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9시 “서울광장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 설치”
행정안전부는 지난 19일 “서울시 서울광장을 비롯해 분향소 설치를 희망하는 시·군·구에서 실정에 맞게 분향소를 설치하도록 했다”며 “19일 오전 9시부터 분향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각 시·도에 장례 기간 중 축제 등의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 가급적 연기를 당부하고, 불가피하게 진행해야 하는 경우에는 간소하게 개최하도록 공문으로 협조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사회부 / 이학성 기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걸어오셨던 발자취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 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09 08월19일 9시 현재지방분향소 설치 현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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