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즐거워 함께하는 둘둘치킨”
경영인·정치인으로 우뚝 선 ‘닭박사’
독창적인 소스와 메뉴 개발을 경쟁력으로, 맛을 차별화하여 손님들의 입소문만으로 연일 성업 중인 프랜차이즈 업종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쇼윈도우를 보고 지나가다가 먹음직스런 치킨이 수십 마리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군침을 흘린 적이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둘둘치킨’은 수많은 사람의 시각과 미각을 자극, 일단 한번 먹어본 사람은 다시 안 찾고는 못 배길 만큼 끌어당기는 맛, 결정적으로 이 특별한 맛으로 승부하고 있다.
조류독감 때도 건강했던 통닭
지난 조류독감으로 치킨시장이 주춤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둘둘치킨’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닭의 사육에서부터 소비자가 섭취할 때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HACCP(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제도)에 있다.
항상 믿고 먹을 수 있는 ‘둘둘치킨’은 이 업체만의 엄격한 재료관리와 소비자의 건강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신토불이 맛으로 여전히 사랑 받고 있다.
튀김옷이 얇고 바삭바삭해 씹는 기분까지 즐거운 치킨. 재벌 튀김으로 기름기를 쫙 뺀 살코기는 쫀득거려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을 낸다. ‘둘둘치킨’만의 이러한 특별한 맛은 바로 독특한 파우더와 14가지 엄선된 한방약재 등 각종 재료로 만든 소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까다로운 관리과정을 거친 신선한 닭 때문이다.
이런 빈틈없는 기반을 바탕으로 둘둘치킨은 지난 1997년 프랜차이즈 설립이래 ‘가장 한국적인 신토불이 치킨집’이라는 평을 들으며 외국계 치킨전문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치킨집으로 성장했다.
특히 ‘둘둘치킨’ 정동일 회장은 “지점이 잘돼야 본사가 잘된다”는 경영이념으로 각 지점에 세심한 관리와 배려를 하고 있다. 현재 350여 개의 프랜차이즈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제 수도권 외 지방체인점도 다수 유치할 계획이다. 나아가 세계의 유명 패스트푸드점과 겨루기 위해 곧 북경과 미국 LA 등에 해외 지점도 오픈할 예정이다.
한국 프라이드치킨의 자존심을 자임하고 나선 ‘둘둘치킨’(영어명 TFC, Two Fried Chicken, www.22chicken.co.kr). “닭박사”로 통하는 정동일 회장은 도공들에게나 있음직한 장인정신으로 특유의 입맛을 30여 년째 지키고 있다.
어머니와 소풍 오는 친구가 가장 부러웠던 소년
대부분의 우리 장년층 이상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정 회장도 어려운 시기를 거쳤다.
1954년 전북 무주 태생인 정 회장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5살의 나이에 상경, 자동차정비공, 리어카행상 등 갖은 고생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1982년 과일 장사를 그만두고 오토바이로 안주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죠. 당시 거래처를 잡기 위한 경쟁은 너무나도 치열했습니다.” 정 회장은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거래처가 아니라도 매일 들러 주민들과 얼굴을 익혀나갔다. 그것이 오늘날 둘둘치킨을 국내 최고의 치킨 집으로 성장하게 한 경영전략의 기초가 됐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봉사를 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에서 받은 은혜를 제대로 돌려주기 위해 무엇부터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정 회장은 1995년부터 수도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상경한 후부터 항상 공부에 대한 꿈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군대 제대 후 직장에 다니느라, 장사하느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晩學 1년 만에 고입·대입 검정 합격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는 이 말의 뜻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공부에 임했다. 그러나 막상 사업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장사하고 새벽같이 학원에 나가서 공부하기가 힘에 부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와 꿈이 있었다. 그렇기에 만학도라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했다.
정말 오랫동안 학업을 놓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는 뒤늦은 학업을 만회하기 위해 장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공부했다.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시대가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았고, 또한 배우지 않고 시민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 회장은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배움의 길에 매진했다. 그렇게 1년, 당당히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실로 소년시절, 자동차정비소를 다니며 고시학원을 기웃거리던 때로부터 25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1997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지방의회 과정과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을, 이듬해인 1998년에는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고 2005년 동국대학교 경영학과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CEO는 전문적인 監督과 같은 것”
그는 지난 2003년 10월 6일, 서울시의회 대표로 평양의 류경 정주영체육관 개관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3박 4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남측 참관단은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씨를 비롯한 정씨 일가와 농구단, 기자단 등 80여 명에 달했다.
또한 이날 방북 길에는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 등 체육관 건설에 참여한 15개 사가 대한적십자사에 기탁하는 방식으로 북측에 기증하기로 한 소 100마리도 따라왔다. 분단 반세기, 정확히 57년 만에 처음으로 복원된 경의선 육로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적대시하던 이전 모습과는 달리 수차례 남북교류를 통해 북한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친철한 미소와 웃음으로 따뜻하게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역시 남이 아닌 한 핏줄이란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한민족의 통일이 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방북 소감이다.
“CEO는 이름과 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과감히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며, 그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CEO의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는 이런 각오로 서울시와 중구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서울시 예산특위 위원으로 있으면서 중견간부들에 대한 날카로운 질의와 감시를 했다. 그로 인해 당시 불요불급한 예산은 뒤로하고, 시한을 다투는 사업예산부터 우선 배정하여 집행하도록 하는 등 예산의 효율적인 운영에 한몫 하였다는 주위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항상 지역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서울시 중구청장 시절에도 발로 뛰는 실천력과 사안 해결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이학성 취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