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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작전명..발키리

이학성 기자 2009. 9. 30. 14:51

 7월20일 그날의 주역들..

 

루드비히 베크 : 베크는 반 나치의 정신적 최고 지주라 할 수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 출신인 그는 한 때는 군을 부흥하려던 히틀러와 나치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프리취 장군 사건으로 그들에 대한 눈을 떳으며 마침내 저항으로 발전하게됩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7월 20일 혁명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 제국의 마지막 시종장이었고 그는 백작 작위의 집안이었습니다. 뛰어나고 바른 성품과 능력을 가진 그는 히틀러의 만행에 대하여 반대하여 반 나치에 참여하지만 1943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부상으로 한 쪽 눈과 팔 하나를 잃게됩니다. 그러나 이에 포기하지 않은 그는 다시 복귀하였고 7월 20일에 프롬의 참모로서 히틀러를 암살하기위해 직접 그의 사령부로 폭탄을 가지고 가는 역활을 맡습니다.

 

에리히 회프너 : 회프너 장군은 독일에 뛰어난 기갑부대 명장 중에 한 명입니다. 특히 그의 탁월한 능력은 동부전선에서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하나 적에 밀려 퇴각하게됩니다. 이에 대하여 히틀러는 그를 퇴출시키고 군복 착용까지도 금지시킵니다. 그러나 그의 참모로 지낸적이 있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그를 설득하여 반 나치의 일원으로 참여시킵니다.

 

프레드리히 올브리히트 : 올브리히트 장군은 베크, 회프너, 프롬과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낸 동료입니다. 그 또한 슈타우펜베르크의 설득으로 넘오온 인물 중에 한명이며 보충군의 부사령관을 맡고있었습니다.

 에리히 펠기벨 : 펠기벨 장군은 2차 대전 시작부터 혁명 당일까지 육군의 통신대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베크와 스퇼프나겔과 오랜 친구이며 혁명 당일에 히틀러의 사령부의 통신을 끊어 그곳을 고립시키는 중책을 맡게됩니다

 

에르빈 폰 비츨레벤 : 비츨레벤은 반 나치에 일원 중에서 원수급 인물로서는 가장 오래 전부터 함께한 인물입니다. 1차 대전 때부터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으며 혁명 후 국방군의 총사령관을 맡기로 하였습니다.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 크비른하임은 슈타우펜베르크의 오랜 친구로 사관학교 시절을 함께하기도했습니다. 당시에 그는 올브리히트 장군의 참모였으며 반 나치의 참여자 입니다.

 

베르너 폰 헤프텐 : 헤프텐은 슈타우펜베르크의 부관이며 크비른하임과는 친구입니다. 그 또한 반 나치의 참여자로 슈타우펜베르크를 돕는 역활을 합니다.

 

프레드리히 프롬 : 프롬은 반 나치의 일원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인물로 매번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였습니다. 당시에 그는 보충군의 사령관이었으며 발키리 명령을 내릴 수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회프너와 오랜 친구이기도 합니다.

 

파울 폰 하세 : 하세 장군은 반 나치의 오랜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혁명 당시에 베를린 수비대장을 맡고있었으며 베를린 주변의 주둔군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 헬도르프는 원래 나치스였으며 나치당에 입당하고 돌격대와 친위대에도 지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치에 만행의 대한 반감의 눈을 떳고 반 나치에 참여합니다. 혁명 당일 그는 베를린 경찰 서장으로 베를린의 경찰을 통솔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후 자신의 개인부대인 친위대를 경찰과 통합하여 친위대와 경찰이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답니다)

 

아르투어 네베 : 네베는 헬도르프와 마찬가지로 나치스였으나 그보다는 순수 경찰 출신이라 보는 것이 좋을것입니다. 이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경찰이었으며 나치스가 집권한 후 친위대에 비밀경찰에 들어가 사건 수사 경찰인 RKPA의 대장이 됩니다. 그러나 일찍 나치의 대한 반감을 가졌으며 비밀경찰의 간부로서는 반 나치의 참여한 인물이됩니다. 그는 반 나치 동료들에게 친위대에 여러 비밀경찰과 그들의 기지에 대하여 알려주었으며 나치의 학살반 아인자츠그루펜이 조직되자 그들의 만행을 알아야한다고 느낀 베크 장군의 권유로 아인자츠그루펜의 B반의 대장이됩니다. 여기서 그는 아인자츠그루펜의 목적을 알게되며 반 나치인 만큼 일을 불성실하게 하며 시찰온 히믈러에게 이 짓을 그만하자고 권합니다. 결국 이 살인반에서 사임하며 혁명 당일에는 새로이 경찰을 조직하고 나치의 인사들을 체포하는 역활을 맡습니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 : 레머는 육군에서 뛰어난 야전 장갑차 부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8번의 전신의 상처를 입고 히틀러로부터 직접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물을 반 나치 일원들이 단지 비정치적이고 상관 말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이유로 끌어들였으며 결국 그를 끌어들인 것이 엄청난 실수 였음을 알게됩니다.

