2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겨났으며, 산업시설의 80%이상이 완파된 동족상잔의 야만적인 전쟁은 세계사를 뒤져보아도 6.25 한국전쟁 말고는 그 닮은꼴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인류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라는 경구를 우리는 엄숙히 되새겨 보아야 할 시점이다.

글/ 지용우 대한언론인회 논설고문, 사진/ 이학성 뉴스타임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