(서부전선의 인물들)

 

케저 폰 호파커 : 호파커는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동생이자 반 나치 일원 중에서 유일한 공군입니다. 그는 혁명 당일 슈타우펜베르크로부터 지령을 받았고 프랑스 지역의 혁명을 착수합니다.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 스퇼프나겔은 반 나치의 일원 중에 한 명이며 육군의 노장 중에 한 명입니다. 당시에 그는 프랑스의 군정 총독이었으나 오히려 프랑스인들을 관대히 대우해주었고 특히 히틀러가 내린 지령인 레지스탕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 방편에 대하여 반대하였답니다. 그리고 혁명 당일에 가장 탁월한 행동으로 순식간에 프랑스의 친위대를 체포합니다.

 

권터 폰 클루게 : 클루게는 반 나치에 참여한 원수 중에 한 명이며 독일에 대표적인 명장입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지성을 따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여러 암살기회에서 행동을 주저하며 혁명 당일에도 이 안좋은 성격으로 일을 쉽게 결단치 못합니다.

 

권터 블루멘트리트 : 블루멘트리트는 뛰어난 보병 참모 중에 한 명이며 다양한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반 나치에 참여했으며 클루게를 보좌하였습니다.

 

한스 슈파이델 : 슈파이델은 유명한 철학 박사 출신이며 유럽전선으로 온 롬멜의 참모를 지냅니다. 그는 롬멜을 설득하여 반 나치에 참여하게했으며 혁명 당일에는 계속하여 혁명을 이루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한스 폰 보이네베르크 : 보이네베르크는 반 나치의 일원이며 파리시의 주둔군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스퇼프나겔의 명을 받들어 파리의 친위대 무리들을 재빨리 생포하는 공을 세웁니다.

 

 

히틀러처럼 미치광이 전략이 아니라 우수한 군수뇌부가 현명한 작전을 펼쳤다면 전쟁은 더 길어졌죠. 물론 연합군과 강화조약이 맺어졌다면 이야기는 다르겟지만 과연 쉽게 강화조약이 맺어졌을까요?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을리가 없거든요. 독일을 파멸로 이끌어가던 어이없는 히틀러의 작전이 독일을 더 빨리 망하게 했거든요. 기독교의 유명한 신학자 본훼퍼도 이사건으로 끌려갔죠.. 결국 죽었고요. “암살은 기독교윤리에 어긋납니다.” 괴어델러는 흔들리지 않았다.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시선이 일시에 디트리히 (본훼퍼)에게 쏠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본훼퍼 목사?” 괴어델러가 재촉하듯 물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고도 히틀러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오?” (본훼퍼가 대답합니다.) “그런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악한 행동보다 악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더 나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값을 치름으로써, 더 큰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히틀러 아래서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유대인과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 개개인에게는 없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남은 유일한 한가지 방법으로 독재자의 만행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살인 현장에서 공범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히틀러를 죽인 것으로 인한 죄 값보다 오히려 방치하는 것이 더 큰 죄를 부르는 게 아닐까요?” “미친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 바퀴에 사람이 깔려있다면, 교회는 그 바퀴 아래 깔려있는 사람을 끄집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깔려죽지 않도록 그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야 합니다.” 본 회퍼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중 한 분 이시지요.. 베를린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잠시 영국 망명후 다시 귀국후...1940년 여름 이후 본회퍼는 독일 군부내 군정보부에서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는 그의 매부 도나니의 알선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결국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부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그리하여 본회퍼는 그의 매부, 군정보 요원, 군지휘관, 정치인들과 결탁 히틀러 암살에 나섭니....다. 이 때에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즉,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그 후... 히틀러의 암살 실패후....1945년 사형을 당하게 되지요.(비교적? 젊은 나이에...) 본 훼퍼 신학생들이 좋아하는 신학자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암살 모의중 가장 근접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탁자가 들리면서 그것이 폭발충격을 막은걸로 압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경상에 그쳤구요. 성공했다면 적어도 1000만명의 목숨은 건졌을 겁니다     (원문참조)                                  

   

  2009년 1월 27일  그런데로 유쾌했던 설 명절이 끝나고 오붓하게 가족과 함께 롯데 시네마에서 영화 작전명발키리를 보고 왔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탐크루즈의 내한방문때도 아무 관심 없었으나 이 한편의 영화로 그는 내 맘속 영웅으로 오래  자리잡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탐 크루즈..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찾아  아마도 몇일.. 잠을  설칠것이고 클라우스 폰 슈타벤버그대령의 애국심에 한 동안은 마음 따뜻할것이다.

 

 

출처 : 동글이네 초록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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